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가시>의 장혁

서스펜스 멜로 영화 <가시>에서 장혁은 평온한 일상의 틈을 파고든 겁 없는 소녀로 인해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집착이 된 사랑을 두려워하는 비겁한 남자이기도 하다.
물론 영화 밖 현실에서의 장혁은 보기 드문 ‘진짜 사나이’다.

블랙 재킷은 메종 마르탱 마르지엘라(Maison Martin Margiela), 슬리브리스 니트는 티 바이 알렉산더 왕(T by Alexander Wang by Mue).

여고생과 사랑에 빠지셨더군요? 영화 <가시> 말이에요.
처음엔 풋풋한 설렘이었어요. 제가 맡은 준기라는 인물은 전직 국가 대표 럭비 선수였어요. 굉장히 에너지 넘치던 남자가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정착하면서 체육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갖고 안정적인 생활을 해요. 편안하다 못해 나른하고 무료한 일상이 반복되던 중에 예기치 못한 고백을 받고 흔들리죠.

공감이 가던가요?
이야기보다 준기라는 캐릭터의 상황이요. 저 역시 배우라는 직업과 가족이 있는 30대 남자이고, 그렇다 보니 어딜 가든 누구를 만나든 해야 할 역할과 책임이라는 게 있잖아요. 가끔은 익숙한 일상으로부터 떨어져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기도 하고요. 빽빽한 아파트 단지 안에서 갇혀 지내는 준기라면 꽤 답답했겠죠.

원래 꿈이 체육 선생님이었다고 들었어요.
체육을 잘하고 또 좋아해서 체육 선생님이 꿈이긴 했는데, 사실 과목은 상관없었어요. 방학도 있고 정시에 퇴근하는 직업이니까 가족들과 함께할 시간이 많을 것 같았거든요.

어쨌든 꿈을 이룬 셈이네요. 시나리오 단계부터 장혁 씨를 고려한 건가요?
정말 저를 생각했다면 국어나 문학, 혹은 도덕 선생님이었겠죠. 이 시나리오는 감독님이 <맨발의 꿈>을 하기 전부터 갖고 계셨던 것으로 알아요.

김태균 감독과는 분필이 총알처럼 날아다니던 영화 <화산고> 이후 14년 만이죠?
네. 간혹 사석에서 뵙긴 했지만, 제가 감독님을 피해 다녔죠. <화산고>에 대한 기억이 별로 좋지 않았거든요. 촬영하면서 8번을 기절했어요. 와이어 액션을 본격적으로 다룬 첫 영화라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떨어지고 부딪히고 그러다 보니 뇌진탕을 일으키고. 위험했죠. 신인 때라 감독님과의 커뮤니케이션도 힘들었고요. 그 촬영 끝내고 “앞으로 난 어떤 현장도 힘들지 않을 거다” 그랬어요.

그런데 왜 다시 만난 거예요?
시나리오를 받고 나서 감독님과 술을 마셨어요. “하겠다”는 게 아니라 무슨 생각으로 절 캐스팅하려고 하신 건지 의중을 알고 싶었어요. 처음엔 굉장히 방어적이었죠. 그런데 어! 이젠 얘기가 좀 통하더라고요. 저도 나이를 먹었고, 감독님도 예전과 달라지신 부분이 있고. 세대 차에서 오는 간극만 줄이면 재미있게 작업을 할 수 있겠다 싶더군요. 현장에서도 둘이 얘길 많이 했어요. 설득도 하고 설득당하기도 하고. 죽이 잘 맞았죠.

25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여주인공이 된 당돌한 소녀 조보아는 어때요?
솔직히 아직 테크닉적인 연기는 능숙하지 않아요. 여기서 이 감정을 표현하는 좀더 세련된 방법을 찾는 건 이성적인 거잖아요. 이 친구는 굉장히 감성적이에요. 어떤 상황에 몰입하면 자기 감정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빠져드는 것 같아요. 처음에 감정을 잡을 수 있게끔 도와주면 그걸 쭉 이어가요.

싱그러운 관능의 소녀가 평온하던 남자의 일상에 겁 없이 뛰어든다는 점에서 영화 <은교>가 떠올랐어요.
저도 그랬어요. 비슷한 여지가 있죠. 하지만 <은교>가 소녀에게 다가갈 수 없는 노시인의 관찰자적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가시>의 30대 남자는 관찰하다 충동적으로 선을 넘을 수도 있어요. 장르적으로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가고요. 남자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려 하면서 둘 사이에 충돌이 생기고 사건이 벌어져요. 추워서 잠깐 손을 녹이기 위해 불을 켜놓고 “아, 따뜻해”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휘발유를 확 끼얹어 걷잡을 수 없이 불이 커진 셈이죠.

블랙 슬리브리스 니트는 티 바이 알렉산더 왕(T by Alexander Wang by Mue).

무서운 사랑이 된 거군요.
집착이고 중독이죠. 비겁한 사랑이기도 하고요.

오랜만에 사랑의 설렘을 느끼기 위해 어떤 준비를 했나요?
공부하지 말자. 공부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액션을 던지게 되는데, 이 영화에선 리액션이 더 많거든요.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놀자. 그런 느낌은 다 알잖아요. 격정적인 사랑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아무것도 잃을 게 없고 순수하던 때와는 좀 다르잖아요.
사랑이라는 감정에 나이는 상관없는 것 같아요. 40대, 50대가 되어도 10대처럼 느낄 거예요. 다만 위험한 줄도 모르고 슈퍼맨 놀이를 하는 아이와 달리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아프다는 걸 아니까, 조심스러워질 뿐이죠.

그걸 아는 어른이 왜 그런 위험한 사랑을 시작할까요?
남자 안엔 멋지고 고독한 늑대 한 마리와 그리운 소년 한 명이 살거든요. 다시 순수하던 시절로 돌아가 저 소녀를 만난다면 어떤 느낌일까? 잠시였지만 준기는 그 소년이 되었던 거예요.

장혁은 어떤 소년이었어요?
10대 땐 영화적인 공상을 많이 했어요. 집이 신만덕이라는 부산의 공장 지대였는데, 학교가 끝나면 김해공항까지 걸어가곤 했어요.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아마 반포에서 김포공항 거리 정도 될 거예요. 딱 공항에 들어가면 통유리로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게 보이잖아요. 스낵 코너에 앉아 햄버거랑 콜라만 먹고 돌아오는데, 그게 괜히 느낌이 좋았어요. 진짜 여행이라도 온 것 같고.

요즘도 어딘가로 떠나고 싶나요?
어디든 가려면 갈 수야 있지만, 이젠 어디가 어떤 느낌인지 너무 다 알죠. 굳이 따로 여행을 갈 필요도 못 느끼고요. 촬영 현장이 재미있는 게, 어떻게 보면 여행이에요. 연기하러 가는 거긴 하지만 차에 탈 때 음악만 잘 챙겨도 근사하고, 한곳에서 며칠씩 머무르다 보면 촬영이 없는 날 주변 구경도 하고요. <추노> 할 때 깜짝 놀랐잖아요. 아, 우리나라에 이런 데가 있었다니!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국내에도 멋진 곳이 꽤 많아요.

차기작인 영화 <순수의 시대> 역시 사극이라고 들었어요. 국내 여행 제대로 하겠네요!
아마 그렇지 않을 거예요. 이번엔 신분 상승을 했거든요. 사극은 계층이 낮을수록 많은 곳을 돌아다니는데, 왕이 되기 전의 이방원 역할이에요. 조선 초기 ‘왕자의 난’을 배경으로 하죠. 손가락 하나만 톡 내밀어도 알아서들 움직일 테니 아무래도 제 운신의 폭이 크진 않겠죠.

정말 쉴 새 없이 작품을 하시는군요.
직장에 다니는 분들도 특별히 휴가를 내지 않는 한 매일 출근하잖아요. 저에겐 현장이 직장이니까요. 어차피 매일 촬영하는 것도 아니고 익숙해진 부분도 있어 쉴 새는 많아요.

스웨이드 맨투맨 티셔츠와 안에 입은 티셔츠, 팬츠와 구두는 모두 에르메스(Hermès).

직장 생활이 즐거우세요?
가족과의 시간을 제외하면 전 현장에 있을 때가 제일 즐거워요. 거기서 많이 배우고요. 현장에서 만나는 배우가 제일 사실적이거든요. 모니터를 통해 생생히 연기를 지켜보고 리액션을 받아 볼 수도 있고. 그게 얼마나 큰 특권인데요.

최근엔 어떤 배우들이 그런 사실적인 가르침을 주던가요?
<아이리스 2>의 김영철 선배님부터 <뿌리깊은 나무>의 한석규 선배님, <마이더스>의 김희애 선배님, 그전엔 손현주 선배님, 성동일 형, 뭐 많죠. 한 번 들이대보기도 하고, 깨져보기도 하고, 때론 흉내를 내보기도 하고. 그게 자양분이 돼요. 제가 복싱을 좀 오래했는데, 맞아봐야 때릴 수도 있거든요. 자꾸 맞다 보면 이력이 생겨 나중엔 때릴 틈도 보이고요. 확실히 몸으로 배울 때 깨닫는 게 있어요.

원래는 절권도를 하셨잖아요?
절권도도 계속해요. 그런데 절권도는 가르치는 입장이 되다 보니 뚝뚝 흐를 만큼 땀이 안 나더라고요. 한겨울에 몸에서 연기가 날 정도로 운동을 해야 뭔가 한 것처럼 기분이 좋거든요. 운동 중독이죠. 그러고 나서 마시는 맥주 한 잔의 그 시원함!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죠.

작년에 <열혈남아>라는 에세이집도 내셨더군요.
출판사에서 여행서를 내자는 제의가 왔는데,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것도 하나의 여행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 끄적거리다 보니 오히려 그게 여행보다 더 재미있고. 계획을 세워 잘하는 것도 좋지만, 일단 뭐든 시도해보고 열심히 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내용이에요.

책 제목도 직접 정한 건가요?
네. 유덕화와 장학우가 나온 옛날 영화 제목이에요. 그 무렵의 다른 홍콩 액션 영화들도 좋아했지만, 그렇다고 <천장지구>로 갈 수는 없잖아요? 흐흐.

진지한데 재미있는 분이군요. 재범과 공부 배틀을 펼친 ‘화산외국어고등학교’ 편도 진짜 웃겼죠.
네. 저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편하고 좋은 사람이랑 있을 때는 그런데 아직도 되게 내성적인 성향이 있어 말 한 마디도 안 하고 조용히 있을 때도 있어요.

얼마 전 하차한 ‘진짜 사나이’는 본인이 먼저 제작진을 찾아가 출연을 요청한 거라면서요?
얼마 안 있으면 앞자리 숫자가 바뀌는 나이인데, 생각할 시간을 가질 만한 기회가 뭐가 있을까를 찾다 우연히 그 프로그램을 보게 됐어요. 제가 30대의 시작을 군대에서 했잖아요. 젊은 친구들이랑 같이 힘든 훈련을 받고 이런저런 얘기도 하면서 힐링이 많이 됐어요.

본인이 생각하는 진짜 사나이는 누구예요?
아버지. 저도 아버지가 되어보니 알겠어요. 소중한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내가 포기하고 타협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 거고. 자신을 희생하면서 가족을 챙긴다는 건 결코 쉽지 않아요. 그런 아버지야말로 진짜 남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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