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트렌드

파리 오뜨 꾸뛰르 리포트 2

2016.03.17

by VOGUE

    파리 오뜨 꾸뛰르 리포트 2

    누가 꾸뛰르를 모함했나? 충격과 쇼맨십은 사라졌어도 장인 정신을 앞세운 파리 오뜨 꾸뛰르의 영토는 건재하다. 예전처럼 고객과 향수 비즈니스 중심으로 다시 나아갔을 뿐. 그건 꾸뛰르의 본분이다.

    Victor & Rolf
    파리 오뜨 꾸뛰르를 처음 본 <보그>의 노련한 스타일리스트는 가장 재미있는 꾸뛰르 쇼가 빅터앤롤프 쇼였다고 했지만, 그들의 쇼는 적어도 장인 정신과 판타지가 가득한 진짜 꾸뛰르는 아니었다. 새 향수 ‘봉봉’ 홍보를 위한 기발한 패션 퍼포먼스에 불과할 뿐! 하지만 그 점 때문에라도 우리는 빅터앤롤프를 사랑해야 한다. 쇼맨십이 사라진 꾸뛰르는 김 빠진 콜라나 마찬가지니까. 쇼는 네덜란드 국립 발레단의 ‘푸엥트(발끝으로 선 발레 자세)’ 시연으로 시작돼 반복되는 복습으로 끝났다. 모델은 당연히 필요 없었다. 다들 부풀린 헤어에다 눈을 가리고 나왔으니 누가 누군지 알 재간이 없었고, 게다가 발끝으로 통통 걸어 다녔으니 나이 어린 발레리나들이 제격이었다. 의상? 연습복처럼 딱 달라붙는 누드 컬러 고무 보디수트에 심플한 연분홍 저지나 고무 투피스, 누드 컬러 원피스가 전부. 그들은 피부인지 천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그 옷에 트롱프뢰유 기법으로 리본, 프릴, 드레이프, 새 등을 그려 넣었고, 때론 진짜 드레이프와 셔링 기법을 옷에 사용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아주 깜찍하고 기발했다. 비용도 확 줄이면서(장소 대여비와 조명, 네덜란드 발레단원들의 항공료와 체류비 정도?), 향수 홍보 효과는 극대화시킨 ‘여우 같은’ 방법. 게다가 트롱프뢰유 기법의 꼭 끼는 보디수트는 한 벌쯤 사고 싶기도 했다. 보는 순간 ‘빅터앤롤프’임을 눈치챌 테니까.

    Armani Prive
    정말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아르마니에 대한 선입관이 있다. 도대체 이 위대한 거장은 자신이 창안한 루스한 팬츠 룩과 몸을 따라 흐르는 우아한 반짝이 드레스, 그리고 청회색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 쇼에는 슈퍼모델 대신 신인 모델들은 세우며, 그들은 키튼힐같이 낮은 구두에다 반드시 쪽머리를 하고 머리엔 똑같은 모자나 스카프를 쓴다는 것, 모델들은 둘씩 짝지어 나온다는 것, 쇼는 가장 많은 컬렉션 피스를 보여주고야 만다는 것…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델들은 머리통에 딱 붙는 삼색 스카프 터번이나 머리카락처럼 보이는 메탈 터번을 쓰고 나왔고, 역시나 짧은 재킷에 헐렁한 팬츠, 긴 재킷에 좁은 랩 스커트나 슬릿 스커트를 입고 나왔으며,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청회색 톤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늘 아르마니 쇼를 볼 때마다 지루한 쇼가 아니라, 노련한 스타일리스트들의 눈에는 무궁무진한 스타일링 재료로 가득한 쇼일 거라고 생각했다. 놀라움과 최신 유행만을 좇는 젊은 패피들의 눈에만 그게 안 보일 뿐.

    팔레 드 도쿄에서 열린 이번 아르마니 프리베 쇼는 아카이브 전시와 함께 선보인 만큼 성대한 규모와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했다. 비록 시그니처 아이템들에서 벗어나진 않았지만, 하나같이 매끈한 스카프를 두르고 달랑거리는 귀고리에 낮은 힐을 신고 풀 스커트나 시스루 팬츠를 펄럭이며 걷는 모습이 도시의 럭셔리한 집시, 말하자면 ‘비잔틴풍의 노마드’로 칭할 만했다. 간혹 룰루 드 팔레즈의 이브 생로랑을 연상시키기도 했는데, 깜깜한 밤하늘 빛깔 미드나잇 블루와 네이비, 다양한 톤의 회색 스펙트럼으로 이어지는 컬러 팔레트는 영락없이 아르마니였다. 쇼의 절정인 피날레 이브닝 룩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레드 카펫 룩으로 딱인, 전체가 크리스털로 촘촘히 장식된 시스루 튜브 롱 드레스(머리엔 반짝이는 크리스털 그물 헤어 스카프를 쓴)가 아닌, 슬림한 브이넥 크리스털 롱 재킷에 역시 슬림한 시스루 팬츠 룩. <보그> 디너 파티 때 입고 싶은, 너무나 아름답고 세련된 아르마니식 팬츠 수트 룩이었다.

    Maison Martin Margiela
    알렉산더 맥퀸의 사라 버튼과 꼼데가르쏭의 레이 카와쿠보가 유일하게 라이벌로 생각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건 십중팔구 MMM 팀이 아닐까? 장인 정신과 슬로 패션에 대한 ‘집요함’, 소재와 부자재의 창조적인 ‘충돌’이야말로 이번 꾸뛰르 쇼의 백미였다. 도대체 누가 핀업 걸 타투(타투이스트 세일러 제리 작품) 크리스털 자수 톱에 스팽글 스트라이프 파자마 팬츠를, 고갱 그림 프린트의 항아리형 태피스트리 코트에 메탈 광택 황금색 라메 소매를, 온갖 잡동사니들과 단추와 비즈를 잔뜩 붙인 리사이클링 조끼(좌석에 쇠붙이 조각을 다닥다닥 붙인 모습)에 인물 만화 일러스트 팬츠를 매치시킬 것이며, 비즈와 염소털로 커다란 눈동자에 과장된 속눈썹을 만들어 소매 장식으로 이용할 것이며,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개인 소장품에서 가져온 귀한 텍스타일로 미니멀한 드레스를 만들 것인가? 게다가 누가 검정 헝겊 스파이더맨 마스크에 유색 비즈들로 아이 메이크업까지 시도할 것인가? 옷들은 하나같이 상상 못할 콜라주 아이디어의 결실이었고, 그래서 딱 23벌만 만들 수 있었다. 어쨌든 그들은 하얀 가운을 입고는 전 세계 곳곳에서 모아온 온갖 재료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아틀리에(프랑켄슈타인 박사 연구실처럼, 실험 도구들로 가득한 곳일지 모르겠다)에서 최소한 한 벌당 20시간 이상을 투자해, 그토록 기이하고 아름다운 창조물을 하나씩 만들어냈다(제발 이 실험 과정을 촬영한 패션 영화가 나왔으면!). 심지어는 오프닝 룩으로 나온 평범한 흰색 반팔 티셔츠조차 낡은 마리아노 포르투니 패브릭을 어렵게 구해 오려 붙였다고 하니 말해 무엇하랴! 비록 마스크가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워 한순간도 눈을 깜박여선 안 되는 옷들의 디테일을 잠깐 놓쳤다 해도, MMM팀이 만든 창조물들은 꾸뛰르의 ‘아름다운 충격’을 완벽히 실현한 걸작들이었다.

    Giambattista Valli
    지암바티스타 발리의 쇼장은 지극히 단조로웠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알루미늄 다육면체 조각 세 점이 바닥에 놓여 있을 뿐, 다른 아무 장식도 없었다. 의상 역시 자신의 장기를 더 강조한 비즈 장식 두체스 새틴 드레스, 아플리케나 자수 장식 실크 드레스, 페플럼이 강조된 아름다운 롱 드레스들이었다.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새로움이 없었고, 그래서 실망했느냐 하면, 정반대다. 짙은 눈썹의 착하게 생긴 디자이너는 자신이 가진 테일러링과 디테일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며 ‘끝내주는’ 완성도의 꾸뛰리에임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무엇보다 여성의 우아한 곡선미를 그리 아름답게 표현해내는 디자이너는 세상에 또 없을 것 같았다. 가까이서 보면 장미 부조처럼 보이는 흰색 자카드 소재 미니 드레스(비즈 장식이나 언밸런스 디자인을 더한), 스커트가 커다란 리본처럼 보인 두체스 새틴 미니 드레스, 비즈 아플리케를 정교하게 장식한 드레스들… 얼핏 라프 시몬스의 첫 디올 쇼를 생각나게 하는 옷들도 있었지만, 발리는 개의치 않았다. 자신감 있게 자신의 장기를 끝까지(35벌 모두) 밀어붙였다. 전반부 새틴과 비즈 자수 장식과 리본 스커트 시리즈를 지나자, 활짝 핀 양귀비꽃처럼 보이는, 앞은 짧고 뒤는 긴 언밸런스 실루엣의 미니 엠브로이더리 레이스 드레스들, 페플럼을 날개처럼 펼친 탱크톱 이브닝 드레스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대개 쇼는 초반엔 경이롭다가도 후반으로 갈수록 지겨워지게 마련인데, 발리 쇼는 달랐다. 초반엔 동일어 반복으로 인해 단조로운 듯하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감탄사가 쏟아졌다. “어떻게 드레스를 이토록 완벽하게 만들 수 있나?” 드레스에 특히 취약한 한국 디자이너가 많기에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가장 압권인 드레스는 앞서 언급한 언밸런스 미니 드레스와 롱 드레스를 겹쳐 입은 듯한, 연핑크색 작은 꽃들을 수놓은 흰색 튜브톱 두체스 새틴 드레스, 배 부분에 커다란 꽃을 프린트한 후 그 부분에 리본처럼 천을 꼬아 양쪽 포켓처럼 이용한 흰색 튜브톱 두체스 새틴 드레스! 꾸뛰르 고객인 전 세계 부잣집 젊은 숙녀들이 웨딩드레스로 군침을 흘릴 만한 드레스였다. 그야말로 꾸뛰리에 발리의 전성기!

    Atelier Versace
    베르사체 쇼를 보면 항상 이런 푸념이 나온다. “세상에! 저건 ‘쭉쭉빵빵’ 미녀들만 입을 수 있는 옷이잖아!” 분명히 심통이다. 그만큼 베르사체 쇼 미녀들은 <화성인의 침공>에 나오는 로봇 같은 인공 미인과 다름없다. 기성복이 그러한데 오뜨 꾸뛰르는 말할 것도 없다. 결점 하나 없는 완벽한 마네킹 보디라인 미녀들만 소화해낼 수 있는, 지아니 시절부터 이어진 슈퍼모델들의 유니폼들! 모델들도 하나같이 도나텔라의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인 캣워크 모델로의 현현이었다. 분명 반 가르마의 플래티넘 골드 스트레이트 헤어와 룩은 도나텔라인데, 그들 사이의 간극은 하늘과 땅만큼 크니, 이것 또한 아이러니. 그런데 피날레에 등장하는 도나텔라는 20cm 킬힐을 신을지언정 쇼피스를 과감하게 입는다는 것. 바로 그 점이 평범한 리얼리티 우먼들을 안심시키는 접점이다.

    자, 이번 쇼를 위해 도나텔라는 어떤 구상을 했을까? 그건 프로그램 노트에 나와 있다. 아제딘 알라이야의 뮤즈 그레이스 존스! 마침 파리 꾸뛰르 기간 동안 아제딘 알라이야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그레이스 존스가 입었던 그 유명한 검정 저지 후드 드레스가 전시됐다. 그런데 베르사체 쇼에서 그것의 도나텔라 버전을 보게 되다니! 게다가 객석엔 검정 마오 수트를 입은 알라이야가 떡 하니 앉아 있었으니, 이건 우연이 아닌 필연. 후드 드레스들은 아제딘 알라이야에 대한 헌사였다.

    물론 그레이스 존스로 시작됐지만, 쇼는 200% 도나텔라 베르사체였다. 컬러풀한 후드 실크 저지 드레스의 그레이스 존스도 있었지만, 크리스털 체인 그물을 뒤집어쓴 잔다르크도 있었고, 우아한 드레이프 드레스의 잉그리드 버그만도 있었으니까. 내 눈길을 끈 건 부쩍 날씬해진 린지가 입은 라인 스톤 장식 후드 미니 드레스! 요즘 대세인 여자 뮤지션들(특히 리한나)이 깜박 넘어갈 옷이었다. 물론 메탈 체인 디테일, 사선 컷아웃, 크리스털 코르셋의 컬러풀한 칵테일 드레스야말로 아틀리에 베르사체의 시그니처 아이템들. 고객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을 것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라면 타투 모티브의 드레스들이 많았다는 것. 도나텔라는 크리스털 타투를 수놓은 튤 소재 톱 아래 풍성한 볼 스커트를 매치함으로써 그토록 집착해온 보디컨셔스 라인에서 잠시 벗어나기도 했다. 피날레는 다시 그레이스 존스로! 흑인 모델 마리아 보르게스가 입은 검정 크롭트 퍼펙토와 후드 달린 비즈 엠브로이더리 드레스는 아제딘 알라이야 전시에서 본 검정 저지 드레스의 완벽한 베르사체 버전이었다.

      에디터
      에디터 / 이명희
      포토그래퍼
      CHA HYE KYUNG
      기타
      James Cochrane, Indigital, Courtesy of Chanel, Arm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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