상속녀들

패션 제국에서 다이아몬드 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황제의 딸들! 상상을 초월하는 재력에다 어린 시절부터 단련된 패션 감각을 지닌 이들 덕분에 패션 제국이 날로 흥미로워지고 있다.



루이 비통, 디올, 셀린, 지방시, 겐조, 펜디, 마크 제이콥스, 도나 카란, 에밀리오 푸치, 벨루티, 불가리, 태그호이어, 쇼메, 위블로, 드비어스, 겔랑, 프레쉬, 메이크업 포에버, 아쿠아 디 파르마, 모엣&샹동, 뵈브 클리코, 돔 페리뇽, 헤네시, 봉마르셰, 세포라 등등. 이달 <보그>에 상표를 올린 브랜드 목록이 아니다. 프랑스 갑부이자 럭셔리 업계의 대부인 LVMH 그룹 회장, 베르나르 아르노가 소유한 럭셔리 상표의 일부다. 이런 사람을 아버지로 둔 딸들은 대체 어떤 삶을 누리게 될까? 그 상상을 현실로 즐기는 행운의 주인공이 실제로 있다. 말 그대로 ‘다이아몬드 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여인 중 선두 주자는 델핀 아르노다.

아빠를 닮아 살짝 처진 눈꼬리에 뾰족한 콧날을 자랑하는 서른여덟 살의 델핀은 단연코 지금 패션계에서 가장 파워풀한 여성 중 한 명이다. 루이 비통 부사장직을 맡고 있는 그녀에게 직함은 액세서리에 불과할 뿐. 아빠 소유의 모든 브랜드를 관할하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남동생 앙투완 아르노는 벨루티 CEO). 디올에 라프 시몬스를 강력 추천했고, 오프닝 세레모니 듀오를 겐조에 밀어붙인 것도 그녀. 지난해 J.W. 앤더슨을 로에베에 영입하거나 런던의 젊은 구두 디자이너 니콜라스 커크우드에 투자한 것 역시 델핀이 힘을 쓴 덕분이다. 게다가 작년 최고 화제였던 니콜라스 게스키에르의 루이 비통행 역시 델핀의 물밑 작업이 크게 작용했다. 이 특종 뉴스를 단독 보도한 <WWD>는 이렇게 덧붙였다. “LVMH 내 소식통에 따르면 델핀 아르노가 니콜라스 게스키에르에게 개인 브랜드 론칭을 약속하며 그를 루이 비통으로 끌어들였다고 한다.”

앞으로도 이 럭셔리 황제의 딸이 지닌 영향력은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진 않을 것이다. 그녀는 지난해 11월 말에는 ‘LVMH 프라이즈’라는 이름의 신인 디자이너 발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재능 있는 젊은 디자이너에게 무려 30만 달러의 상금을 주는 이 콘테스트의 심사위원은? 칼 라거펠트, 마크 제이콥스, 니콜라 제스키에르, 라프 시몬스, 피비 파일로, 리카르도 티시, 움베르토 레온과 캐롤 림. 이 패션계 거물들을 끌어들인 인물 역시 델핀이다. “콘테스트에서 우리의 우선순위는 크리에이티브였죠.” 공식적으로 이 프로젝트의 얼굴마담인 델핀이 설명했다. “이 디자이너들만큼 미래의 디자이너를 꼽는 데 적합한 심사위원은 없을 겁니다”라고 말했지만, LVMH에서 필요한 새싹들을 미리 섭렵하려는 그녀의 야망이 엿보인다(그녀는 전 세계 패션 스쿨의 졸업 작품전을 돌며 재능 있는 학생들에게 직접 디올과 비통의 인턴십을 제안하기도 한다).

사실 패션계에서 매력적이고 파워풀한 딸들의 존재는 늘 돋보였다. 한때 편집장들의 딸들(안나 윈투어의 비 섀퍼, 카린 로이펠트의 줄리아 헤스토앙)이 관심을 끌었고, 슈퍼모델들의 2세(케이트 모스의 릴라 그레이스, 크리스틴 맥미나미의 릴리 맥미나미)가 손쉽게 스타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주목받는 딸들은 고귀한 패션 귀족 가문의 딸들이다. 가문으로부터 물려받은 상상을 초월하는 재력과 어릴 때부터 갈고닦은 감각을 바탕으로, 이들은 이미 가업을 물려받기 위한 후계자 수업을 거쳤거나, 자신만의 비즈니스를 이끌기 시작했다(2세 대결로 화제가 됐던 한국 패션 유통업계 재벌 역시 마찬가지).



최근 패션 회전문이 또 한 번 돌아간 곳은 뮈글러 하우스다. 악동 니콜라 포미체티가 떠난 브랜드는 더 이상 기사회생할 수 없을 거라는 비판적인 뒷얘기가 들려올 때쯤, 뮈글러 하우스는 회심의 카드를 꺼냈다. 런던의 데이비드 코마를 새 디자이너로 임명한 것. 그리고 이 결정 뒤에는 ‘클라란스 자매’ 중 한 명인 버지니 쿠르탱 클라란스가 있었다. 클라란스 창립자의 손녀인 그녀는 지금까지는 신상을 빼입고 패션쇼에서 포즈를 취하거나, 패션 파티를 즐기는 모습으로 익숙했지만, 가문이 소유한 뮈글러에 위기가 닥치자 본격적으로 가업에 뛰어들었다. 브랜드의 개발,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디렉터(한국으로 치면 실장님?)로 자리 잡은 버지니는 이제 코마와 함께 뮈글러의 제2 전성기를 노리고 있다.

직접 디자인을 맡아 하우스를 이끄는 딸도 있다. 한때 배우를 꿈꾸던 미쏘니 가문의 마르게리타 미쏘니는 엄마인 안젤라 미쏘니 곁에서 후계자 수업에 열심이다. 뉴욕에서 연기를 배우며 사춘기를 보낸 그녀는 2010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물론 자유를 만끽해온 상속녀에게 처음부터 패션 잡무가 쉬울 리 없었다. 어느 영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엄마 앞에서 매일 서럽게 울었다”고 고백한 그녀에게 사무실은 지루한 일상 그 자체. 여느 모녀 관계처럼 때로 아슬아슬한 긴장감으로 가득하지만(버릇없이 구는 마르게리타를 참지 못한 안젤라가 언젠가 회의 시간에 손등으로 딸의 입을 내려치기도 했다!), 이제는 그 관계에 익숙해지고 있다. “우린 다른 스타일을 가졌어요. 제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다면 엄마나 할머니가 만든 옷을 똑같이 만들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취향은 같아요. 그래서 여러분이 만족할 만한 스타일을 선보일 수 있다고 자신해요.”

초현실적 디자인으로 무장한 컬트 주얼리 라인을 이끄는 델피나 델레트레즈 역시 패션 상속녀 중 한 명이다. 엄마인 실비아 펜디가 은퇴한다면 델피나가 가문의 4세대를 대표해 펜디를 이끌어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주얼리 디자이너의 삶에 만족하는 눈치다. “엄마와는 다른 각도와 시선을 갖고 싶었어요. 지금으로선 제 열정의 대상이 주얼리입니다. 하지만 미래를 점칠 순 없잖아요?”

이렇게 신세대가 가업을 이으며 새로운 전성기를 누리게 된 가문도 있다. 파리의 다이아몬드 브랜드인 레포시는 고작 26세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가이아 레포시 덕분에 아주 참신한 브랜드로 거듭났다. 화가를 꿈꾸며 회화와 고고학을 배우던 그녀는 도저히 아버지의 취향을 참을 수 없어 직접 뛰어들었다. “아빠가 이끄는 브랜드 이미지 중 맘에 들지 않는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컬렉션에 참여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죠.” 가이아는 먼지 쌓인 레포시 이미지에 산뜻한 공기를 주입했고, 덕분에 레포시는 파리 방돔을 지키는 주얼리 브랜드 중 가장 쿨한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존 로샤의 딸로 런던을 대표하는 신인 디자이너로 떠오른 시몬 로샤, 할리우드 악동들과 어울리며 반항기를 보낸 후 남(Nahm)이라는 셔츠 드레스 라벨을 론칭한 타미 힐피거의 딸 알리 힐피거, 지금은 사탕 가게를 운영 중이지만 언젠가 아빠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게 분명한 랄프 로렌의 딸 딜란 로렌, 삼촌의 사랑을 독차지해 베르사체 브랜드의 대주주가 된 도나텔라 베르사체의 딸 알레그라 베르사체 등도 주목할 만한 상속녀들이다.

변화와 새로운 것을 원하는 패션계에서 그 대상이 디자이너인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 그리고 모든 것을 뒤집고 변화를 몰고 올 새로운 세대의 출현 뒤에는 패션 귀족 상속녀들이 당당히 자리 잡고 있다. 바야흐로 상속녀들의 시대가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