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성, 김유정, 김향기의 아름다운 시절

고아성, 김유정, 김향기 세 소녀가 있다. 영화 <우아한 거짓말>에서 이들은 교복을 입고 쓰라린 ‘애도의 시간’을 살아낸다. 시간의 속도에 비례해 몸이 자라는 것만 느끼기에도 황홀하던 시절, 세 소녀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고아성이 입은 가죽을 덧댄 베이지색 원피스는 진태옥(Jintéok), 흰색 로퍼는 레이크 넨(Reike Nen), 김향기가 입은 실크 소매 블라우스는 미스지 콜렉션(Miss Gee Collection), 레이스 원피스는 진태옥, 펀칭 디테일 슬립온 슈즈는 페르쉐(Perché), 김유정이 입은 민소매 셔츠와 크림색 원피스는 진태옥, 로퍼는 레이크 넨.

삶을 설명하는 데는 때로는 소녀로 지낸 한 시절이면 충분하다. 내가 사랑한 시절, 내가 사랑한 사람들, 내 안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진 것들, 지금 내게서 빠져 있는 것들… 그 모든 것이 소녀 시절에 이미 찬란하게 빛났다가 사그라졌다. 이후에는 모두 짐작할 수 있는 일들의 연속이다. 우리는 그때 이미 충분히 불안한 존재가 되었으므로, 그 뒤에 흘러가는 시간은 휴식이거나 인내일 뿐.

마취가 되지 않는 성장통의 시간… 고아성과 김유정과 김향기는 지금 그 시절을 지나고 있다. 기억이 생성되는 네 살 전후의 시간부터 천장이 높은 스튜디오에서 박수를 치던 사람들과 카메라에 둘러싸여 있었던 소녀들. 그리고 그것을 행복한 숙명으로 받아들인 지혜가 그녀들을 구별된 존재로 만든다.

영화 <우아한 거짓말>이 이 특별한 세 명의 소녀들을 한자리에 불러 들였다. 김려령 작가의 원작 <우아한 거짓말>은 거짓말과 왕따와 자살을 소재로 한 가슴 아프고도 씩씩한 소녀들의 이야기다. 열네 살 평범한 소녀의 죽음, 그리고 그 속의 ‘사실’과 ‘진실’. <우아한 거짓말>은 작가 김려령이 <완득이> 이후 자전적인 경험을 통해 탄생시킨 새로운 메시지이자 대중에게 건네는 안부 인사다. “잘 지내고 계시지요?”

김향기가 자살한 천지 역을, 고아성이 동생의 죽음을 되짚어나가는 언니 만지 역을, 김유정이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천지를 이용한 친구 화연 역을 맡았다. ‘우아한 거짓말’을 카피로 한 배우들의 캐릭터 포스터를 보면 그들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아성의 ‘힘들지 않다’는 말, 김향기의 ‘외롭지 않다’는 말, 김유정의 ‘행복하다’는 말, 이 모두가 다 ‘우아한 거짓말’이다. 입술의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기면 아이든 어른이든 타인을 상처 입히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소녀들은 <우아한 거짓말>의 촬영 현장에서 배웠다.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덤으로. 그렇게 남들의 이목을 받는 배우의 길이자, 자기들끼리 비밀을 쌓으면서 즐거워하는 소녀의 길은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도 하고, 꼬였다가 풀리기도 한다.

고아성이 입은 레이스 소매 가죽 톱과 오간자 러플 스커트는 진태옥(Jintéok), 슬립온 슈즈는 레이크 넨(Reike Nen), 김향기가 입은 꽃무늬 레이스 톱과 흰색 스커트는 진태옥.

고아성의 눈빛엔 불안이 없다. 고아성은 열네 살 무렵, <괴물>에서 송강호의 딸 ‘현서’로 등장할 때부터 흔들리지 않는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최근작 <설국열차>에서 다시 한 번 송강호의 딸 ‘요나’로 ‘흔들리는’ 기차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인류의 희망(혹은 절망)을 보는 견고한 목격자로 남는 것도 그녀다. 악성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해 한강에 살포한 화학약품 ‘에이전트 옐로우(<괴물>)’나,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대기 중에 뿌린 화학약품 ‘CW-7(<설국열차>)’도 결코 고아성의 눈빛에 절망을 드리우지 못한다.

김향기의 눈빛에는 악함이 없다. 애견 영화 <마음이>나 고현정의 드라마 <여왕의 교실>에서 김향기는 괴로워도 슬퍼도 ‘캔디처럼’ 웃는다. 신이 성경에서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지니”라고 할 때의 ‘아이’로서의 고유한 정체성이 김향기에겐 아름답게 보존되어 있다. <여왕의 교실>에서 비겁하고 무자비한 어른의 대표로서 고현정의 핍박과 독설을 ‘명랑하게’ 견뎌낼 만큼 향기의 가슴엔 순진무구함과 용기가 샘솟는다.

김유정의 눈빛에는 결핍이 없다. 감정을 과하게 사용하지 않는 몸에 밴 절제와 겸손한 냉담자로서 훈련된 매너가 그녀를 우아하게 만든다. <해를 품은 달>의 연기는 지금 보면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손사래를 치지만, <해품달>은 그녀를 스타로 만들었다. 소녀이면서도, 동시에 ‘여신’의 칭호를 받고 있는 김유정. 김유정은 <우아한 거짓말>을 ‘천지와 만지’ 자매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저는 천지보다 불쌍한 아이예요. 처음엔 제가 가해자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가 끝날 때쯤엔 모두가 피해자처럼 보였으면 좋겠어요.”

교집합과 합집합과 여집합과 공집합의 세계에서 소녀들은 처절하게 서로를 무리 지었다. 무리에서 이탈되고 싶지 않아서, 저 혼자 외롭고 싶지 않아서. 친구가 목숨보다 더 소중한 사춘기. 그래서 말할 수 없이 잔인해지며 말로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속수무책이 되어버린다. 세월이 지나고 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한다. 시간의 속도에 비례해 몸이 자라는 것만 느끼기에도 소스라치게 황홀하던 시절, 세 소녀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흰색 셔츠, 회색 가죽 플레어 스커트와 벨트는 모두 토즈(Tod’s).

아성의 이야기

“네 살 때부터 모델을 했어요. 에이전시에서 오디션을 봤고, 그 후로 주욱 현장에 있었죠. 스튜디오 냄새, 높은 천장에 압도된 느낌… 제 유년을 이루는 퍼즐들이죠. 항상 누군가의 딸이었지만 이제까지 누군가의 아역을 한 적은 없어요. ‘고아성은 처음부터 고아성이었다’고 누군가 그러더군요. 누군가의 아역으로 등장하는 게 나쁜 게 아니라, 이젠 제가 그 시기를 놓쳤다고 할까요. 전 예쁘지 않아요. 평범하게 생겼지만 자기만의 매력을 빨리 아는 게 중요하잖아요. 전 항상 제 나이에 맞는 역할을 했고, 어른들이랑 함께 작업했어요. <괴물> <설국열차> 같은 대작만 기억하시지만, 제 필모그래피는 작은 영화들이 더 많아요. <여행자><라듸오 데이즈> <즐거운 인생>…

그래도 봉준호 감독님과 송강호 아저씨, 그리고 틸다 스윈튼을 제 인생에서 빼놓을 순 없어요. 그분들을 만난 건 행운이 많았던 제 인생에서도 더욱 빛나는 행운이었으니까요. 베를린 영화제에서 틸다를 만나기로 했어요. 그녀가 출연한 <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베를린 개막작으로 선정됐기 때문에, 우린 함께 그 영화를 보기로 했어요. 틸다야말로 제 인생의 롤모델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배우로서나 사람으로서나 그녀를 보면서 ‘동경’이란 감정을 처음 느꼈고, 동시에 자괴감도 커졌죠.

처음 재능이 있다고 느낀 건 <괴물>이었어요. ‘현서’를 할 때가 열네 살. 지금은 그때보다 생각이 많아졌어요. 생각, 생각은 약이면서도 독이죠. 생각이 끼어들수록 저는 자신이 없어져요. 제 욕심과 실력이 비례하지 않는다고 느끼죠. 연기야말로 ‘우아한 거짓말’이라는 게 평소 저의 지론이었어요. ‘우아한 거짓말’의 반대는 ‘부끄러운 진심’! 지금은 부끄러운 진심의 상태… <우아한 거짓말>은 제게 너무 버거운 짐이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상실감, 전 그런 경험이 없어요. 상상할 수 없는 슬픔을 연기한다는 거, 그건 그냥 ‘척하는’ 연기일 테니 피하고 싶었죠. 그즈음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를 읽었어요.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은 뒤의 슬픔에 대한 집요한 추적… 그걸 읽고 나서야 ‘감’이 왔어요.

김향기가 입은 흰색 셔츠와 회색 플레어 스커트는 로우 클래식(Low Classic), 크롭트 니트는 메종 마르탱 마르지엘라(Maison Martin Margiela), 통굽 슬립온은 레이크 넨(Reike Nen), 고아성이 입은 풍성한 흰색 셔츠, 회색 가죽 스커트와 와이트 벨트는 모두 토즈(Tod’s), 크리스털 목걸이는 메종 마르탱 마르지엘라, 투톤 스트랩 펌프스는 레이크 넨.

저는 강하고 단단한 사람이에요. 지치고 버거워질 때마다 저 자신이 잘 버티고 넘긴다는 것도 알아요. 이젠 스물세 살. 성인이 된 지 3년이 됐지만, 아직 어른이라는 생각은 안 해요. 저는 어른들의 세계를 관찰하는 지금의 거리가 좋아요. 그래도 그건 알아요. 약자를 보호해야 진짜 어른이라는 거. 지금 제 흥미를 끄는 건 작가들의 사생활이죠.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죽음을 예감하고 쓴 일기 <이게 다예요>,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소설 <탐닉>이나 <단순한 열정> 같은 책들. 일기 속에서 작가들은 자기 삶을 드라마틱하게 연기하는 배우 같아요.

어떤 아이가 배우가 되느냐고 물으면, 전 이런 대답을 해요. 엄청나게 예민하게 자신의 지질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설국열차>를 할 때는 송강호 아저씨도 현장에서 굉장히 고뇌하고 힘들어하셨어요. 제겐 그게 감동이고 위로더라고요. 아!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송강호 아저씨도 이 일이 힘든 거구나! 되게 힘든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 행복해요.

아직도 전 <우아한 거짓말>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어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랄까요. 우리는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폭탄 돌리듯 하죠. 영화 속에서 천지가 죽고 나자 다들 ‘나는 아니야’라고 떠넘깁니다. 저는 아직도 엔딩을 맞지 못한 느낌이에요. 과연 천지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천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찾아다니다 저는 비로소 꿈을 꿔요. 그리고 천지의 죽음의 순간을 목격해요. 천장에서 늘어진 빨간 목도리를 향해 천지가 의자에 올라가는 장면을. 현장에서 향기가 의자 밑에서 있는 걸 보고 저는 충격을 받았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 다시는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

동생을 잃는다는 게 어떤 감정일지… 향기는, 향기는 그냥 제 친동생 같아요. 처음 그 아이가 교복을 입고 나타났을 때 놀랐어요. 저랑 똑같이 생긴 한 아이가 서 있었어요. 영화사 사무실에서 처음 만난 날, 향기가 제 생일 케이크를 들고 해맑게 웃던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어요. 향기는 영화 속에서 죽은 제 동생이고, 촬영 내내 저는 향기의 웃는 얼굴을 마음에 붙잡고 연기했어요. 고마워요, 착하고 가여운 내 동생.”

단정한 느낌의 7부 소매 흰색 셔츠는 로우 클래식(Low Classic).

향기의 이야기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언제부터 카메라 앞에 섰는지. ‘파리바게뜨’ 촬영할 때 정우성 아저씨가 제 앞에서 웃던 장면, 엄마 가슴에 매달려 있다가 정우성 아저씨에게 갔던 일, 촬영장 구석에서 저 대신 기다리고 있던 많은 아이들. 영화 <마음이>를 할 때 처음으로 대본을 읽고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승호 오빠(유승호) 동생 역이었는데, 나중에 썰매 타다 물에 빠져 죽는 역할이었어요. 스태프 아저씨가 저를 물로 던지면 저는 눈을 뜬 채로 있는 거예요. 여섯 살 즈음으로 기억해요. 초콜릿을 먹으면서 견뎠는데, 물이 무서우면서도 힘들지 않았어요. 계속하고 싶었어요. 엄마가 대본을 이해시켜줄 때마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어떤 아이가 배우가 될 수 있느냐면, 많이 참는 아이요. 그리고 많이 노력하는 아이요. <그림자 살인>이라는 영화를 찍을 때는 와이어에 6시간 매달려서 기다렸어요. 와이어를 단 채로 밥을 먹고, 숨이 막혀서 엄마한테 징징댔던 기억이 나요. <해결사>라는 영화에서 설경구 오빠의 딸로 나왔을 때, 그때 배우가 참 멋있는 거구나 하고 느꼈어요. 그때가 열한 살 쯤. 송윤아 언니하고 <웨딩드레스> 찍고 나서였어요. 고현정 언니랑 <여왕의 교실>을 할 땐 저는 매일매일 웃고 다녔어요. 밝은 역을 할 땐 매일 웃게 돼요. 학교에서도 별명이 ‘해피바이러스’였어요. 아직도 친구들은 저를 특별하다고 생각 안 해요. 보통 아이보다 더 많이 웃는 아이 정도죠.

<우아한 거짓말>은 많이 슬펐어요. 소설을 읽을 때도, 연기를 할 때도, 연기가 끝나고 나서도. 천지는 밝고 평범한 아이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친구들에게 오해와 미움을 받아요. 천지가 남긴 쪽지에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 많아요.”

향기는 영화에서 자살을 선택했다. 사방팔방 하늘과 땅 위에 아무런 희망도 발견하지 못한 소녀의 슬픔을 이기지 못해 향기는 인터뷰 도중에도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소처럼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아역 배우가 가장 위대한 배우라면, 그것은 이토록 놀라운 ‘동심(同心)’의 능력이다. 그것은 연기가 아니라, 지극한 애‘ 통’ 그 자체였다. 무시무시한 죽음의 공허에 몸을 내맡긴,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구와 들어가면 안 된다는 생각 사이에서 홀로 신음했을 열네 살 ‘천지’가 되어 소녀는 남은 사람들에게 마지막 용서의 편지를 썼다. 절대로 누구든 원망해서는 안 된다고.

“저는요, 좋은 배우가 되고 싶은 꿈이 있어요. 열심히 노력해서 그걸 이루고 싶어요. 얼마 전에 <갈매기의 꿈>을 읽었는데, 갈매기 조나단이 남들이 하지 못한 결정을 하고 틀을 벗어나서 새로운 자기 세계를 발견하거든요. 남들이 ‘넌 못할 거야’ ‘넌 안 될 거야’라고 해도 열심히 노력하면 다 잘될 거라고 생각해요. 헤헤.”

투톤 컬러 흰색 셔츠, 회색 모직 베스트와 풍성한 플레어 스커트는 모두 쟈니 헤잇 재즈(Johnny Hates Jazz).

유정의 이야기

“천지는 공부도 잘하고 언니도 있고, 그래서 저는 천지를 질투해요. 천지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도록 벽을 만들죠. 하지만 제가 연기한 화연이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요. 늘 너무 바쁜 부모에게 사랑도 못 받고, 마음을 나눌 형제도 없고,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고 싶었던 거예요. 가해자이면서도 동시에 피해자죠. <우아한 거짓말> 찍으면서 많이 울었어요. 제 옆에서 함께 지내는 친구들 이야기 잖아요. 천지를 생각해도 만지를 생각해도 화연이를 생각해도 가여워서 눈물이 쏟아졌죠. 촬영이 다 끝나고 모두 함께 단체 사진을 찍을 땐 왜 그렇게 가슴이 무너지던지… 저도 왕따를 당한 적이 있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제가 당하면 그걸 회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또 따돌리게 되거든요. 사소한 일들도 크게 과장해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심각하게 만들죠.

그래서 이런 영화가 꼭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영화가 제가 몰랐던 다른 사람의 ‘입장’을 들어보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왜 그랬을까?’ ‘아! 내가 몰랐네.’ ‘그럴 수도 있겠구나!’ 배우는 가장 가깝게 캐릭터의 입장을 이해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엄마는 늘 제게 말씀하셨어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라고. 바르게 인성을 가꿔야 주위 사람들이 떠나지 않는다고. 치열한 아역 배우의 세계에서 엄마는 항상 다른 아이들을 저보다 더 예쁘다고 하고, 먼저 챙기셨어요. 엄마는 아셨던 거예요. 엄마가 그렇게 해야 제가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걸.

저는 제가 조선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그런 생각을 해요. 얼굴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고전적이라 그런가? 배우는 저에게 학생이 학교 다니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촬영장에서 벗어나면 불안하고 허전하죠. 책을 펼쳐서 몰두하는 것처럼, 캐릭터에 빠져들어가는 게 정말 기뻐요. 드라마 <해품달>에서도, <황금무지개>에서도, 영화 <추격자>에서도. 제 연기에 사람들이 공감해주면 정말 행복해요. 며칠 전엔 LA에서 단편영화 촬영을 했고(2차 대전 당시 일본인 생체 실험 부대 이야기를 다룬 <룸 731>의 희생자 역), 내일은 새벽부터 방송 단막극을 촬영하러 가야 하는데, 그런 모든 경험들이 저를 만들어가요.

배우를 하고 싶어서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어느 날 습관처럼 이 일을 하고 있었어요. 주위에 늘 사람들이 많았고, 함께 밥 먹고 함께 떠드는 게 즐거웠어요. 열여섯 살이 경험할 수 없는 멋지고 놀라운 세계에 들어와 있는 거죠. 대중과 저의 성장 과정을 공유해야 한다는 게 이젠 이상하지 않아요. ‘폭풍 성장’이라는 말이 좀 우습긴 하지만. 저에게 이미 폭풍은 지나갔거든요. 제 성격이나 화법이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걸 느끼면 기분이 좋아요. 제가 보는 어른의 세계는 저희들하고 똑같다는 거예요. 갈등에 대처하는 방식이 좀더 세련될 뿐. 어른이 된다는 게 좋은 일처럼 느껴지진 않아요. 지금 이대로 멈추고 싶죠. 갈수록 책임과 숙제만 늘어갈 테니까요.

<우아한 거짓말>과 비슷한 분위기의 책으로 얼마 전에 <유진과 유진>을 읽었어요. 어릴 적 유치원 원장에게 성추행 당한 동명이인 ‘유진과 유진’의 이야기. 전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게 좋고, 그래서 친구들 이야기에 깊이 공감해요. 누가 저를 험담하거나 외면하면 너무 큰 상처가 되죠. 친구에게 받은 상처에 아파하다가도, 자기 속을 보여주는 친구와는 한 몸이 된 것 같고. 엄마는 ‘너는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또래 친구들보다 늦게 가려고 해야 한다’지만, 사실 친구들이 저보다 정보도 눈치도 훨씬 빠르답니다. 아성 언니와 향기와 함께한 시간들이 참 소중해요. 아성 언니는 늘 궁금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고, 향기는 친동생 같았어요. 그 아이는 조용히 장난을 치면서 사람들을 웃게 해요. 제가 지닌 장점은 냉정함이에요. 저는, 저 자신에게 냉정해요.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누구든 배우가 될 수 있지만, 인정받는 건 쉽지 않다고.”

베이지색 시스루 톱, 실크 베스트와 러플 스커트는 모두 진태옥(Jintéok), 하얀 로퍼는 레이크 넨(Reike Nen).

사춘기를 맞는 소녀들은 그 시절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원을 달리는 기차처럼, 소녀들은 자신이 빙점을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간절히 봄을 기다렸건만 정작 자신이 봄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만은 깨닫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빨리 그 질풍노도의 절벽에서 벗어나기만을 간절히 원했다. <우아한 거짓말> 촬영이 끝나고 카메라 불빛이 꺼지면서 그제야 아성이와 유정이와 향기는 그 교실에서의 삶이 자신에겐 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스튜디오에서 아성과 유정과 향기는 스태프들에게 그 자체로 ‘산소 같은 존재’였다. 마약과 파티에 중독된 할리우드 스타들의 개과천선 프로젝트 같은 건 가십 매거진에서나 소용될 말. 교실에서 배우지 못했던 교훈을, 좋은 어른들이 모여 일하는 촬영장과 희로애락이 쌓인 대본에서 배웠다(아성에겐 송강호와 틸다 스윈튼이 스승이었고, 향기에겐 설경구와 고현정이 보통의 어른이었으며, 유정에겐 한가인과 하정우가 언니 오빠였다).

소녀들은 스튜디오 세트와 조명이 바뀔 때마다 잔뜩 긴장해서 어깨를 움츠렸지만, 각자 셔터 소리에 맞춰 동공의 크기를 조절하며 하모니를 이룰 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10년 전 <장화, 홍련>의 주인공으로 <보그> 촬영장에 왔던 임수정과 문근영이 오버랩됐다.

나비들이 날아와 앉을 때, 실타래가 굴러와 감길 때, 아성과 유정과 향기는 각자의 본성으로 반응했다. 아이들은 들판의 꽃이거나 바닷가의 돌멩이거나 골짜기에 내리는 눈송이처럼 보였다. 빨간 실타래를 젖먹이 아이나 된 듯이 조심스럽게 가슴으로 보듬어 안아보던 아이들은 자정 무렵에야 눈발이 날리는 세상 속으로 손을 흔들며 나비처럼 날아가버렸다.

삶은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지속된다. 이제는 그렇게 멀리서 바라보는 소녀 시절이, 마치 서랍에서 우연히 발견한 기다란 목도리처럼, 얼마나 따뜻한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것 같아 어른인 우리는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고아성, 김유정, 김향기가 얼마나 아름다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지를 이렇게 목격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