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디자이너의 새로운 영감, 가구

패션 최전선에 있는 디자이너들은 대체 어디서 영감을 얻을까? 엄청난 가격의 에드 루샤 작품? 인도 갠지스 강변의 석양? 예술과 여행은 뻔하다. 가구가 세련된 영감의 원천으로 자리 잡고 있다.



“스타일을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채널을 통해 하나의 미학을 완성해내는 완벽한 능력을 가진 사람의 집이었다.” 지난해 9월호 미국 <보그>를 위해 LA에 있는 에디 슬리먼의 집을 방문한 기자 네이던 헬러는 슬리먼의 보금자리를 이렇게 표현했다. 건축가 렉스 로터리(Rex Lotery)가 61년 설계한 저택은 모피 침대보부터 마크 헤이건, 라시드 존슨 등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까지, 슬리먼의 취향이 고스란히 전시된 ‘슬리먼 갤러리’ 그 자체. 이 갤러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그가 개인적으로 수집한 유로 모더니스트들의 가구들이다. 쥘 르루(Jules Leleu)의 암체어, 마르셀 브루어(Marcel Breuer)의 의자는 그가 뉴욕 소호에 오픈한 생로랑 매장에 가져다놓을 정도로 아끼는 가구다. 2007년 레이 카와쿠보를 위해 가느다란 막대로 완성한 가구를 디자인했던 슬리먼은 패션뿐 아니라 가구를 통해 자신의 취향을 뽐내는 중이다.

패션계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속설이 있다. 모든 패션을 섭렵한 멋쟁이들은 최종적으로 가구와 인테리어에 빠지게 된다는 것. 세상에 존재하는 패션을 죄다 즐겨봤던 이들은 결국 자신이 머무는 공간을 꾸미는 데 공을 들인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패션을 업으로 삼는 디자이너들은 진작부터 가구에 심취해 있다. 예술처럼 거금이 들진 않지만, 고상한 취향을 은근히 자랑하기에 가구만 한 것도 없으니까. 지난해 가을, 패션 브랜드와 패션지들이 온통 디자이너 의자로 광고와 화보들을 도배한 것도 이런 트렌드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디자이너들에게 가구는 영감의 원천이 된다.

“집 안의 따뜻한 분위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70년대가 배경인 봄 컬렉션을 위해 프로엔자 스쿨러 듀오는 인테리어와 가구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조 콜롬보(Joe Colombo)와 폴 루돌프(Paul Rudolph) 등의 가구에서 볼 수 있는 유리와 크롬, 화이트 래커 등의 소재는 반짝이 플리츠 드레스와 미니멀한 라인으로 재해석되었다. 조 콜롬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땐 마르니의 콘수엘로 카스틸리오니도 귀가 번쩍 뜨였을 법하다. 마르니를 위해 색색의 스트링 체어들을 선보였던 카스틸리오니의 집은 조 콜롬보의 세련된 의자들로 가득하니까.

이쯤에서 알 수 있는 건 디자이너들이 유난히 좋아하는 가구는 ‘미드 센추리(Mid Century)’ 디자인이라는 점이다.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 베르너 팬톤, 알바 알토 같은 숭고한 이름도 포함된다. 파리 시내와 교외에 있는 니콜라스 게스키에르 집에서 눈에 자주 띄는 것은 가에 아울렌티(Gae Aulenti)의 가구. 파리의 기차역을 오르세 미술관으로 변신시킨 이태리 건축가가 디자인한 미래적인 조명이나 대리석 테이블도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또 한 명의 이태리 디자이너 에토레 소트사스(Ettore Sottsass)의 소품도 게스키에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그들의 미래적인 디자인에서 게스키에르가 디자인한 발렌시아가 의상과 향수 패키지를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아울렌티와 소트사스를 비롯한 유로 모더니스트들은 슬리먼과 게스키에르는 물론, 여러 디자이너들을 팬으로 거느리고 있다. 제냐를 위해 베를린으로 떠나기 전, 스테파노 필라티는 파리의 집을 재단장하면서 지오 폰티(Gio Ponti)의 가구들을 밀라노에서 잔뜩 사들였다. 가구 디자인을 전공하고 산업 디자이너로 일한 경력을 지닌 디올의 라프 시몬스가 앤트워프 집을 위해 구입한 소파들은 대부분 피에르 장느레(Pierre Jeanneret)의 작품. “50년대와 60년대를 좋아한다. 그 시절 사람들은 달에 가기도 하고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했다. 미래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시몬스는 조지 나카시마(George Nakashima)의 테이블이나 로제 카프롱(Roger Capron)의 벤치에 앉아 디올의 20세기 유산을 어떻게 21세기적으로 선보일지 고민에 빠질 것이다.

때로 패션 디자이너는 자신이 좋아하던 가구 디자이너의 작품을 새롭게 해석하기도 한다. 지난해 <보그 코리아>가 스톡홀름에서 만났던 아크네 스튜디오의 조니 요한슨은 스웨덴 가구 디자인에 대해 대단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덴마크 가구 디자이너들이 더 유명한 건 맞다. 하지만 진짜 가구는 스웨덴 가구다.” 스톡홀름 교외에 자리한 그의 집에는 게리트 리트벨트(Gerrit Rietveld)의 조형적 가구들로 가득했지만, 그가 가장 존경하는 가구 디자이너는 카를 말름스텐(Carl Malmsten)이다. “말름스텐은 가장 인상적인 스웨덴 가구 디자이너다. 어릴 때 할머니 집에 있던 그의 가구와 함께 자랐기에 내겐 더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말름스텐이 디자인한 ‘베를린 소파’를 마우스 커서로 쭉 늘여놓은 듯한 소파로 재해석했고, 이 소파는 현재 스톡홀름 아크네 스튜디오 본사와 전세계 매장에 놓였다.

“다른 사람들이 창조한 피조물 속에 머물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유난히 가구와 세라믹 제품 수집을 즐기는 라프 시몬스의 말이다(얼마 전 그는 자신의 모든 도자기 컬렉션을 경매에 내놓기도 했다). 50년대 이태리에서 활동한 가구 디자이너의 램프를 구입하거나 냉전시대 베를린 대사관을 위해 만든 네덜란드 디자이너의 의자를 손에 넣는 일. 지금 패션 디자이너들 사이에 가구 수집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최신 패션 아이템으로 차려입는 것보다 더 세련된 제스처로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