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존재

그는 자신을 ‘새가슴’과라고 한다. 하지만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저항하는 연약한 보통 사람을 연기하는 데 그만한 적자도 없다. 달걀로 바위를 치는 아름다운 ‘승부사’며 위대한 ‘약자’인 김강우를 만나보자.

이너로 입은 슬리브리스 티셔츠는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네온 컬러 팬츠와추상적인 패턴 재킷은 질 샌더(Jil Sander), 위빙 슈즈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언제나 일하는 중이네요. 회전율이 높은 배우예요.

전 일할 때가 좋아요. 한두 달 쉬면 다시 촬영에 들어가곤 하죠. 새가슴과라 쉬고 있으면 걱정이 많습니다.

소심한 사람은 휴식을 버거워하죠. 어쨌든 늘 조바심에 몸이 단 ‘새가슴’과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문제를 담은 영화 <찌라시 : 위험한 소문>을 선택했다는 게 흥미로워요.

‘찌라시’라는 단어가 호기심을 유발하지만, 이야기 자체는 진중합니다. 부제로 붙인 ‘위험한 소문’이 더 적절하다고 볼 수 있어요.

‘고 장자연’ 사건이라는 연예계 환부를 건드린다는 점에서 더욱 아슬아슬해 보입니다. 정진영, 고창석, 박성웅 같은 밀도 높은 남자 배우들과 함께 출연한다는 점에서 퍼즐처럼 짜맞춰진 <범죄의 재구성>이 연상되기도 하고요.

포스터 분위기는 <저수지의 개들> 같지만, 사실 영화는 제가 새로운 세상을 만나 당황하고 쫓고 쫓기는 이야기입니다.

1인칭 시선이라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저는 여배우를 키우는 매니저입니다. 투철한 직업의식은 없지만 애정을 쏟은 여배우가 찌라시로 인해 죽자, 그걸 유포한 배후를 찾아 다니죠. 그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이 사회의 거대한 부조리와 대면하게 됩니다. 내가 배후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하수인에 불과하고, 파면 팔수록 소문의 뿌리는 기득권의 속물적인 이해관계와 얽혀 있죠.

관객들이 당신의 모험을 통해 소문 속으로 진입하겠군요.

마치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를 보는 것 같을 거예요.

김광식 감독은 실제 사건을 취재해서 사실성을 부여했을 텐데요.

제가 만난 도청 업자와 찌라시 업자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반죽만 해서 넘기고 원래 재료는 다른 데서 온다.” 정치권과 재계가 자기 이익을 위해 소문을 없애거나 퍼뜨리고 있다는 거죠. 일개 매니저였던 저는 갈수록 당혹스러움에 빠집니다.

소문의 진상이란 애초부터 허상이군요. <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라는 백가흠의 소설이 떠오르네요. 말에 말을 붙여서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그게 소문의 태생적 메커니즘이죠.

맞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복수의 이야기인가요?

결국엔 달걀로 바위를 쳐서 악의 무리를 소탕합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마저 찌라시로 돌죠.

시시각각 연예인의 사생활을 탐하는 대중의 ‘길티 플레저’를 건드리고 있군요. 결국은 우리 모두 소문의 유포자이자 희생양이죠.

비단 연예인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에요. 일개 개인이 거대 권력과 기업에 어떻게 승부해야 하는가. 그게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거대 권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개인의 이야기가 많이 영화화되고 있어요. 폭력적인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한 변호사의 이야기 <변호인>이라든가, 대기업의 산업재해로 죽은 딸과 그 죽음을 증명하는 아버지의 싸움을 담은 <또 하나의 약속>이라든가. 배우 입장에서는 힘 있는 이야기에 출연한다는 장점도 있지만, 이슈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을 법한데요.

사실 지금 출연 중인 영화 <카트>도 마트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아주머니들의 파업을 담은 실화예요.

사이즈가 각기 다른 깅엄체크 수트와 베이스볼 화이트 셔츠는 김서룡 옴므(KimseoryongHomme), 슈즈는 구찌(Gucci).

명필름의 야심작이라고 들었어요.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출연한 일련의 영화가 <돈의맛> <찌라시> <카트>까지 사회적 메시지가 강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사회파 배우냐는 질문도 받습니다.

배우로서 자유로워야 할 선택의 행보에 한계가 지워질 수 있겠군요.

배우는 투사가 아닙니다. 사회 변화의 중심에서 직설 화법의 주체로 나서는 건 원치 않아요. 하지만 의도하지 않아도 끌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거야말로 인본주의적인 감수성의 정점에 서 있는 배우의 본능 아닌가요? <변호인>의 송강호 씨도 특정 정치인에 대한 호오와 상관없이 그 이야기와 캐릭터에 끌려 연기했다고 하더군요.

맞습니다. 배우를 신념의 관점에서 확대 해석하는 건 부담스럽습니다. 전 이 이야기의 드라마가 좋았고, 그 이야기 속의 인물이 되고 싶었을 뿐이죠.

<카트>에선 어떤 역할인가요?

주인공은 마트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아주머니들이에요. 파업의 ‘파’ 자도 모르는 순박한 분들인데, 갑자기 용역들이 들이닥치고, 실업 상황에 내몰리죠. 저는 정규직 직원이지만 불의에 맞서 노조위원장까지 하게 되는 실존 인물을 맡았어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진짜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죠.

당신이 거의 처음으로 선봉에 서서 사람들을 이끌고 가는 영화가 아닌가 싶은데요?

하하. 기운 센 40~50명의 아줌마들을 이끌고 갑니다.

듣기만 해도 에너지가 좋은 영화네요.

흥행도 하면 좋겠어요. 상업적으로만 보면 실망할 수 있지만, 메시지는 분명한 영화죠.

전작인 <돈의 맛>은 어떤 메시지로 어떤 관객의 지지를 받았다고 생각하시나요?

<돈의 맛>은 약자의 편에 섰지만, 관객들에게 내 편은 아닌 것 같다는 인상을 준 것 같습니다. <변호인>이야말로 관객들에게 내 편에 서서 대신 싸우는 느낌을 심어준 영화죠.

<돈의 맛>은 지나치게 높은 전망대에서 자본주의 권력을 야유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죠. 한 마디로 너무 꼬고 젠체한 게 아닌가 싶어요.

바로 그 점이 배우로서는 재미있었지만, 관객은 불편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흥행에 대해 얼마나 걱정하시나요?

아무래도 제 작업이 연속적으로 이어져야 하니까요.

실업 상태를 견디는 것도 배우의 능력이죠. 최민식 씨도, 한석규 씨도 아주 오랜 시간 영화 현장에서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왔잖아요.

네, 하지만 전 이제 서른일곱입니다.

서른일곱은 정말 좋은 나이예요. 직업적인 패기가 절정에 이를 시기죠.

37세에 맞는 관록도 있어야 하고, 신세대와 소통도 해야 하는 나이예요. 송강호 선배는 정말 대단합니다.

하정우 씨와 동갑이죠?

그분과 저는 시작점이 달랐습니다. 그게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느냐 아니냐도 중요합니다.

얼마나 일했죠?

12년간 달렸습니다.

지치지 않나요?

체력은 저하됐지만, 지치지는 않습니다.

또 어떤 걱정이 있나요?

아이들이 무섭게 자란다는 점이요. 첫째 아들이 네 살, 둘째 아들이 두 살이에요. 정신 차리고 똑바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가요? 그래서 아이들이 자라는 게 겁이 납니다. 배우는 감정의 진폭이 큰 편인데, 가족의 일원으로 평화롭게 눌러야 된다는 것도 고민입니다.

잉크가 번진 듯한 그래픽 패턴이 프린트된 수트는 캘빈 클라인 컬렉션(Calvin Klein Collection), 로퍼는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

직업적으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나를 믿고 나를 알기 위해 분투합니다. 나 자신을 객관화하기 위해 매일 내면에서 싸우죠. 작품에 부딪히면 나를 극대화하거나 감춰야 하니까요. 들어와라, 요만큼 살았으니 이제 어떻게 나가는지 보자, 이거죠.

처제인 한혜진 씨와는 그런 내면의 싸움에 대해 의견을 나누나요?

가족과 예민한 이야기는 사절입니다. 우린 처제와 형부 사이일 뿐입니다. 예외적으로 동서지간이지만 기성용을 한 명의 스포츠 예술가로서 존경합니다. 추신수 선수도 마찬가지예요. 자기 한계와 위기에 부딪혀도 참고 또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놀라운 사람들이죠.

자신의 연기를 어떻게 평하나요?

캐릭터들이 항상 억울한 사람들이라는 평을 들었습니다.

힘없고 억울하지만, 꿋꿋하게 일어서는 보통 사람이죠.

네, 하지만 자꾸 당하니까 당하지 않고 거꾸로 제가 선방을 날리는 역할을 해보고 싶습니다. 때려도 내가 때리고 움직여도 내가 움직이고 싶은 거죠.

약자로서의 청년 이미지를 벗어나고 싶은 건가요?

청년들도 현실에선 약자지만, 영화에서마저 자신들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예요.

오호라! 그렇다면 요즘 영감을 주는 작품은 뭔가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라는 영화에 푹 빠졌습니다. 2시간 동안 남의 삶에 빠졌다가 나온 후에도, 20시간 동안 생각하게 만들더군요.

도시에서 성공한 아버지와 시골 전파상에서 느리게 사는 아버지가 나오죠. 어떤 아버지가 마음을 만지던가요?

전파상 아버지에게 끌리더군요.

역시 약자에 끌리네요. 그분의 대사가 압권이지요. “져본 적이 없는 놈은 남의 맘을 모르지.”

네, 담담한 연기도 좋았습니다.

영화 속에서 강자가 못 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타인에게 무자비한 캐릭터는 저와 맞지 않습니다. 저 자신도 혼란스러워요.

얼굴이 작고 피부가 희고 동안인 것도 이유가 되겠죠. 비슷한 느낌의 박해일 씨도 무자비한 캐릭터를 맡은 적이 없으니까요. 혹은 살면서 힘들었던 기억이 없어서일 수도 있어요.

동의합니다. 살면서 힘들었던 적이 없어요. 먹고살기 힘든 적도 없고,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한 적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만 저를 괴롭혔죠.

행운아로군요.

힘든 기억이 없었던 것은 제가 누군가에게 절대적인 보호를 받은 거겠죠. 그래서 부모님께 감사하고, 그래서 부모로 사는 것이 더욱 두렵습니다.

2002년 첫 작품이 <해안선>이었죠?

네, 김기덕 감독님 영화에 오디션을 보고 들어갔습니다.

이후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에서 시인 역할로 출연한 걸 떠올린다면, 하정우 씨와 함께 드물게 홍상수와 김기덕 두 작가주의 감독 영화에 동시 출연한 배우네요.

하하하. 그런데 <해안선> 이후에는 바로 <실미도>로 끌려갔죠.

자원했으나 저항할 수도 없었던, 힘든 나날이었겠군요. 2003년 첫 드라마 주연작 <나는 달린다>에서도 계속 달렸죠?

네. 부모 없이 자라 공장에서 일하는 공원이었지만,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달렸어요. 그때까지 드라마 주인공이 대부분 백마 탄 왕자님이었기 때문에, 저 같은 루저 주인공이 눈에 띄었던가 봅니다.

보세요!! 당신이 계속 약자 역할을 맡는 데는 이유가 있어요. 그 옷이 가장 잘 맞기 때문이에요.

오! 제가 첫 단추를 잘못 끼웠군요.

그 모습이 대중에게 각인된 당신의 소중한 존재감인 거죠. 대중에겐 반드시 그런 인물이 필요합니다.

그게 왜 하필 저인가요?

영웅이나 악당이 되고 싶은가요?

아니요. 저는 있을 법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찌라시> <카트> 다음으로 어떤 영화가 예정돼 있나요?

없습니다. 없어서 또 불안합니다.

당신이 약자라고 생각하나요?

아니요. 하지만 저는 비정규직입니다. 가정이 생긴 이후로 더욱 맘을 놓을 수가 없죠.

그래서 당신이 우리 사회의 보통 사람을 가장 잘 연기할 수 있는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