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리, 박승희, 김아랑, 공상정, 심석희! <보그>의 모델이 된 쇼트트랙 대표팀 다섯 소녀들

대한민국을 벅찬 감동과 희열 속에 빠뜨렸던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 여자 쇼트트랙 3,000m 결승 경기의 다섯 소녀들.
여전히 바쁜 그녀들이 태릉선수촌을 잠시 빠져나와 패션의 나라 <보그> 스튜디오를 찾아왔다.

김아랑의 검정 네크라인이 포인트인 오버사이즈 실크 재킷은 문영희(Moonyounghee), 스커트 같은 풍성한 와이드 팬츠는 로우 클래식(Low Classic), 워커 부츠는 슈콤마보니(Suecomma Bonnie), 오른손 뱅글은 구찌(Gucci), 왼손 뱅글은 CK 주얼리(CK Jewelry), 벨트는 자렛(Jarret). 남자 모델의 터틀넥 니트는 질 샌더(Jil Sander), 메시 소재 셔츠는 앤디앤뎁(Andy&Debb), 실크 팬츠는 장광효 카루소(Chang Kwang Hyo Caruso). 박승희의 튤 소재가 어울린 퍼프소매 롱 드레스는 앤디앤뎁, 투명 뱅글은 미네타니(Minetani). 조해리의 아이보리색 저지 셔츠는 앤디앤뎁, 아이보리색 니렝스 저지 스커트는 진태옥(Jintéok).(왼쪽) 공상정의 허리 라인이 컷아웃된 슬리브리스 코튼 드레스는 소울팟스튜디오(Soulpot Studio), 골드 뱅글은 토즈(Tod’s), 진주 장식 초커는 샤넬(Chanel). 남자 모델의 블랙 셔츠와 화이트 반바지는 씨와이 초이(Cy Choi), 흰색 라운드넥 셔츠는 준지(Juun.J), 하이톱 스니커즈는 샤넬(오른쪽).

심석희의 케이프 디테일 실크 원피스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레이스업 워커 부츠는 슈콤마보니(Suecomma Bonnie), 오른손 뱅글은 미네타니(Minetani), 왼손 뱅글은 샤넬(Chanel).

여기 혹시 샤넬도 있나요?” 소녀 중 하나가 잔뜩 걸린 촬영용 의상 더미를 헤집으며 말했다. “여기는 샤넬 쇼룸이 아니에요. 하지만 <보그>라서 샤넬도 잔뜩 걸려 있죠.” 오늘의 스타일링을 맡은 <보그> 패션 기자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다음 호에 실릴 한 컷을 위해 수십 벌 의상을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 거기엔 샤넬뿐 아니라 피비 파일로의 셀린이나 발렌시아가 같은 옷들도 빽빽하게 걸려 있었지만, ‘에이빙크’라 불리는 소녀들이 아는 한에서 로망은 어디까지나 샤넬이었다.

소녀들은 2014 소치 동계 올림픽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전국체전에 출전하고, 곧 있을 2014 ISU 쇼트트랙 세계선수권대회 참가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캐나다 몬트리올로 향하는 출국을 하루 앞두고 쇼트트랙 여자 3,000m 계주 팀이 <보그>스튜디오로 팔랑팔랑 날아왔다. 그날도 새벽 훈련을 마치고 외출해 패션의 최전선에 날아든 이 체육인들은 모든 것을 신기해했고, 모든 것에 까르르 웃었다. 조해리(28), 박승희(22), 김아랑(19), 공상정(18), 심석희(17)는 마치 소혹성 B612에서 지구를 방문한 어린 왕자가 그랬던 것처럼 패션의 나라를 재밌고 신기하게 생각했다.

촬영은 아침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아침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태릉에서도 하필 가장 부지런한 체육인들이었다. “쇼트트랙의 훈련 강도는 태릉에서도 무시무시한 축에 들어요. 4시 40분에 일어나 새벽 훈련을 시작하죠.” 맏언니 조해리가 한숨을 쉬며 얘기했다. 피겨스케이팅 국가 대표 김연아가 훈련 독종으로 이름나 ‘태릉 빙상장의 마지막 불은 김연아가 끄고 나온다’는 이야기야 워낙 유명하지만, 빙상장의 첫 불을 켜는 것은 다름 아닌 쇼트트랙 선수들이다. “너무너무 힘들어요. 훈련 과정이 정말 고돼요. 더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지곤 해요.” 아닌 게 아니라 28세라는 나이를 앞에 두고 장래를 걱정하는, 언론과 팬들이 걱정하는 것보다 더 걱정하는 그녀는 기로에 서 있다.

“애들이 아직 어리지만 속은 다 골병이 들었어요. 그러니 저는 환갑이나 다름없는 몸 상태죠. 운동선수들은 추후 몇 년간의 젊음과 건강을 가불받아 살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빨리 늙죠. 쇼트트랙의 경우 10대 후반에 최고의 기량이 나온다고들 하는데, 그 시기를 훌쩍 지나친 저는 앞날을 결정할 때예요.” 눈앞에 있는 2014 ISU 쇼트트랙 세계선수권대회라는 허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번뇌를 유보시키고 있었다. 마지막을 견뎌 넘고 자신을 이겨내려는 안간힘. 그것은 소혹성 B612, 혹은 태릉선수촌이라는 별세계의 낯선 풍습일까, 우리에게도 다 있는 평범한 숭고함일까?

한국에서 체육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일상적인 계단을 하나도 밟지 않고 살아감을 의미한다. 성장기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10대 후반이나 20대 초·중반까지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고 차차 은퇴의 길로 접어드는 그들의 삶 앞에는 우리보다 적은 선택지가 남는다. 모든 것을 쏟아붓던 것을 그만두기란, 한 사람의 인생을 놓고 보나 실용적인 이유로 보나 불가능에 가깝다. “20년쯤 스케이트를 탔나 봐요. 누구나 상상할 수 있겠지만, 순전히 너무 힘들기 때문에 중간에 정말 여러 번 그만두려고 했어요. 하지만 번번이 그럴 수 없었던 것은 이제껏 들어간 모든 노력과 희생이 아까워서였어요. 쇼트트랙 스케이트화만 해도, 선수용은 발 모양의 몰드를 떠서 하나하나 맞춤 제작해야 하기 때문에 한 번 만들 때마다 200만원 이상이 들어요. 성장기에는 자주 스케이트화를 바꿔줘야 하는데, 돌아갈 길이 없다고 봐야죠. 그래도 통한의 계주에서 금메달을 땄으니 후련해요.”

남자 모델의 미니멀한 아이보리색 톱은 장광효 카루소(Chang Kwang Hyo Caruso), 아이보리색 실크 팬츠는 씨와이초이(Cy Choi), 화이트 레이스업 슈즈는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심석희의 페플럼 장식 원피스는 칼 이석태(Kaal E.Suktae), 워커 부츠는 슈콤마보니, 뱅글은 구찌(Gucci). 흰색 암체어는 까레(Kare).

박승희의 메시 주머니 장식이 특징인 실크 소재 슬리브리스 셔츠, 슬릿이 가미된 롱스커트는 칼 이석태(Kaal E.Suktae), 검정 앵클 스트랩 오픈토 샌들은 게스(Guess), 스틸 소재 뱅글은 모두 CK 주얼리(CK Jewelry), 벨트는 자렛(Jarret). 남자 모델의 자카드 테일러드 재킷과 반바지, 리본 장식 셔츠는 모두 장광효 카루소(Chang Kwang Hyo Caruso), 스케이트화는 KYU.

먼저 메이크업을 마친 조해리가 장래를 근심하는 사이, 아까부터 ‘패션 놀이’ 중인 박승희는 “나중에 은퇴하면 <보그> 패션 어시스턴트로 들어올래요?” 하는 짓궂은 질문에 망설임도 없이 “재밌겠다! 그래도 돼요!?” 하고 되물을 정도로 심취해 있었다. 운동복을 벗자 ‘명품백’이라는 단어에 설레는 평범한 20대 초반 여자아이처럼 보이는 박승희가 “셀린백 정말 예쁜데…, 비싸서! 그래도 정말 예쁜데!” 하고 말할 때마다, 거기에 담긴 패션적 의미를 더 생각하는 30~40대 스태프들의 ‘엄마 미소’를 끌어냈다. 아무튼 그녀는 영예로운 금메달리스트이며, 바로 며칠 전 넉넉한 포상금도 받았으니 말이다.

<보그>의 이날 촬영 컨셉 역시 다소곳하고 얌전하지만은 않았다. 무난한 오피스 룩이나 정장 차림으로 패션을 설명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평소 자신의 몸을 정확히 관찰해보지 않은 일반인이라면 당연히 주눅 들 정도로 과감한 의상, 처음 촬영용 메이크업을 해본 소녀들이라면 누구라도 화들짝 놀랄 정도로 짙은 메이크업과 난생처음 해보는 헤어 스타일이 얹혔지만, 박승희는 팀의 분위기 메이커답게 촬영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주도해 나갔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또 해보겠어!”라는 그녀의 말을 한 다섯 번은 들었던가? 소치 올림픽 당시 한 방송 인터뷰에서 그녀가 “저는 웃기려는 게 아니라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건데 남들이 다들 웃어요” 하고 말했던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꼼꼼한 준비와 지루한 대기 시간이 끼어든 촬영 내내 시들시들해지는 분위기를 즐겁게 끌어올리는 결정적 한마디를 던지곤 했다. 고된 훈련 중에도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이 분위기 메이커의 즐거운 바이러스는 온 국민이 가슴 졸이다 터질 듯한 환희를 맛본, 짜릿한 레이스가 펼쳐졌던 결승의 금메달에도 상당한 지분으로 공헌했을지 모르겠다. 물론 심석희와 함께 달린 여자 1,000m 금메달에도 그 밝은 성격이 기여했을 것이다.

스스로의 잘못이 아닌데도 유력했던 금메달을 놓친 500m 결승에 대해서도 이제는 낙천적이었다. 무리하게 추월을 시도하던 영국 선수가 아니었다면 처음 잡은 선두 자리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금메달로 직행했을 경기였다. 경기가 끝난 직후 억울하게 울먹인 그녀였지만, 숙성된 소회는 웃음으로 승화돼 있었다. “아직 동생들은 머릿속이 깜깜하고 아무 소리도 안 들릴 정도로 정신없이 달린다곤 하지만, 경기 경험이 많은 해리 언니나 저는 달리면서도 전체 상황이 보여요. 이건 이기겠다, 이건 어렵겠다 다 판단이 되기도 하고요. 그때 제가 밀려서 넘어진 직후에 ‘이기긴 힘들겠지만 벌떡 일어나서 열심히 달리면 진짜 멋있겠다!’라고 생각하면서 진짜 멋있게 바로 일어났어요. 그런데 생각과 달리 마음이 급해서 서두르다가 다시 넘어져버렸죠.” 16년 만의 금메달이 될 경기였다. 비디오 판독을 거쳐 문제의 발단이 된 영국 선수가 3위에서 실격으로 내려앉기까지 원통해하던 그녀였다. 그럼에도 어느새 회복해 멋쩍은 웃음으로 말한다.

10년 동안 태릉 생활을 함께하고 있는 남자 친구 이한빈과 2년째 사랑과 우정이 공존하는 편안한 연애를 경험 중인 그녀지만, 모델 출신 배우인 성준에 대한 팬심은 그와 별개의 문제였다. “혹시 성준 직접 만나보신 분 있어요? 제 이상형이 성준이잖아요!”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로맨스가 필요해 3>를 몰아 봤다는 박승희의 질문에 진행 기자가 “예전에 한 번…” 하고 대답하자마자 화색이 돌았다. “전화 통화라도 하고 싶어요! 여긴 전화 연결 안 되나요?” 이미 여러 차례 인터뷰에서 이상형으로 성준을 지목한 그녀의 농담에 스튜디오가 한 번 더 웃었다.

조해리의 올 풀림을 활용한 아방가르드한 코튼 원피스는 문영희(Moonyounghee), 메시 소재 옥스퍼드 펌프스는 앤디앤뎁(Andy&Debb), 양손 골드 메탈 팔찌들은 발렌시아가(Balenciaga).

박승희의 시스루 소재를 활용해 줄무늬 효과를 낸 화이트 롱 드레스는 드민(Demin), 캔버스 소재 라이더 재킷은 랄프 로렌 컬렉션(Ralph Lauren Collection), 샌들은 쟈뎅 드 슈에뜨(Jardin de Chouette), 스틸 소재 목걸이와 약지 반지는 CK 주얼리(CK Jewelry), 새끼손가락 반지는 미네타니(Minetani).

촬영 중 막간을 이용해 차려진 떡볶이와 순대, 튀김 상을 앞에 두고 김아랑은 걱정이 앞섰다. “매운 걸 잘 못 먹어서요. 위가 별로 튼튼하지 않아요.” 소치 올림픽 기간 중에도 급성 위염에 걸려 후보 선수로 엔트리에 이름을 올린 공상정이 준결승에 대신 나섰다. 촬영 전 간식 하나 준비하는 데에도 조심스러웠던 데 비해 그녀들의 먹성은 무난하기 그지없었다. ”좋아하는 간식요? 우린 다 잘 먹어요! 빵이랑 떠먹는 요거트, 과일 먹고 싶어요! 운동선수라고 특별한 거 없어요! 몸에 안 좋은 술 담배 빼고는 다 돼요!” 하고 씩씩하게 말했다. 출국을 하루 앞두고, 선수들은 <보그> 촬영이 끝나는 대로 여장을 꾸려야 했다. 어릴 때부터 국제 경기 참석이 잦았기에 그쯤은 식은 죽 먹기로 여기는 듯 했다. “다른 건 다 금방 싸고요, 부식만 좀 사가면 돼요. 즉석 밥, 젓갈, 김 같은 거요!”

얌전해 보이는 인상 그대로랄까, 김아랑은 불필요한 말을 조심하고 나서기보다는 배려하길 더 즐기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타인의 호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친절하게 눈웃음을 보내는 다소곳한 소녀. 다른 선수들이 먼저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고 촬영하는 동안 미안할 정도로 길어진 대기 시간에 김아랑은 줄곧 메이크업룸 밖에 나와 다른 스태프들과도 얘기를 나눴다. 아니, 얘기를 들어줬다. 상체는 가벼운 곡선을 이루고 있었고, 재기 발랄한 시스루 슬릿이 들어간 폴앤앨리스의 드레스는 그녀의 몸을 아름답게 감쌌다. “스케이트 선수들은 두꺼운 허벅지가 콤플렉스예요. 훈련 메뉴에는 웨이트도 꼭 들어가는데, 여름엔 산에서 뒹굴기도 해요. 허벅지가 두꺼워지지 않을 수 없죠. 힘을 만들어줘야 하니까요. 일상복을 입을 때도 항상 허벅지가 고민이에요. 허리에 맞춰 바지를 사고 싶다는 게 농담이 아니에요.” 다른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 얘기를 했다. 참으로 미안하게도, 금메달의 희열을 맛본 국민들 모두가 그 허벅지를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음에도(그리고 그녀들의 콤플렉스만큼 심각하게 두껍지는 않음에도!), 그녀들에겐 몸의 한 곳이 감추고 싶은 부분이다. 여자로서의 욕망 한 켠을 내놓고 가진 것이다.

김아랑은 촬영을 마치면 박승희와 함께 출국 준비를 위해 명동에 간다고 했다. “택시라뇨! 지하철 타고 갈 거예요. 이젠 길거리를 다니면 몇몇 분이 알아보시긴 해요. 사인해달라는 분도 있고, 같이 사진 찍자고 하는 분도 계시죠. 명동에 가면 사람들이 많을 테니 더 많은 분이 알아보겠죠?” 아직은 얼굴이 알려지는 스타덤이 부담이기보다는 즐거움이다. 하지만 경기 결과에 있어서는 맘 졸이는 입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올림픽이 끝난 후 그로기 상태가 됐는데, 바로 전국체전에 나갔어요. 거기에 세계선수권대회까지 곧바로 이어지니 정말 자신이 없어져요. 하지만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대가 모아지고 있는지 느껴지니 힘을 끌어내야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기 때문에, 세계선수권에서도 금메달을 따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선수들의 마음까지 당연하진 않다. 박승희가 맞장구치길, “경기 준비가 경기보다 더 힘들어요. 훈련 중에는 빨리 경기 해버리고 끝내고 싶을 뿐이에요.”

예비 엔트리로 준결승에서 활약한 공상정은 어디까지나 심석희보다 한 살 많은 언니지만 자주 막내라는 오해를 받는다. 그건 공상정이 유독 동안에다 말투도 앳되기 때문이기보다는, 심석희가 의젓한 카리스마를 갖췄기 때문일 공산이 크다. “소치 올림픽 이후 포상금을 받고 기자들에게 소감을 말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너무 긴장해서 그 포상금이라는 말이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돈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몰라요!” 얼음 위에 섰을 때 선수들은 누구랄 것 없이 카리스마와 자신감을 뿜어내지만, 그와는 달리 낯설고 긴장된 자리에서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되기도 하는 지극히 평범한 수줍음!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마냥 누구에게나 털털하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공상정은 처음 경험하는 스타덤을 신기해했다. 촬영을 기다리는 그녀가 내내 꾹 쥐고 있었던 스마트폰 화면 속에는 그녀에 대한 가십 기사가, 그리고 그 댓글난이 떠 있었다. ‘공상정 파이팅!’에서부터 악의적인 것까지 그녀가 댓글이란 댓글은 다 흥미롭다는 듯한 얼굴로 읽고 있었다.

김아랑의 슬릿 디테일 백오프 드레스는 폴앤앨리스(Paul&Alice), 메시 소재 레이스업 펌프스는 앤디앤뎁(Andy&Debb), 오른손 스톤 장식 골드 뱅글은 클로에(Chloé), 왼손 골드 뱅글은 미네타니(Minetani).(왼쪽) 공상정의 지퍼 장식 벨티드 가죽 재킷과 네오프렌 팬츠는 앤디앤뎁, 양쪽에 슬릿이 들어간 시폰 드레스는 소울팟스튜디오(Soulpot Studio), 워커 부츠는 슈콤마보니(Suecomma Bonnie). 손에 든 피겨스케이트화는 KYU.(오른쪽)

한편 메이크업룸에서는 ‘진짜 막내’ 심석희가 변신을 경험하고 있었다. 거울 앞에서 답답한 안경을 벗은 그녀는 얼음 위에 섰을 때보다 훨씬 예뻤다. “바람도 세고 얼음 조각도 튀어서 경기용 고글이 꼭 필요하긴 한데 정말 못생겨 보여요!”라는 말이 그대로 맞았다. “석희는 안경 벗으면 정말 변신해요!” 하고 박승희도 말했다(촬영 도중 모니터를 확인할 때도 20cm 앞까지 바싹 다가와야 간신히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는 지독한 근시 때문에 심석희는 항상 안경 신세를 지고 있다). 경기 때도 몸매가 드러나는 의상을 입긴 하지만, 패션의 나라에서 입혀주는 색다른 형태의 의상들은 그녀를 잔뜩 긴장시키고 있었다. 다음 컷을 준비하기 위해 헤어와 메이크업을 수정하는 동안 그녀의 손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메이크업룸은 부지런히 열기를 뿜어내는 난방 기구와 꽉 찬 사람들 덕분에 훈훈한 공기를 품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낯선 환경에 놓여 잔뜩 긴장한 채 체온을 잃은 길고 가녀린 손은 손톱 모양까지도 여성적인 물성을 갖고 있었다. 그 손톱 끝에는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네일 컬러가 미끈하게 발렸다.

180cm를 훌쩍 넘기는 큰 키에, 주먹보다 조금 큰 작은 얼굴을 가진 남자 모델들은 그녀들 안의 여자를 까르르 웃게 했다. 쇼트트랙은 체구가 작을수록 유리한 종목이기에, 아마도 그녀들에게는 모델들이 처음 보는 종의 인류였을 것이다. 스스럼없이 남자 모델들과 섞여 앉아 조잘대던 선수들은 촬영이 끝날 때쯤엔 또래라는 이유만으로 “다음에 꼭 밥 같이 먹을” 친구가 되기로 했고, 그 자리에서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교환하기도 했다! 심석희의 애달픈 이상형이라는 김우빈 역시 성준과 마찬가지로 이날 촬영에 함께하지 않았지만, 형섭과 기용, 두 남자 모델과 신나게 수다 떠는 동안 소녀들이 즐거운 페로몬을 뿜어내는 모습은 놀랍기까지 했다. 특히 팀의 막내인 심석희는 국가 대표 타이틀을 떼놓으면 여고 2학년생, 어린 소녀임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선수촌에서 훈련을 마치고도 유달리 강도 높은 개인 훈련을 한다고 소문난 독종, 소치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3,000m 계주 결승 경기에서 마지막 주자로 나서 추월당한 앞자리를 다시 빼앗아내 1등으로 들어와 금메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터보엔진의 스퍼트. 그리고 여자 1,500m에서 은메달을, 1,000m에서는 동메달을 거머쥔 젊은 들소 같은 저력…. 하지만 운동복을 벗고 2014 S/S 신상으로 차려입은 그녀의 본래 모습은 화보에서의 모습 그대로 수줍고 아름다운 소녀 그 자체였다. 모델 형섭과의 투샷에서 손끝이 그의 팔에 닿았다는 이유만으로, 형섭이 더 좋은 조형을 위해 심석희 어깨에 팔을 둘렀을 때도, 그녀는 즐거워죽겠다는 듯 올라가는 입꼬리를, 터져나오는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꾸밈없는 평범한 일상의 모습으로 <보그>에 봄 나비처럼 날아와 가장 비범한 모습으로 꾸며진 조해리, 박승희, 김아랑, 공상정, 심석희. 그녀들은 사실 빙판 위를 힘차게, 누구보다 빠르게 달리는 것을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견딜 수 없었을 나날들 아닌가. 그들은 우리와 같지만 다른 별에서 왔다. 태릉선수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 별은 어디까지나 미지의 혹성이다. 어쩌면 얼음 대신 이끼와 덤불이 있을지도 모르고, 흰 생명을 지닌 꽃들이 피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우리가 보는 것보다 크고, 우리는 경험해보지 않아 알 수 없는 감정을 안다. 맏언니 조해리는 감사하다는 듯 말했다. “경기가 끝난 후,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환희를 느껴요. 금메달을 땄을 때는 석희가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그 감정이 밀어닥쳤죠. 그 감정이 모든 것을 견디게 해요. 평범한 삶을 살았더라면 경험해보지 못할 커다란 감정이에요. 그 언외의 감정을 느껴본 우린 행운아들이에요.” 그들의 신체는 다섯 살 소녀처럼 늘씬하고 군더더기 없는 라인을 갖고 있지만, 강건한 하체는 우리의 그것보다 훨씬 힘이 세고, 그래서 단숨에 빨리 달릴 수 있다. 그 모습은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라는 산업적 영역에 속해 우리를 웃게 하고 울게 한다. 4년에 한 번, 우리는 그들과 만나고 열병처럼 그들을 사랑한다. 아마도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때 다시 만나거나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될 그녀들과 헤어질 시간은 금세 왔다. 세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해주고 싶은 말은 “금메달 파이팅!” “열심히 하세요!”보다는 단지 “재미있게 경기하고 와요!”였다. “잘하고 와야죠!”하며 스튜디오를 떠나는 그녀들의 발걸음은 올 때와 똑같이, 팔랑대는 봄 나비의 예쁜 날갯짓처럼 보였다. 그리고 얼마 후, 나비들이 몬트리올에서도 메달을 휩쓸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