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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빛나는 고준희

2016.03.17

by VOGUE

    반짝반짝 빛나는 고준희

    이제 막 서른이 된 고준희는 지나온 시간과 다가올 시간 사이에서 익숙함과 두려움이 교차된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 여배우로서의 본성도 벅차게 받아들이며.
    영화 <레드카펫>에서 톱 여배우를 연기한 이 사랑스러운 고양이 같은 배우를 만나보자.

    기하학 패턴의 실크 트렌치코트와 실크 소재 할렘 팬츠는 쟈뎅 드 슈에뜨(Jardin de Chouette), 오픈토 힐은 펜디(Fendi). 빈티지한 암체어는 까레(Kare).

    그 자세 좋아해요?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리고 앉은 모습이 히키코모리를 연상시키네요.
    아주 편해요. 너무 방어적으로 보이나요?

    여배우라면 다리를 꼬고 앉은 거만한 모습이 어울리죠.
    저는 그런 ‘도도한’ 자세는 불편해요. 이렇게 웅크리고 있는 게 진짜 제 모습이죠. 감정적이고 감성적이고 상처받기 쉬운 본래의….

    압니다. 감수성의 정점에 서서 울고 웃는 존재가 바로 여배우니까요.
    요즘 저는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면서 회사에서 치열하게 일하는 보통 사람의 자제력이 부러울 때가 많아요.

    가장 여배우다운 여배우는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고현정 언니예요. 영화 <여배우들> 촬영할 때는 현장에 찾아가서 멀리서 지켜보기도 했지요.

    어떤 면이 그렇게 부럽던가요? 여배우로서 픽션과 논픽션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모습이요?
    엄청난 독서가이면서도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요. 그리고 말씀하셨듯이 그 놀라운 담대함이요.

    담대함은 세월과 풍파를 이겨낸 사람들이 갖고 있는 훈장이에요.
    그렇죠? 잘 견디는 것도 자기 관리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별에서 온 그대>의 전지현 언니도 정말 부럽고 근사해요.

    자기 직업을 패러디할 수 있는 것도 그만큼 바탕에 내공이 깔려 있어서죠.
    돌이켜보면 같이 연기 수업하던 친구들 중에 지금은 저만 남았어요. 힘들 때 포기하지 않고 어쨌거나 불안해하면서도 계속해왔다는 게 참 다행이에요. 그런데 제가 지금 횡설수설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왜 그런 생각이 들었나요?
    인터뷰에서 있어 보이는 척하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네요.

    잘난 척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나도 모르게 과장하고 허세를 보일까 봐 말하는 게 조심스러워요. 책도 잘 안 읽으면서 인문학에 관심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요.

    노심초사하는 스타일인가요?
    주관적인 견해를 말하는 데 약간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가령 맛이 있다, 없다는 말할 수 있어요. 하지만 어떤 걸 골라서 그게 왜 좋은지 이유를 말하라고 하면 곤란을 느껴요.

    일종의 결정 장애일 수도 있겠네요.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모른다고 얘기하는 건 두렵지 않은데, 확신에 찬 의견을 내세우려면 혼란이 와요.

    좀 전에 ‘도도한 여배우’ 컨셉으로 촬영할 때는 지나칠 정도로 확신에 차 있었잖아요? 어떤 컷은 영국 귀족 모델 스텔라 테넌트 같던걸요?
    촬영장에서 주어진 역할이 있으면 그걸 잘 해낼 수는 있어요. 그런데 그 역할이 사라지면…, 뭐랄까요….

    이해합니다. 저도 기자로서 제 역할을 수행할 땐 자신감 넘치고 사교적이지만, 자연인으로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처할 때가 많았어요.
    제가 포장된 이미지에 익숙해져서일까요?

    자기 자신을 ‘추구’하려는 건강한 혼돈의 과정이라고 생각되는데요.
    나를 드러내는 게 겁나는 건지, 내가 꽉 차 있지 못하다는 걸 들킬까 봐 무서운 건지 모르겠어요. 익숙함과 두려움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어요.

    어쨌든 여배우 고준희로 사는 건 즐거우시죠?
    중성적이고 도회적인 이미지의 덕을 보고 있어요.

    가죽이 라이닝된 검정 시스루 드레스는 구찌(Gucci), 간결한 형태의 초커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이번 영화 <레드카펫>에서는 정말 잘 어울리는 배역을 맡았더군요. 톱 여배우라니요!
    하하. 톱이 되고 싶어 하는 아역 배우 출신의 여자랍니다. 나중엔 톱이 되긴 하지만요. 윤계상 씨는 삼류 에로 감독이지만 진짜 영화감독이 되는 꿈이 있고, 저는 아역 배우 출신이지만 톱 여배우가 되는 꿈을 이루죠.

    에로틱한 로맨틱 코미디가 기대되는데요. 가령 그 에로 감독이 언감생심 톱 여배우를 자기 에로 영화에 출연시키고 싶어 한다거나 말이죠.
    하하. 오히려 줄리아 로버츠와 평범한 남자 휴 그랜트가 나온 <노팅 힐> 냄새가 살짝 납니다. 제가 우연한 계기로 윤계상 씨 집에 같이 살게 되거든요. 저는 스페인에서 온 아역 배우 출신의 여자로 설정돼 있어요.

    스페인이라니, 공효진 씨가 알래스카에서 온 여자로 설정됐던 로맨틱 코미디 <러브픽션>이 생각나는군요.
    사실 영화 속의 제 캐릭터 서사와 스페인은 거의 연관이 없어요. 감독님이 자유분방한 여자로 스페인 집시를 떠올렸을 뿐이죠. 윤계상 씨와 같이 살면서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찍을 땐 예능 프로 <우리 결혼했어요>를 할 때처럼 풀어져 있답니다.

    비중은 작지만 이제껏 개성 있는 감독들의 영화에 여러 번 출연했죠? 김지운·임필성 감독의 <인류멸망보고서>에서는 좀비 역할을 했고, <헨젤과 그레텔>에서는 천정명 씨의 여자친구로도 나왔더군요. <건축학개론>에선 수지와 한가인 사이에서도 새침하고 강렬하게 자기 방점을 찍었어요.
    <건축학개론>의 흥행은 놀라웠어요. 전 ‘썅년’이라는 대사가 너무 웃겨서 출연했지요.

    대학 시절부터 30대까지 기나긴 사랑의 서사시를 써왔지만, 정작 남자를 차지한 ‘사랑의 승자’는 고준희 씨여서 얄밉고 부럽더군요. 여자로서 어떤 기분이 들던가요?
    하하. 그냥 새벽부터 정오 무렵까지 찍었던 그날의 풍경만 아스라하게 기억나요.

    ‘썅년’이라는 적나라하게 상큼한 대사와 함께요?
    하하. 그러게요.

    자기 욕구를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는 자아도취적인 모습은 드라마 <여우야 뭐하니>에서부터 시작된 건가요?
    맞아요. 고현정 씨 동생으로 나왔던 그 작품이 제 배우 인생에서 전기가 됐어요. 저는 그 작품에서 A급 모델이 되고 싶은 B급 모델을 연기했어요. 극 중 배역 이름도 고준희였죠. 그 작품 이후로 저를 모델 출신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많아졌어요.

    모델 출신이 아닌가요?
    절대 아닙니다.

    고준희 씨가 특별히 빛이 날 때가 있어요. 당신은 화면을 반짝반짝하게 만들죠.
    반짝반짝하게 만든다는 게 뭐죠?

    이정재 씨가 한 말이에요. 이정재, 김혜수, 전지현같이 외모가 화려한 사람들은 대중들을 설레게 해요. 그 ‘반짝거림’을 부정하고 싶어도, 사람들은 그 모습을 사랑해요. 그게 스타죠. 그런 자기 모습과 쓰임을 인정할 때 대중과 진정한 소통이 이뤄집니다. 자기 정체성도 선명해지겠죠.
    맞아요. 한동안 저는 큰 키와 도회적인 이미지를 핸디캡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밑바닥에서부터 꿋꿋하게 살다가 신데렐라가 되는 반전의 역할을 맡을 수가 없었어요. 원래부터 부잣집 딸이거나 집은 가난해도 명품 옷 입고 화려한 욕망을 좇는 배역만 해야 했죠.

    90년대 드라마 <엄마의 바다>에서 고현정이 의젓하게 집안 살림 일구는 큰언니 역할을 할 때 고소영은 철없고 허영 많은 동생 역할로 사랑을 받았죠. 그 모습이 20년 넘게 고소영이라는 스타를 유지시키는 힘이랍니다. 대중들은 그 모습을 사랑해요. 고준희 씨는 <여우야 뭐하니>에서 고현정의 철없는 동생으로 제2의 고소영이 된 거라고 생각하세요. 덕분에 광고계에서 끝없는 러브콜을 받고 계시죠?
    네. 작년엔 집에서 반나절 잠잘 시간도 없을 정도였지요. 제가 구매욕을 불러일으키나 봐요. 하하.

    구조적인 형태의 머메이드 드레스는 퍼블리카 아틀리에(Publicka Atelier), 깃털 귀고리는 아벨(A.Bell). 빈티지한 암체어는 까레(Kare).

    선망의 대상이 된다는 건 선택받은 삶이죠.
    키가 크니까 청순가련한 역할을 못하는 불운도 있어요. 하지만 저도 제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예전엔 모델처럼 보일까 봐 화보 촬영은 물론 패션쇼장 문 앞에도 안 갔죠. <여우야 뭐하니> 끝나고 나서 몇 년 동안이나. 그러다 나중에 깨달았죠. 사람들이 나한테 원하는 모습에서 내가 거꾸로 가고 있구나. 나 혼자 예술 할 것도 아닌데 웬 억지를 부리고 있나.

    스타일리시한 모습에 자부심을 가지세요.
    솔직하게 말하면 저도 그런 모습을 좋아해요. 한동안 패션에 무심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도 꽤 힘들었지요. 하하.

    성격파 배우가 되고 싶었군요?
    지금은 제가 가진 걸 감사하게 생각해요. 좋은 보디를 갖고 있으니까 <보그> 촬영도 할 수 있고, 사람들에게 좋은 에너지를 나눠줄 수도 있는 거잖아요.

    <웰컴 투 동막골>의 여일처럼 해맑은 바보 역할을 해보는 건 어떤가요?
    좋아요. 옷 갈아입지 않고 한 벌로 죽 가는 단벌 숙녀 역할 맘에 드네요. 이렇게 키가 크고 성숙한 외모인데 정신연령이 초등학생 정도에 멈춰 있다면 정말 재미있겠어요.

    감독들이 고준희 씨의 순수하고 엉뚱한 면을 아주 좋아할 것 같네요. 특히 홍상수 감독이요.
    고현정 언니와 김상중 선배에게 홍상수 감독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전 언제든 환영이에요.

    당신 인생에서 일어난 중요한 세 가지 사건에 대해 말해줄 수 있겠어요?
    첫 번째는 교복 사건. 학교 앞에 교복을 맞추러 갔는데, 가게 사장님이 절더러 교복 모델 대회에 나가보라고 여러 번 권했어요. 알고 보니 그 대회가 송혜교 선배님도 입상한 유명한 대회였죠. 그 대회에 나가 상을 탔고, 그날 이후 소속사가 생겼어요. 두 번째는 스물세 살의 첫사랑. 처음 연애했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 느껴봤어요. 아무것도 안 해도 좋았던 그 첫사랑의 감정이 소중하게 느껴져요. 그리고 세 번째 사건은 내가 서른 살이 됐다는 것. 다시 한 번 사춘기를 맞은 것처럼 내 감정을 파악하기 힘들어지네요.

    질풍노도의 시기인가요?
    그런 것 같아요. 감정의 칵테일이 복잡 미묘해요.

    때때로 어떤 자책을 하고 있나요?
    요즘엔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어요. 파일럿으로 평생을 보내신 아버지, 전업주부인 어머니와 함께 사는데 요즘 많이 약해지
    셔서, 혹여 제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을까 노심초사하게 돼요. 짜증을 내고도 금방 후회하는 일이 다반사죠.

    올해는 어떤 도전을 꿈꾸죠?
    아버지는 파일럿이시지만 저는 이제야 운전을 시작했어요. 혼자서 봄꽃을 보러 여행을 떠나고 싶어요. 해외로 나가고 싶진 않아요. 전 겁이 많거든요. 영화 <테이큰>에서처럼 아빠가 구하러 오지 못하는 먼 곳으로는 떠날 생각조차 안 하죠. 하하.

    혹시 좌우명이 있나요?
    행복하게 살자. 남의 것 탐하지 말자.

    여전히 여배우 자격으로 레드카펫 위를 걸을 땐 구름 위를 걷는 것 같겠죠?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걸을 땐 정말 흥분되죠.

    평범한 여자라면 결혼식장이 일생에 단 한 번의 레드카펫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론 결혼식장에서 안 떨릴까 봐 걱정돼요. 하하.

    정말 걱정이 많으시군요.

      에디터
      스타일 에디터 / 김미진, 피처 에디터 / 김지수
      포토그래퍼
      HYEA W. KANG
      스탭
      헤어 / 이선영, 메이크업 / 이안나, 소품 제작 / 다락(Da;rak), 스타일리스트 / 김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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