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트렌드

여가수 열전

2016.03.17

by VOGUE

    여가수 열전

    당대 패션의 얼굴이 교체됐다.
    90년대 슈퍼모델 시대, 2000년대 여배우 시대를 지나 ‘패션’이라는 잡지 표지 모델은 바로 여가수.
    바야흐로 패션은 대중문화를 향해 이렇게 외친다. “여배우를 줄 테니, 여가수를 다오!”

    지난 1월 26일 열린 2014 그래미 어워드. 전 세계 패션 앵글이 클로즈업한 영예의 인물은? 랄프 로렌의 턱시도를 입은 마돈나, 푸치의 트로피 드레스 차림으로 임신한 몸을 감싼 시아라, 시상식 바로 며칠 전 열린 발렌티노 꾸뛰르 쇼의 오프닝 룩인 악보 드레스를 선택한 케이티 페리, 랑방의 골드 라메 드레스를 고른 리타 오라, 아르마니 프리베로 몸을 포장한 알리샤 키스, 구찌의 은빛 드레스로 폼을 낸 테일러 스위프트, 크리스토퍼 케인의 원색 붕대로 휘감은 제니퍼 허드슨 등등. 잠시 후 시상식. 올해의 레코드(다프트 펑크의 <Get Lucky>), 올해의 앨범(다프트 펑크의 <Random Access Memories>), 올해의 최우수 팝 솔로 퍼포먼스(로드의 ‘Royals’), 그리고 최우수 어번 컨템퍼러리 앨범으로 리한나의 <Unapologetic> 등등.

    여가수에게 그래미 시상식이란 여배우에게 오스카 시상식쯤 된다. 그건 다시 말해 여가수들이 한 해 동안 이보다 더 멋지게 빼입을 순 없는 결정적 패션 행사라는 얘기다. 그런 면에서 그래미 어워드의 30여 개가 넘는 시상 가운데 뭔가 하나 빠진 기분이다. 올해의 레드 카펫상? 그건 시상식을 생중계하는 온갖 케이블 채널이나 가십 매거진들이 이미 화끈하게 끝냈을 것이다(어떤 여가수를 비행기에 두둥 태웠다가 또 다른 매체에서는 바닥으로 완전히 추락시켰다가). 패션과 스타일 관점에서 판단했을 때 올해의 패션 광고상이라면 어떤가? 6개월 단위로 당대 패션 규칙을 새로 제정하는 디자이너들의 2014년 봄 광고 모델 계약서에 일류 여가수들이 줄줄이 사인을 마쳤다. 그렇다면 2014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패션 광고상 부문, ‘The Winner is’?

    3월호 잡지를 펼치면 패션계에 봄맞이 가요 대제전이나 가요 대축제라도 열린 듯 착각이 들지 모른다. 한두 페이지 넘기다 보면 마일리 사이러스가 ‘멍 때린 채’ 앉아 있고, 몇 페이지 더 넘기다 보면 플래티넘 블론드를 얌전히 앞가르마 탄 ‘레이디’ 가가와 눈이 마주칠 것이다. 또다시 몇 페이지 휘리릭 넘기다 보면 목욕탕인지 화장실인지 흰색 타일로 꾸민 공간에 한쪽으로 머리카락을 풀어 헤친 리한나를 만나게 될 테며, 흑인 영매처럼 뭐든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고요하게 서 있는 에리카 바두를 볼 땐 흠칫 놀랄 수도 있겠다.

    이런 장면은 올봄 패션계에서 꽤 중요한 신호다. 시대마다 적절한 얼굴을 원했던 패션이 비로소 새 얼굴을 천명했다는 얘기니까(화장품 브랜드의 광고 모델이 바뀔 때마다 당대 미의 기준이 바뀌는 것처럼). 생각해보면 90년대는 누가 뭐래도 슈퍼모델들의 독차지였다. 린다, 나오미, 크리스티, 신디, 클라우디아, 헬레나, 타티아나, 야스민, 샬롬, 앰버 등을 부르는 게 더없이 세련된 태도로 여겨졌으니 말이다. 지아니 베르사체 같은 일류 디자이너들은 리처드 아베돈이나 <보그> 같은 패션지들과 합세해 그들을 캣워크와 광고, 잡지 표지에 싣는 재미에 푹 빠졌다. 뉴 밀레니엄이 들이닥치고 할리우드가 대중문화의 핵심이 되면서 여배우들은 슈퍼모델들의 빵빵한 엉덩이를 가볍게 걷어찼다. 패션쇼 맨 앞줄은 여배우들의 옷 잔치가 따로 없을 정도였고, 패션지들은 신작 개봉에 맞춰 니콜, 르네, 위노나, 기네스, 우마, 드류, 산드라, 카메론, 안젤리나 등을 경쟁적으로 표지에 게재했다. 여배우들이 유명 디자이너의 옷을 입고 건치 미인처럼 활짝 웃어야 잡지가 팔렸다. 하지만 2010년대로 진입하자 그래미 여인들이 오스카 여인들을 패션의 낭떠러지 끝으로 밀어붙이는 중이다.

    실로 패션에서 이번 시즌은 ‘오스카 vs. 그래미’ 구도에서 여가수들의 완승이다.) 승리의 깃발을 휘날린 여전사들은 위에서 언급한 마일리 사이러스, 레이디 가가, 에리카 바두, 리한나다. 여가수 연승 시리즈의 첫 승을 알린 인물은 도나텔라 베르사체와 레이디 가가 커플이다. “내 친구 레이디 가가를 베르사체 새 광고의 얼굴로 결정하게 돼 몹시 영광이다.” 도나텔라는 레이디 가가를 가리키며 ‘내 친구’라고 인류 앞에 공식 선언했다. “우아하고 매력적인 사진 속에 드러나는 그녀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영혼을 광고에 담고 싶었다. 그녀는 내게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베르사체 DNA의 전형이다.” 듣자 하니 친구 정도가 아니지 않나(도나텔라는 오빠 지아니가 살아 있었다면 가가의 엄청난 팬이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가족, 심지어 DNA로 베르사체 가문의 일원이 된 레이디 가가와 도나텔라의 인연은 2010년대부터다. 레이디 가가가 2011년 ‘디 에지 오브 글로리’ 뮤직비디오에서 베르사체를 입었던 것이 시작이다. 그래서 광고 모델로 발탁된 게 꽤 늦어 보인 것도 사실이다. 아닌 게 아니라 도나텔라는 자신의 복제양들을 전면에 내세우길 좋아한다. 2003 F/W 광고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에 이어 레이디 가가는 두 번째로 도나텔라 미니미가 됐다. “엄마와 딸 같다”라는 게 플래티넘 블론드 여인 한 쌍을 향한 세간의 품평이다.

    가가와 도나텔라 복식조가 거둔 승리는 올리비에 루스테잉과 리한나의 혼합 복식조에게 바통이 이어졌다. 지난해 10월에 열린 올봄 발맹 쇼가 끝나자마자 리한나가 여기저기 쇼피스들을 입고 나돌아 다녔고, 덕분에 그녀는 걸어 다니는 광고 모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아이콘이다!” 루스테잉은 자신의 꿈이 실현됐노라며 무진장 좋아했다. “당신의 창조물에 영감을 준 여자가 당신의 옷을 입을 때, 당신의 비전은 완전히 성공한 것이다.” 그의 칭찬 일색에 따르면, 타협적이지 않고 신선하며, 현대적인 우리 세대 아이콘이 바로 리한나라는 것.

    “그녀는 올봄 광고에서 내가 지닌 발맹의 비전을 그대로 갖고 있다.” 또 그녀는 패션과 음악을 융합했으며, 발맹 컬렉션은 그것을 기반으로 한다고 덧붙였다. 이보다 더한 칭찬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자신을 떠받드는 루스테잉에 대한 리한나의 반응은? “우리가 같이한 모든 게 끝내줬다! 드디어 발맹 광고를 찍다니 정말 최고다. 루스테잉은 내가 오랫동안 좋아하던 친구다. 그와 함께 일해서 정말 기쁘다. 아주 훌륭하다!” 닭살 정도가 아니라 손발이 오그라들 만큼 서로에게 푹 빠져 있으니 최고의 팀워크 아닌가?

    완벽한 팀워크라고 치면 리카르도 티시와 에리카 바두의 혼합 복식조도 전혀 꿀리지 않는다. 여러 디자이너들이 광고 모델로 어떤 여인을 간택한 뒤 당연히 뒤따르는 찬사가 티시의 입에서도 마구마구 터져 나왔다. 그는 “그녀는 아이콘이다! 에리카 바두는 내 평생에 만난 가장 스타일리시한 여인 중 한 명이다”라고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티시가 에리카에게 유난히 홀린 부분은? “환상적인 비율과 피부 톤!” 아시다시피 에리카 바두는 레이디 가가, 리한나 등과 다른 장르의 여가수다. ‘소울의 여왕’이 그녀를 향한 별명. 게다가 2010년에 낸 다섯 번째 앨범의 첫 싱글 ‘Window Seat’ 뮤직비디오에선 옷을 벗어 던진 채 거리를 걷거나 아예 홀딱 벗고 길바닥에 쓰러지는 장면이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니 거침없는 디자인 성향의 티시에게 바두가 지향하는 ‘네오 소울’은 딱일 수밖에. 사실 티시는 모델 발굴에 있어 자타가 공인하는 솜씨를 지녔다. “우리 가족은 대가족이었고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며 우리는 모두 같다고 배웠다.” 그런 성장 배경이 편견 없는 모델 캐스팅에 일조한 듯 보인다. 트랜스젠더 모델은 물론, 흑발의 마리아칼라, 흑인 모델 조안 스몰스를 발굴했다고 늘 얘기하곤 하니까. “나는 수많은 흑인 아가씨들을 캐스팅했다. 그리고 늘 그들을 지원하고 있다.”

    패션계에서 흑인 모델의 존재감에 대해 다시 논란이 일고 있는 요즘, 에리카 바두의 캐스팅은 어떤 면에서 꽤 의미심장하다. “왜 흑인과 라틴 소녀들을 쇼에서 볼 수 없나? 미국 대통령이 흑인인 이 시대에!”라고 티시는 이런 상황이 좀 슬프다고 덧붙였다. 그의 말대로 “내 생각에 사람들은 스스로 진보적이며 개방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다들 여전히 피부색으로 차이를 만들고 있다”가 요즘의 화두 아닌가. 아무튼 리카르도 티시에게 낙점된 바두는 곧 패션계에서 바두이즘(그녀가 97년에 낸 첫 음반이 <바두이즘>이었다)을 일으킬 조짐이다. 올리비에 잠이 만드는 <퍼플> 매거진 최신호도 그녀를 모델로 화보를 촬영했다(사진가는 요즘 잘나가는 카림 사들리). 이미 톰 포드 눈에 들어 그의 향수 광고에도 모델로 출연한 이력 덕분인지, 비욘세와 나오미 캠벨을 혼합한 듯한 그녀의 미모는 샤데이 이후 가장 패셔너블한 흑인 뮤지션으로 손색없어 보인다.

    한편 ‘악동’ ‘논란’ ‘19금 퍼포먼스’ ‘이슈 메이커’ 등의 자극적인 묘사가 거머리처럼 늘 따라다니는 마일리 사이러스와 마크 제이콥스의 올봄 광고 캠페인이 공개되자 여배우들을 상대로 한 여가수들의 압승 소식이 패션 동네방네에 널리 퍼졌다. 게임 끝! 마일리는 10대 시절에 마크를 처음 만났노라고 기억한다. “마크는 내가 열여섯 살 때 패션계로 나를 인도했다. 마크와 처음 어울린 그때부터 패션에 대해 조금씩 배웠다.” 그런 뒤 얼마 전엔 마크 제이콥스의 피부암 예방 캠페인을 위한 티셔츠 시리즈를 위해 전라로 촬영한 뒤 티셔츠에 인쇄된 적도 있다(이 프로젝트에는 마크 제이콥스의 ‘절친’들만 등장했다. 왜냐하면 다들 홀딱 벗어야 하니까!). “나는 마크 제이콥스와 자주 일했다.”

    하지만 마일리와 마크는 이번 광고를 성사시킨 뒤 약간의 고난을 함께 겪어야 했다. 그의 광고를 오랫동안 촬영하면서 마크 제이콥스 패션 이미지를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진가 유르겐 텔러가 마일리를 찍기 싫다고 한 것. 결국 데이비드 심스가 촬영한 광고에서 마일리는 혼자 세상 근심은 다 짊어진 듯한 표정으로 LA 해변 세트장에 마련된 모래사장 위에 철퍼덕 앉아 있다. “나는 지루한 봄여름 광고가 싫었다. 빅토리안 가운과 버켄스탁을 신고 출근해도 상관없는 아가씨들을 원했다. 그리고 어딘지 뾰로통하고 삐딱한 아가씨들이 해변에 있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마일리와 두 명의 친구들이 같이 촬영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고 마크 제이콥스는 후일담을 전했다. 뭔가 거리감이 느껴지고 어두운 이미지! 그녀의 에너지, 그녀의 재능, 그녀의 지성, 그녀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그녀를 싫어할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마일리 사이러스, 에리카 바두, 리한나, 레이디 가가, 그리고 각각의 이름 곁에 각주처럼 따라다니는 마크 제이콥스, 지방시, 발맹, 베르사체! 정말이지 환상의 커플이다. 대중 문화 전문가들은 유튜브를 비롯한 영상 매체와 SNS가 패션계에서 여배우의 실종과 여가수의 대거 출현을 일으켰다고 보는 눈치다. 스타들의 사진을 공유하는 게 너무 쉬워진데다 거의 모든 매체가 영상을 활용하는 지금, 가수들이야말로 그런 면에서 빼어난 재능이 있으니 패션이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것. 특히 패션계가 필름으로 어필하는 시대에 여가수의 뮤직비디오는 최상의 협업이자 홍보 수단이라는 점은 여가수들이 지닌 거대한 패션 파워를 예고한다. 여기엔 톱 모델이나 여배우 같은 ‘정석’ 미인보다 ‘매력’ 미녀를 좋아하는 요즘 취향이 한몫 거들었다는 해석도 있다. 물론 굳이 분석하거나 따지지 않는다면, 그저 매력적인 여가수의 패션 퍼포먼스를 즐기면 된다. 톱 모델, 여배우, 여가수. 이렇게 셋을 놓고 보면 요즘 가장 친숙한 존재는 역시 가수 아닌가!

    에디터
    패션 에디터 / 신광호
    기타
    Courtesy of Versace, Balmain, Givenchy, Marc jacobs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