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려원의 아트 작업실

예술가의 작업실은 작품만큼이나 흥미롭다. 만약 그가 스타라면 더욱 궁금해진다. 국내 최초의 서바이벌 미술 프로그램 <아트스타 코리아>의 MC를 맡은 정려원이 처음으로 자신의 작업실을 공개했다. 이젤 앞에 선 그녀는 화려한 스타가 아닌 ‘요아나’라는 이름의 열정 가득한 예술 학도였다.

정려원의 입술 그림과 짝을 이룬 랩 원피스는 생 로랑(Saint Laurent), 구두는 오프닝 세레모니(Opening Ceremony), 금색 귀고리는 베르수스(Versus by Tom Greyhound Downstairs).

겨울이 시작될 무렵, 평창동 ‘가나아뜰리에’ 한 쪽에 작업실을 마련한 정려원은 요즘 이곳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고 있다. 여러 명의 작가들이 공동으로 사용 중인 이 레몬색 건물은 반 고흐가 고갱을 초대해 함께 그림을 그렸던 남프랑스 아를의 노란 집을 닮았다. 파란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대형 캔버스들이 놓인 계단이 보이고, ‘요아나’라는 이름표가 붙은 작은 방이 나타난다. “커피 드실래요?” 작업실을 둘러보기 위해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려원은 화장기 없이 수수한 모습으로 직접 손님을 맞이했다. 실내 온도를 높이고 커피를 준비하기 위해 잠시 그림 작업을 멈춘 그녀는 화려한 스타가 아니라 ‘요아나’라는 이름의 열정 가득한 예술 학도였다. “가끔 여기서 자고 갈 때도 있어요. 밤 12시면 주차장을 닫거든요. 곧 집보다 더 편해지겠죠.”

작업실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건 <아트스타 코리아>의 녹화 현장을 찾았을 때였다. 3월부터 방송이 시작되는 국내 최초의 미술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정려원은 MC를 맡았다. 무대 위에서 춤추고 노래한 적은 있어도 단독 MC는 처음이다. “솔직히 진행은 정말 자신 없었어요. 미술은 제가 좋아하는 분야니까 용기를 냈죠.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제가 어떻게 미술계 전문가들이나 작가들을 따로 만날 수 있겠어요?” 마침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작업실을 계약한 상태였다. 서울시립미술관의 홍보 대사이기도 했다. 정려원이 프로그램에 합류한 이후의 일이지만, <아트스타 코리아>의 최종 후보로 선정된 3인의 작가가 경쟁전을 벌이는 장소 역시 서울시립미술관이다. 그리고 우승자는 창작 지원금 1억원과 함께 가나아트센터가 운영하는 가나컨템포러리에서 개인전을 갖게 된다. 우연찮게도 모든 게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졌다.“하지만 이 작업실은 방송과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

우리 집 고양이들 때문이죠. 원래는 지하실을 작업실로 썼는데, 고양이 털이 아무래도 문제가 되더라고요. 그때 소속사 대표님이 이곳을 소개해 전세로 들어왔죠.” 정려원은 혹시 자신의 레지던스 입주가 다른 유망한 작가들의 기회를 빼앗는 건 아닌지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몇 번이고 확인했다. 다행히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남는 방이 있어, 드라마 <메디컬 탑팀>이 종영한 바로 다음 날 이곳으로 입주했다. 새로 페인트를 칠하고 선반이며 작업에 필요한 가구들도 손수 제작했다. 못을 박는 건 남자 매니저가 도와줬다. 아직 단장이 덜 끝난 상태이긴 하지만, 간이침대와 천 조각을 이어붙여 직접 리폼한 소파는 물론, 간단하게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는 도구까지 갖춘 상태다. 화구들은 전부터 사용해오던 것들이다. 이 공간에 누군가를 정식으로 초대한 건 <보그>가 처음이다.

회색 니트 더블 수트는 소니아 리키엘(Sonia Rykiel), 리본 장식이 달린 가죽 머리띠는발렌시아가(Balenciaga).

작업실을 채운 페인팅 작품 대다수는 이곳에서 작업한 것들이다. 아직은 미완의 상태다. “처음엔 펜화를 그렸어요.” 려원은 여자 얼굴이 그려진 그림 세 장을 가져와 책상에 펼쳐 보였다. 각각의 그림들은 길고 풍성한 여자의 머리카락을 따라 하나로 이어졌다. “<샐러리맨 초한지>의 백여치, <통증>의 동현, 그리고 <김씨 표류기>의 여자 김씨예요. 하는 김에 <자명고>의 자명도 그려 이어 붙이려고 해요.” 자신이 맡은 캐릭터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 건 <김씨 표류기> 촬영을 끝낸 다음부터였다. 좁고 어두운 방 안이 세계의 전부인 히키코모리를 연기하는 동안 려원은 무려 한 달 반의 시간을 혼자 세트에서 보냈다. “방 안에 있던 소품이며 옷도 전부 제 거였어요. 시간표도 제가 만들었고요.” 촬영이 끝나고 난 후에도 쉽게 여운이 가시질 않았다. 작품에 깊이 빠져들수록 후유증도 컸다. “전력 질주를 하다 갑자기 멈춰 선 느낌이었어요. 누군가 새 운동화와 새 체육복을 주면서 뛰라고 하더니, 갑자기 시간이 다 됐다며 처음에 줬던 걸 모두 빼앗아간 것처럼 말이죠.” 이 스케치들은 그녀에겐 감정을 컨트롤하는 정리운동인 셈이다. 그림 그리는 재미를 알기 전엔 여행이나 쇼핑을 통해 해소하는 게 고작이었다. 려원은 처음에 샀던 스케치북 속의 또 다른 그림을 보여줬다. <어린 왕자> 속 모자를 닮은 뱀은 그녀의 상상 속에서 코끼리 대신 겁에 질린 석정리 마을 아이들과 어린 여교사를 삼켰다. 영화 <적과의 동침> 당시 자신이 맡은 캐릭터의 답답한 상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취미 삼아 그리던 낙서를 페인팅으로 발전시킨 건 1년 전부터다. “우연히 메러디스 파듀(Meredith Pardue)라는 작가의 전시를 봤는데, 정말 예뻤어요. 그리 알려진 작가는 아니었지만, 작가의 그림이 큰 위로가 되었어요. 저 역시 그런 그림을 그려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었고요.” 그녀는 인터넷에서 작가의 이메일 주소를 찾아 메일을 보냈다. 작가 역시 멀리 텍사스에서 그녀를 응원했다. 그때부터 그 그림들을 따라 그리며 페인팅을 시작했다. 꽃잎 같기도 하고 잎사귀처럼 보이기도 하는 자연 연작이 그 습작들이다. 그 외에도 사이 톰블리, 샘 프랜시스와 같은 유명 추상화가들은 물론, 패션 브랜드 앤스로폴로지와의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통해 알게 된 클레어 데자르댕(Claire Desjardins) 등 밝은 에너지로 가득한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특별히 사랑한다. “작가들에 대해선 이제 막 공부를 해나가는 단계예요. 어머니가 미술 선생님이긴 했지만, 따로 그림을 배운 적은 없어요. 이정재 선배나 다른 배우들처럼 전시를 자주 보러 다닌 편도 아니고요. 아직 한참 부족해요.”

촬영에 들어간 <아트스타 코리아>는 그런 면에서 훌륭한 배움터다. ‘서울 국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2011)’ 총감독을 역임한 유진상 교수, <경향아티클> 홍경한 편집장, 서양 미술사 전문가 우정아 교수가 심사위원을 맡은 가운데, ‘광주비엔날레(2011)’를 비롯, 다수의 국제적 전시를 기획해온 김선정 교수와 미술 평론가 반이정이 멘토로 참여했다. 지난해 말부터 합숙을 시작한 15명의 참가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정말 엄청난 영감을 주고 있어요.” 려원은 귤 두 박스를 싸 들고 작가들이 머물고 있는 파주 합숙소까지 찾아갈 만큼 열성을 보이고 있다. 방송과는 별개의 깜짝 방문이었다. “너무 궁금한 거예요. 전 여기서 이렇게 혼자 작업을 하고 있는데, 다른 작가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눈으로 보고 싶었어요. 정말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실험 정신 가득한 이들 젊은 작가들의 작업은 그녀에겐 또 다른 세상이었다. 그 결과물 역시 방송 심의가 걱정될 만큼 파격적이고 기발하다. 촬영 현장에서 몇몇 작업을 눈여겨본 려원은 그렇게 눈으로 배운 것을 다른 방식으로 실험해보고 있다.

물감 팔레트처럼 색채가 들어간 원 숄더 원피스, 니삭스로 이어진 펌프스는 샤넬(Chanel).

“참가자 중에 덕트 테이프로 작품을 만들어 과정의 중요성을 말하는 작가가 있었어요. ‘괜찮다’고만 생각했는데, 반듯한 선을 그리려고 캔버스에 붙였던 마스킹 테이프를 떼어내고 보니 물감이 뭍은 테이프가 꽤 예뻐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저렇게 붙여놨죠.” 려원은 물감이 진열된 선반 아래 대롱대롱 매달린 마스킹 테이프들을 가리켰다. 그 테이프들을 캔버스에 찢어 붙이자 붓질과는 또 다른 질감의 추상화가 탄생했다. 팔레트에 짠 물감처럼 알록달록한 무늬가 새겨진 샤넬 원피스로 갈아입은 려원은 바로 그 작품 앞에 섰다. 아직 작품 이름은 정해지지 않았다. “제목을 고민했더니 ‘소녀시대’ 수영이 그러더군요. ‘층간 소음’ 어떠냐고요. 하하.” 웃음을 터뜨린 려원은 그에 앞서 제작했던 실패작 ‘양념 반, 후라이드 반’도 소개했다. 원래는 작업실 책상 상판으로 쓰려고 만들었던 것이다. “마스킹 테이프를 발견하기 전엔 에폭시 접착제를 써봤어요. 그런데 그건 정말 그냥 본드더군요. 물감과 섞이지도 않아 결국 반반이 되어버렸죠. 떨어지지도 않는 걸 땀을 뻘뻘 흘려가며 일일이 펴고 앉아 있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무식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게 딱 이런 경우죠.”

실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된다. “한번은 형광 오렌지색 메이크업을 하고 촬영장에 간 적이 있어요. 저도 아티스트처럼 한번 꾸며보자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 색상과 검은색 마스카라가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는 거예요. 밤 11시에 녹화가 끝나자마자 작업실로 달려와 두 가지 색을 섞어 그림을 그렸어요.” 이젤에 놓인 그 그림은 제일 최근에 작업한 것이다. 려원은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아이처럼 호기심으로 가득한 상태다. 열정도 넘친다. 촬영이 없을 때마다 찾는 이곳 작업실은 가나아트센터 입주 작가들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간이지만, 려원은 그 점에 대해선 전혀 개의치 않는다. “전 오히려 다른 분들을 좀 만나고 싶어요. 도대체 뭘 하고 계시는 건지, 너무 조용해서 더 궁금해요. 다른 방들은 음악 소리조차 안 들리거든요. 아직까지는 화장실에 물을 버리러 갔다가 마주쳐 눈인사를 한 게 전부예요.”

려원은 어느 때보다 진지하다. 배우로서의 유명세에 기대어 습작에 불과한 작품들을 성급하게 세상에 공개하고 싶진 않다. 예술가라는 멋진 이름으로 화려한 전시회를 여는 스타들도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단은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저만의 스타일을 안착시킨 후에 그다음을 고민하는 게 순서인 것 같아요.” 지금으로서는 그보다 재능 넘치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더 관심을 갖고 있다. 2년 전, SNS에 올린 그림을 모아 <정려원의 스케치북>을 출간한 건 그런 이유였다. “2006년에 6개월간 뉴욕에서 지낸 적이 있어요. 그때도 작품이 끝난 후라 허전했거든요. 그곳 교회에서 정말 많은 예술적 소질과 열정을 지닌 친구들을 만났어요. 젊은 예술가들에 대한 지원이 부족한 현실 때문에 작업을 중단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죠. 그래서 출판 수익금을 전부 그쪽에 전달했어요.” <아트스타 코리아> 역시 그런 경우다. 려원은 미술계의 높은 벽과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소개할 기회조차 갖기 힘든 젊은 작가들에게 방송을 통해 자신의 베스트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는 제작진의 취지에 공감했다.

작업실에서의 사진 촬영에 어색해하던 려원은 맨발이 된 후에야 제 집에 돌아온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아, 이제야 제 홈그라운드 같네요.” 여긴 배우 정려원이 아니라 자유로운 표현주의자 요아나의 공간이다. 작업복 차림이 된 려원은 촬영 중에 즉흥적으로 거울에 그린 물감 낙서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조만간 거울 아트를 한번 실험해봐야겠다며 새로운 의욕을 불태웠다. 멋진 입주 파티도 계획하고 있다. “앞으로 이곳에서 엄청나게 위로가 되고 좋은 기운을 전하는 작품들이 많이 태어났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선 제 안의 위로와 치유가 먼저일 테고요.” 그림을 통해 얻는 창조와 몰입의 즐거움으로 그녀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그녀는 그렇게 성장하는 중이다. 아직은 준비 단계지만 시간이 쌓이다 보면 그녀만의 뭔가가 나타날 것이다. 어설프고 실수투성이면 또 어떤가? 정려원의 밝은 미소를 닮은 작업실은 봄처럼 기분 좋은 에너지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