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 박람회 ‘마드리드 퓨전’의 2014

매년 1월이면 전 세계 스타 셰프들의 대축제가 열린다. 페란 아드리아가 최신 분자요리 기술을 매년 선보이던 곳도 이곳이다. 지구 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미식 박람회 ‘마드리드 퓨전’에선 2014년에도 새롭고 맛있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올해로 12번째 열리는 마드리드 퓨전(Madrid Fusión)은 세계적인 셰프와 신뢰받는 저널리스트, 내로라하는 미식가들이 모여 그해의 트렌드 변화를 예측하는 행사다. 전 세계엔 수많은 식품, 외식 관련 박람회가 열리지만, 하필 미식의 종주국 프랑스도 아닌 스페인의 마드리드 퓨전이 푸드 트렌드에 독보적인 영향력을 끼친다. 전통적으로 유럽 미식업계를 이끄는 나라는 물론 프랑스와 이탈리아였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부터 부각된 스페인 요리계의 새로운 시도는 스페인을 최신 푸드 트렌드의 본산지로 만들었다. 이는 사실 국가 차원의 조직적인 힘이 만들어낸 결과다. 스페인 정부, 셰프, 학계, 업계가 힘을 모아 스페인을 미식의 중심지로 키웠다. 당시 세계적인 트렌드의 핫토픽은 분자요리였고, 이 분자요리의 선봉장인 페란 아드리아(Ferran Adrià)는 거국적인지원을 등에 업은 마드리드 퓨전과의 시너지로 가장 중요한 스타 셰프 반열에 올랐다. 페란 아드리아는 매년 그의 레스토랑 엘 불리(El Bulli)의 최신 분자요리 기술을 마드리드 퓨전에서 선보였고, 최신 요리 트렌드를 이끄는 셰프들이 마드리드 퓨전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페란 아드리아라는 전설을 목격하기 위해 마드리드 퓨전에 몰렸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행사의 진정한 모토인 ‘진정한 나눔과 소통’이라는 점에 매료됐다. 존경받는 셰프들이 자신들의 비법이라고 할 수 있는 기술, 그 주방에 들어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배경지식까지 여과 없이 보여주고, 나눔을 통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마드리드 퓨전을 통해 만든 것이다. 마드리드 퓨전의 나눔 정신은 세계적인 요리업계의 발전이 빠르게 공유되는 결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올해 행사의 대주제는 ‘요리의 영감은 거리에 있다(Inspiration is in the street)’였다. 최근 오뜨 퀴진 지향의 세계적인 셰프들은 그들의 터전에 자신들의 실력을 되돌려주는 일을 시작했다. 도시에도 좋은 식재료를 볼 줄 알고 실력을 갖춘 주목할 만한 셰프들이 많다는 것을 그간 요리업계는 간과하고 있었고, 그들이 요리하는 거리 위의 작지만 큰 레스토랑들이 오히려 오뜨 퀴진의 흐름을 바꾸고 있다.

올해 미슐랭 3스타를 얻은 디베르소(DiverXo)의 다비드 무뇨스(David Muñoz) 셰프는 ‘스트레초(StreetXo)’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이런 흐름을 설명했다. 이제까지 미슐랭 3스타가 없었던 마드리드 요리업계에서 맛의 흐름을 바꾼 차세대 천재 셰프로 불리는 다비드 무뇨스 셰프는 마드리드를 다양한 식문화의 메트로폴리탄으로 만드는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미슐랭 레스토랑을 잘 운영하고 있던 셰프가 갑자기 ‘스트레초’라는 타파스 바를 오픈해 사람들이 편하고 합리적인 가격대로 좋은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이다. 다비드 무뇨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 셰프들의 큰형님 격인 엘 세예 데 칸 로카(El Celler de Can Roca)의 호안 로카(Joan Roca) 셰프도 최근 바르셀로나에 ‘로카 바(Roca Bar)’라는 타파스 바를 오픈했으며, 프랑스에서도 최근 어깨 힘을 확 뺀 ‘네오 비스트로’가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물론 젊은 셰프들이 주축이 됐다. 곧 이런 흐름은 전 세계로 전파돼 실력 있는 셰프들의 제대로 된 음식을 부담 없는 가격으로 편안히 맛볼 수 있는 공간을 늘려갈 것이다.

두 번째 핫토픽은 발효였다. 행사에 참가한 셰프 모두가 발효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서양권에서 발효라는 단어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거의 사용되지 않던 단어였다. 발효로부터 나오는 독특한 맛에 눈을 뜬 셰프들은 이제 치즈, 햄, 와인 같은 전통적인 서양 발효 기법을 넘어, 전 세계 각지의 발효 음식을 이 잡듯 캐내 요리에 활용하고 있다. 지금은 대대적인 사조가 된 발효에 대한 관심의 시작은 북유럽에서 왔다. 스페인의 분자요리가 북유럽의 자연주의 요리에 트렌드를 뺏기면서부터였다. 북유럽은 자연조건에서부터 남부 유럽에 비해 식재료가 발전하지 못했고, 자연스럽게 염장, 초절임, 건조 문화가 발달돼 있었다. 또한 전통적으로 북유럽 식문화의 깊이와 역사는 길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식문화 재탄생은 필수적인 미래였다. 북유럽의 여러 셰프들이 모여 고민하고 이것저것 시도하면서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 발효다. 특히 이미 한국을 방문해 전통 발효 재료를 습득한 셰프 호안 로카는 스페인의 접시 위에 한국적 발효의 뉘앙스를 활용하고 있다.

잠시 얘기를 돌리자면, 마드리드 퓨전에서 만난 셰프 중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 이들은 어느새 자신의 요리에 한국을 슬쩍 올리고 있었다. 다비드 무뇨스 셰프는 한국식 쌈과 김치를 사용한 요리를 선보였고, 자신의 이름을 딴 레스토랑을 운영 중인 셰프 키케 다코스타(Quique Dacosta)는 고추장을 이용한 생선 요리를 선보였다. 세계에서 가장 주목 받는 세 명의 3스타 셰프가 행사 첫날 한국식 문화와 재료에 관해 얘기했다는 것은 그저 우연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현상이다. 미풍처럼 날아간 한국 요리 바람은 이제 서서히 세계적인 셰프들의 주방에 정착하고 있다. 아직까지 마드리드 퓨전에서 그 어떤 나라도 발효를 자국의 대표적 식문화 키워드로 마케팅한 적이 없다. 한국 역시 마드리드 퓨전 주빈국으로 참가했을 때 전통 재료를 소개하긴 했지만, 발효보다는 좀더 광범위한 컨셉에 치중했다. 이건 어쩌면 그토록 애써온 한식 세계화를 성공시킬 안성맞춤의 실마리 아닐까?

또 하나 흥미로운 트렌드로 소개된 것은 로컬 푸드 운동의 21세기 버전이다. 셰프와 농부의 협업. 단순히 지역 재료를 사용하는 것에서 발전된 개념이다. 호안 로카와 파리 아스트랑스(Astrance)의 파스칼 바흐보(Pascal Barbot), 빌바오 아수르멘디(Azurmendi)의 에네코 아차(Eneko Atxa) 같은 셰프들이 이를 제안했다. 재료에 대해 가장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은 그것을 경작한 농부이고, 셰프는 농부들을 통해 재료에 가장 잘 맞는 요리법을 배울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농부가 단순히 식재료를 공급해주는 역할이 아니라, 셰프들의 요리 선생님이 되는 것이다. 실제 농부와 함께 협업 중인 셰프의 요리 시연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동행한 셰프 중 프렌치 레스토랑 줄라이의 오너 셰프인 오세득은 좋은 식재료에 대한 애착으로 제주도에 직접 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농장주 겸 셰프다. 마드리드 퓨전의 어떤 프로그램보다 로컬 푸드에서 깊은 영감을 얻었다는 그는 “가까이 있었지만 생각해보지 못한 포인트예요. 한국에 돌아가 한국 셰프들과 농부들이 함께 고민하고 현실화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도 좋을 것 같군요” 하고 말했다.

아직 한국에서는 페루 음식이라고 하면 세비체 정도가 미약하게 알려져 있을 뿐이지만, 전 세계 푸드 트렌드를 읽고 있는 셰프와 저널리스트에게 “요새 가장 핫한 음식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지면, 단연 “페루”라는 답이 돌아온다. 20여 년 전, 경제 원조를 받는 후진국을 이제 막 벗어난 페루가 미래의 생존 전략으로 선택한 것은 음식이었다. 페루 정부는 청소년들에게 요리를 가르쳤고, 전 세계적인 미식 구루들을 초청해 더 넓은 견문의 요리를 맛보여줬다. 그 오래고 긴 과정을 거친 결과가 이번 마드리드 퓨전에서 탄탄한 결실을 맺은 것이다. 페루의 음식 세계화는 북유럽 자연주의 퀴진 트렌드가 수명을 다한 시기와 맞물려 가시화된 결과를 내놓기 시작했다.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는 셰프들과 미식가들은 미식의 신대륙을 찾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고, 그 노력에 마침 페루 정부의 세계화 사업이 응답한 것이다. 몇 년 전부터 거세게 성장 중인 페루의 음식 세계화 사업은 올해 마드리드 퓨전에서 특히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페루의 수도 리마에 있는 레스토랑 ‘아스트리드 이 가스톤(Astrid&Gastón)’의 가스톤 아쿠리오(Gastón Acurio) 셰프가 연단에 올라 페루 음식의 세계화 과정을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동안 한식 세계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우리가 간과했던 것은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는 점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물이 무엇이고,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스페인과 페루가 지금과 같이 푸드 트렌드의 핫토픽이 된 데는 그런 치열한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샘표식품 소속 셰프로 한식 세계화 사업의 일환인 ‘장 프로젝트’를 이끄는 매니저로서, 나 자신에게 큰 교훈을 준 자리였다.

한편 마드리드 퓨전의 전설, 페란 아드리아는 올해 행사에 참석하는 대신 빅 이슈를 배달시켰다. 좀더 본격적인 요리 연구를 위해 엘 불리 파운데이션을 설립하면서 폐업 같은 휴업을 선언한 레스토랑 엘 불리의 헤드 셰프이자 엘 불리 파운데이션의 일원인 에두아르드 사트루(Eduard Xatruch)와 오리올 카스트로(Oriol Castro) 셰프를 통해 ‘불리피디아(Bullipedia)’를 발표한 것. 앞으로 몇 년이 걸릴지 모를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요리에 관한 ‘모든’ 지식을 집대성한 전자백과사전 제작을 목표로 한다. 물론 그 모든 과정은 미래 요리의 유전자를 바꿀 만한 발걸음이 될 것이다. 올해 마드리드 퓨전이 들려준 가장 군침 도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