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 김태환의 컬렉션 다이어리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 우월한 청년이 등장하자 “태생부터 다른 분위기”라는 자막이 떴다.
남다른 매력으로 밀라노와 파리 디자이너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모델 김태환.
그가 직접 들려주는 20일간의 2014 F/W 남성복 패션 위크 비하인드 스토리.



January 01
PM 12:30 Incheon Airport
2014년 새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 해서 떡국을 챙겨 먹을 겨를도 없이 스물세 살의 첫날이 시작됐다. 해외 남성복 컬렉션에 참가하는 건 이번이 두 번째. 첫 시즌이었던 지난봄 컬렉션보단 덜하겠지만 여전히 긴장되는 건 마찬가지다. 공식 컬렉션 일정은 열흘 후 밀라노에서 시작되지만 몇몇 캐스팅 때문에 먼저 파리로!

January 05
PM 07:30 Charles De Gaulle Airport
3일간의 파리 일정을 마치고 밀라노로 출발하는 날. 사실 정오에 오를리 공항에서 출발하는 비행기였는데, 아침을 챙겨 먹고 나오다 너무 여유를 부린 것 같다. 공항에 도착하니 이미 수하물 게이트가 닫힌 상태! 이날 오를리에서 밀라노로 떠나는 항공편이 더 없어 결국 샤를 드골 공항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재미있는 건, 막상 샤를 드골 공항에 가보니 나처럼 비행기를 놓쳐서 온 남자 모델이 열 명쯤 눈에 띄었다는 것! 모델처럼 보이는 남자가 있으면 서로서로 ‘너도 비행기 놓쳤냐?’고 물으며 왠지 모를 동지애를 느꼈던 시간.

January 06
AM 10:00 Castings
패션 위크 일정이 힘든 이유? 패션쇼 그 자체보다 쇼에 서기 위해 수많은 캐스팅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에이전시에서 이메일로 보내는 ‘오늘의 캐스팅 스케줄’을 확인한 뒤 그것에 따라 움직였다. 하루에 많게는 7~8곳씩! 남자 모델들의 캐스팅 현장은 거의 전쟁터다. 보통 미리 가서 줄을 서는데 질서 정연하게 한 줄로 서 있는 모습을 거의 못 봤다. 꼬르넬리아니 캐스팅 때는 모델 유혁재, 나대혁과 함께 30분 일찍 도착했는데 20~30명 정도의 모델들이 이미 모여 있는 게 아닌가! 줄이 애매해서 얼굴을 아는 다른 모델들과 인사하는 중에 앞쪽으로 떠밀려갔다. 캐스팅 시간이 되어 문이 열리자 뒤에 있던 모델들이 물밀듯 밀어닥쳐 결국 얼떨결에 맨 앞쪽까지! 덕분에 캐스팅을 일찍 끝내고 나와 형들이 나오길 기다렸다. 이런 분위기는 인기 브랜드일수록 심하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캐스팅 때는 꽤 일찍 도착했는데도 이미 수백 명이 모여 대관절 줄의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1시간 후, 닐 바렛에 피팅하러 가야 해서 끝내 캐스팅을 포기할 수밖에. 바쁜 스케줄 틈에도 쇼핑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이번 시즌 최고의 ‘득템’은? 라프 시몬스의 봄버 재킷! 캐스팅 다닐 때는 체형의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가리려고 노력한다. 물론 많은 옷을 재빨리 갈아입어야 하는 패션 위크 시즌에 중요한 건 역시 입고 벗기 편한 옷!



MILAN MEN’S 2014 F/W FASHION WEEK

January 11
PM 05:00 Les Hommes
이번 시즌 첫 쇼는 레 옴므, 게다가 오프닝 모델! 피팅하러 갔을 때 오프닝 모델이라는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뻤다. 원래 오후 4시에 질 샌더 쇼가 있는데, 에이전시 실수로 캐스팅에 참여하지 못해 말도 못하게 서운했다. 만약 질 샌더 쇼를 했다면, 시간 관계상 레 옴므 오프닝을 하지 못했을 테니 그야말로 새옹지마. 외국인들이 내 이름의 ‘Hwan’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이곳에서는 ‘Tae’로 불렸는데, “1 Tae”라고 적힌 모델 리스트를 보니 뿌듯했다. 앤트워프 출신의 듀오 디자이너는 무대에 나가기 직전까지 세심하게 옷을 챙겼다. 클래식한 두 벌의 룩을 입은 후 쇼가 끝났다. 백스테이지에서 잠깐 옷을 갈아입는 사이, 약 5초 만에 스마트폰이 사라지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레 옴므 한국인 스태프의 도움으로 찾을 수 있었다. <보그> 지면을 빌려 그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PM 07:00 Neil Barrett
레 옴므 쇼가 끝나자마자 닐 바렛 쇼장으로 이동! 양쪽 모두 헤어, 메이크업이 과하지 않아 다행이다. 지난 시즌 런웨이에 서고 이번 시즌에는 전체적인 컬렉션 룩을 맞추는 피팅 모델까지 하게 되어 디자이너는 물론 스태프들과 꽤 친해졌다. 쇼 전까지 아틀리에를 자주 들렀는데, 그때마다 디자이너가 내 옷차림에 관심을 보이며 사진을 찍어두고 똑같이 사야겠다고 귀띔했다. 서울에서 옷장을 들고 온 것 아니냐고 농담도 했지만, 사실 내가 끌고 온 캐리어는 딱 하나뿐이다. 디자이너는 몇 가지 룩을 보여주며 쇼에서 입고 싶은 것을 직접 골라보라고 했다. 그중에 이번 시즌 메인 룩이라 생각되는 번개 무늬 스웨트 셔츠를 골랐다. 며칠 후 디스퀘어드2 쇼 프런트 로에 닐 바렛이 바로 그 스웨트 셔츠를 입고 앉아 있는 걸 봤으니, 제대로 된 선택이었다.



January 12
AM 11:30 John Richmond
지난 시즌, 파리에서 캐스팅 다니다 우연히 예쁜 신발이 눈에 띄어 브랜드를 확인해보니 존 리치몬드였다. 이번 시즌 ‘오늘의 캐스팅 스케줄’에서 그 이름을 발견하니 꽤 반가웠다. 캐스팅이 1분 만에 끝나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피팅에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피팅 역시 5분 만에 끝! 결국 쇼에 섰으니, 빨리빨리 진행하는 스타일인 것 같다. 쇼 당일 백스테이지에서 보니 온몸에 타투를 하거나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강한 캐릭터들로 가득했다. 내가 유일한 아시안 모델이라 다른 모델들만큼 독특한 스타일로 변신시킬지 살짝 걱정됐다. 하지만 옷과 헤어는 맘에 들었다.

PM 03:00 Vivienne Westwood
진짜 변신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쇼에서 엄청난 헤어&메이크업이 기본이라는 건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정말이지 상상 초월! 레고처럼 머리 라인을 똑같이 그렸는데, 외모와 상관없이 모두 못생겨 보이는 헤어 스타일 같았다. 아시안 모델들은 원래 흑발이기에 새까만 염색이 필요 없을 거라 기대했으나, 전체적으로 같은 톤으로 맞추기 위해 예외는 없었다. 이번 쇼에는 한국인 모델이 무려 여섯 명! 덕분에 백스테이지에선 무척 재미있었다. 서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당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Fashoin TV’ 채널에서 취재 나와 인터뷰까지 했는데, 복잡한 데다 영어로 이야기하려니 대체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쇼가 끝난 후 모델들이 다 같이 머리를 감을 땐 인근에 검정 홍수라도 난 듯한 분위기!



January 13
AM 09:30 Andrea Pompilio
아침 첫 쇼에 서기 위해선 꼭두새벽에 일어나야 한다. 한국은 대개 4시간 전부터 모이지만, 밀라노는 3시간 전에 모여 그나마 다행. 지난시즌, 안드레아 폼필리오 정규 컬렉션과 오니츠카 타이거와의 콜라보레이션 컬렉션까지 모두 섰기에, 이번 시즌에도 어느 정도 기대한 게 사실이다. 캐스팅 가면 보통 다섯 명씩 한 팀이 되어 디자이너를 만나러 들어가는데, 우리 팀이 들어가자마자 디자이너가 ‘Tae’를 제외한나머지 4명은 그만 나가봐도 된다고 말해 ‘엄청’ 고마웠다. 그는 아주 친절한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이번에 내가 입은 옷은 베이식한 셔츠에 컬러풀한 디테일을 더한 것. 길쭉한 클러치는 남자가 들기엔 조금 생소했지만.

PM 05:00 Antonio Marras
잠시 쉰 뒤 다음 쇼장으로 다시 출발. 솔직히 안토니오 마라스에 대해선 잘 몰랐다. 스케줄이 너무 빡빡하고 피곤해 캐스팅 당일에 가지 않았는데 피팅 연락이 와서 좀 놀랐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긴 하다. 모델이 먼저 캐스팅을 위해 찾아가고 몇 번씩 피팅에 불려갔다가 결국 쇼에 못 서는 상황도 있지만, 반대로 브랜드에서 먼저 모델을 찾을 때도 있다. 캐스팅은 물론 피팅에도 가지 않았는데 쇼 모델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황당한 경우까지! 안토니오 마라스 쇼장은 규모가 굉장했다. 한쪽에서는 여러 연령층이 옷을 만드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장인 정신을 표현했다. 특히 마지막에 디자이너와 모델들이 다 함께 선보인 피날레 워킹은 멋졌다. 아침 일찍 일어난 탓에 헤어&메이크업을 받다가 살짝 잠들 뻔했지만. 이렇듯 걷고 뛰고 먹고 자다 보니, 어느덧 밀라노 일정 후반부다.



January 14
AM 09:30 DSquared2
열흘 이상 지속된 스케줄로 녹초가 될 무렵, 디스퀘어드2에서 연락이 왔다. 그 전화를 받는 순간, 모든 피로가 거짓말처럼 싹 사라졌다. 피팅 가는 길에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는데, 우산도 없고 일방통행 길이라 택시를 탈 수도 없어 그저 비를 맞으며 걷고 또 걸었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디스퀘어드2 최초의 아시아 모델이라는 타이틀 때문! 사실 요즘 백스테이지에서 아시안 모델들끼리 만났을 때 최고의 이슈는 동양 모델들에게 아직 점령되지 않은 브랜드가 뭐냐는 거다. 미지의 땅을 개척해나가는 듯 하니까. 이제 메이저 브랜드 중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더 치열한 게 사실이다. 그래서 디스퀘어드2 쇼에 선 것이야말로 이번 시즌 최고의 성과다. 과한 광택과 볼 터치로 다소 ‘느끼한’ 남자가 돼버린 건 살짝 아쉬웠지만, 그렇게 큰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경험이었다. 추적추적 비가 오던 새벽에 짐을 모두 싸 들고 쇼장으로 온 상태였다. 그래서 쇼가 끝난 뒤 가뿐하게 곧장 파리로 출발!



PARIS MEN’S 2014 F/W FASHION WEEK

January 15
PM 02:30 Carven
파리에 도착해 짐을 풀고 새벽 2시 30분에 발렌티노 피팅을 했다. 이왕이면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랐지만 아쉽게도 쇼에는 서지 못했다. 대신 파리 첫 쇼는 까르벤! 밀라노와 달리 사진가와 함께 백스테이지에 들어가는 것에 무척 민감해 촬영을 할 수 없었다. 오래된 당구장 같은 분위기의 쇼장에서 내가 입은 옷은 화이트 셔츠와 블랙 팬츠!

January 16
PM 07:00 Dries Van Noten
화창한 파리! 쇼장 가는 길, 건물이 죄다 멋있어서 예쁜 하늘과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잔뜩 찍었다. 드리스 반 노튼은 지난 시즌에 선 무대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들었던 쇼다. 이번에는 화사한 컬러가 눈에 띄었는데, 모피까지 곁들여져 두 배는 화려해 보였다. 파랑, 분홍, 노랑, 초록 네 개 컬러 그룹으로 나눠 피날레 워킹! 그 가운데 파랑 그룹의 맨 앞줄 가운데 자리를 배정받아 모든 사진에 ‘파랑 크루’를 이끄는 리더처럼 나왔다. 야호!

January 17
PM 07:00 John Galliano
이번에도 역시 백스테이지엔 사진가 출입 금지. 백스테이지 풍경을 대신 찍기 위해 카메라를 받아두긴 했지만, 쇼 시작 시각이 다가올수록 너무 정신없어서 몇 장 못 찍었다. 매번 쇼에 설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백스테이지는 긴장감과 혼란의 소용돌이다. 이번에 피팅하면서 존 갈리아노 디자인 팀의 스태프가 내 손가락에 옷핀을 깊이 찌르고 말았다. 크게 다치진 않아 다행이었다. 이번 쇼에서도 나는 유일한 아시안 모델이었다. 평소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영어는 하기에 혼자 있어도 별문제는 없다.



January 18
AM 10:00 Kenzo Homme
겐조는 시간이 없어 캐스팅에 가지 못했는데, 꼭 쇼에 서고 싶어 에이전시를 통해 따로 연락했다. 따로 캐스팅과 피팅을 거쳐 결국 무대에 설 수 있었다. 이번엔 한국 모델 네 명이 함께 했는데, 다들 헤어 스타일이 맘에 들지 않아 계속 한국말로 수다를 떨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도 그렇고, 왜 여러 명의 한국 모델들이 캐스팅된 브랜드들은 헤어 스타일을 ‘쎄게’ 하는 걸까? 겐조 쇼의 특징은 워킹 동선이 무척 복잡하고 피날레에서 오랫동안 가만히 서 있어야 한다는 것. 이번에도 똑같았다. 마네킹처럼 꼼짝 않고 서 있다 보니 어느덧 겐조 쇼도 끝!

PM 04:00 Wooyoungmi
지난 시즌엔 3.1 필립 림과 시간이 겹쳐 우영미 쇼에 서지 못했다. 한국 모델로서 파리에서 한국 디자이너의 무대에 서는 건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번에는 꼭 서고 싶었지만, 미하라야스히로에서 당일 다른 쇼에 서지 못하도록 에이전시와 미리 이야기를 해둔 게 아닌가. 우영미 쇼에 또 못 서는 상황. 하지만 우영미 디자인 팀에서 에이전시에 연락해서 “우영미 디자인 팀에 김태환의 어머니가 일하고 있다. 아들이 우영미 쇼에 서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 한다”고 슬쩍 ‘트릭’을 써준 덕분에 이번에는 우영미 쇼를 무사히 마치고 미하라야스히로 쇼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PM 06:30 Mihara Yasuhiro
바로 그 미하라야스히로 쇼가 2014 F/W 시즌의 마지막 스케줄. 쇼 시간에 임박해 도착했지만 다행히 큰 문제 없이 시작했다. 한 쇼에서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의상 두 벌을 입는 경우가 드문데, 이번 쇼에서는 무려 세 벌! 패션 위크 마지막 날, 가장 많은 쇼에 서고 또 가장 많은 옷도 입었으니 이만하면 꽤 괜찮은 마무리다.

January 20 PM 07:00
Charles De Gaulle Airport
모든 일정을 마친 뒤, 딱 하루 자유 시간이 생겼지만 하필 일요일이라 모든 매장이 문을 닫은 게 아닌가. 결국 호텔에서 쉬는 수밖에. 20일 만에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시원섭섭한 기분. 지난 시즌에는 7kg이 빠질 정도로 심리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힘들었다. 이번 시즌은 한결 나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다음 시즌에는 더 나아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