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패션에 관한 이야기

깃털 장식 이브닝 드레스나 데콜테가 드러난 황금빛 플리츠 드레스를 입고
일상의 삶을 누리는 건 비욘세나 리한나의 몫.
그렇다면 평범한 일상을 살아야 하는 여성들에게 진짜 멋진 옷은 뭘까?



“왜 슈퍼마켓이냐고요? 슈퍼마켓이야말로 오늘날의 일상이에요. 심지어 샤넬을 입는 사람들조차 슈퍼마켓에 가죠.” 얼마 전 2014년 가을 패션쇼가 막 끝난 후 샤넬의 칼 라거펠트가 쇼핑 카트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이렇게 외쳤다. 이번 샤넬 캣워크는 그야말로 웅장한 규모의 샤넬 쇼핑센터! 더블 C 로고가 부착된 햄과 우유, 카망베르 치즈부터 화장솜, 세제와 포테이토 칩, 샤넬 체인으로 장식된 전기톱 등 500여 종이 넘는 식료품과 생필품, 공산품이 진열된 슈퍼마켓이 단 하루 동안만 그랑 팔레에 문을 연 것이다. 그가 그랑 팔레를 거대한 쇼핑센터로 탈바꿈시킨 이유? 모든 건 현대인의 일상을 표현하려는 디자이너의 의도다. 그야말로 ‘칼의 상상은 무엇이든 현실이 된다’를 증명한 이번 쇼에 대해 라거펠트는 이렇게 덧붙였다. “정말 웃기게 보이고 싶다면, 슈퍼마켓에 스틸레토를 신고 가면 됩니다.”

누구나 모델들처럼 새하얀 트위드 수트를 입고 장 보는 것이 일상일 순 없겠지만, 그가 슈퍼마켓을 무대로 연출한 것은 패션의 가장 거대한 흐름인 ‘일상적 패션’을 알리는 신호였다. 미래적인 우주선부터 거대한 빙하까지 무대 세트에 관한 한 언제나 ‘과장’과 ‘놀라움’을 선택하던 샤넬이 일상성을 대표하는 슈퍼마켓을 쇼장에 끌어들인 건,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스타일의 유행에 대한 암시다(얼마 전 꾸뛰르 컬렉션부터 선보인 스니커즈도 마찬가지!).

패션이 일상적인 것은 당연한 명제다. 의식주의 맨 처음 항목인 ‘의’에 해당하니까. 하지만 더 새로운 옷에 대한 열망과 너무 튀는 스트리트 패션 덕분에 차분하고 일상적인 패션은 그림자 속에 머물러야 했다. 스트리트 패션 파파라치들은 스텔라 맥카트니의 세련된 핀스트라이프 코트를 입은 여인보다 꼼데가르쏭의 2D 펠트 인형 옷을 입은 공작새 같은 패셔니스타만을 쫓았고, 패션 에디터들은 근사한 팬츠 한 벌보다 발맹의 왕골 갑옷 드레스에 더 열광했으니까. 그 결과 패션쇼에서 현실적인 여성들을 위한 현실적인 옵션은 아예 사라진 듯했다. 하이패션 속에 존재하지만 딴 세상 이야기가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적용되는 법. 누구보다 먼저 미묘한 흐름을 포착하고 움직인 인물은 미우치아 프라다였다. 지난 1월 밀라노 남성복 컬렉션에 13벌의 프리폴 여성복을 섞어 선보인 디자이너는 이렇게 말했다. “현실적인 옷들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지금으로선 그것이 좋군요.” 피나 바우쉬와 파스벤더 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실크 원피스와 모피 코트는 특정 취향의 여성들에게 어울릴 듯했지만, 초상화를 프린트한 드레스와 모피 코트 등 대담했던 봄 컬렉션에 비해 훨씬 일상적인 옷에 가까웠다. 그녀의 이런 변신에 기자와 바이어들은 그 13벌을 최근 몇 년간 프라다 컬렉션 중 최고로 꼽았다.



패션의 낙천주의를 전파하는 랑방의 알버 엘바즈 또한 뉴욕 프리폴 프레젠테이션 현장에서 ‘현실’이라는 단어를 반복했다. “여성들은 점점 더 현실을 찾고 있어요.” 심플한 디자인의 부드러운 울 캐시미어 코트와 아르마니 스타일의 팬츠 수트는 엘바즈 특유의 개성이 돋보이면서도 충분히 현실적이었다. “직원들이 묻더군요. 만약 기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냐고 말이죠. 하지만 이 옷들에서 이해할 건 없어요. 그냥 느끼고 입으면 되죠!”

대체 현실적인 여성들을 위한 옷이란 뭘까? 31년 뉴욕에 도착한 기자들은 코코 샤넬에 게 패셔너블한 여성을 정의해달라고 부탁했다. “옷을 잘 입지만 특출하진 않아요. 패션에 순종하지도 않죠. 그렇다고 괴상하게 입지도 않아요. 저는 과장된 것을 싫어해요.” 스타일이 좋지만 공작새처럼 화려하진 않고, 트렌드를 알지만 맹목적으로 추종하지도 않으며, 개성은 있으나 오버하지 않는 여성. 코코 샤넬의 정의는 80년이 지난 지금도 적절하다. 그리고 이 정의를 가장 잘 실천하는 디자이너는 셀린의 피비 파일로다. “보이지 않는 그것이야말로 피비가 만드는 셀린 옷을 통해 느낄 수 있는 힘이다. 발렌티노처럼 로맨틱하지 않고, 생로랑처럼 어둡거나 날카롭지 않다. 그 옷들은 단순하게 보이지 않게 한다.” <T 매거진>은 2014년 봄 패션호를 셀린과 피비 파일로를 위해 헌정했다. 표지 모델로 등장한 파일로를 비롯,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 건축가 소피 힉스, 스타일리스트 카밀라 니커슨, 갤러리스트 폴린 데일리 등 ‘셀린 여성’들은 피비가 만든 셔츠와 재킷, 심플한 코트와 골지 니트를 입고 포즈를 취했다. 눈에 띄는 메이크업이나 복잡한 세트와 조명은 필요 없었다. 촬영이 끝나는 순간 다들 그 차림 그대로 거리에 나서거나, CAD 책상 앞에 앉아 설계도를 살펴봐도 하나도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파일로가 바라는 ‘보이지 않는 매력’이다.

3월 2일 파리 중심가에서 벗어난 테니스장에서 열린 셀린 쇼장은 파일로가 주창한 ‘보이지 않는 매력’에 푹 빠진 신도들의 집결지였다. 흰색 단추가 달린 피트 앤 플레어 라인의 네이비 코트, 모피 벨트를 조인 캐멀 컬러 캐시미어 코트, 주름진 실크 소재 검정 와이드 팬츠 등 편안하면서도 멋진 룩이었다. 그야말로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컬렉션. 전 세계 멋쟁이들의 밀도가 가장 높은 그 공간을 바라보는 순간 <T 매거진> 기사가 다시 떠올랐다. “조용한 패션이 파워를 가진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지난 몇 년 간 그 자리는 눈부신 컬러, 커다란 어깨, 넓은 라펠, 꽉 조인 허리를 비롯한 과장된 혹독함의 차지였다. 6년 전 셀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후 파일로는 계속해서 패션의 방향을 바꾸는 옷들을 디자인해왔다. 그녀는 여성들에게 좀더 클래식하고 실용적인 스타일을 제안했다.”

쉽고 모던하고 편안한 옷 입기 방식. 이건 이미 20년 전 질 샌더와 헬무트 랭 등이 주창한 패션 신대륙이기도 하다. 고티에와 몬타나, 뮈글러, 알라이야 등이 주름잡던 80년대를 지난 여성들은 랭과 샌더의 도움으로 간결한 셔츠와 잘 만든 재킷과 팬츠 하나로 멋 부리는 방법을 터득했다. 동시에 그들은 캘빈 클라인의 슬립 드레스 한 벌로 지난 10년간 넘쳐났던 패션 감미료를 말끔히 씻어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2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 번 패션 대청소가 시작될 수 있을까? 그건 미지수다. 거대한 엔터테인먼트이자 광고 도구로 변신한 패션쇼를 위해 충격적이고 획기적인 패션은 늘 필요하니까. 옥스퍼드 셔츠에 회색 브이넥 니트, 네이비 팬츠에 스니커즈만을 유니폼처럼 입는 피비 파일로도 때로 그래피티 무늬 코트와 황동 굽의 구두를 선보이지 않나!



런웨이가 변하지 않는다면 패션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이 바뀔 수 있다. 인터넷 쇼핑의 공룡으로 군림하는 네타포르테가 창간한 오프라인 패션지가 시발점이 될지 모른다. <Porter>라는 이 잡지는 미국 <보그>와 경쟁한다는 특명을 지닌 채 론칭했다. 기존 패션지가 패션이 선사하는 환상을 찬양한다면, <포터>는 패션의 일상성을 기록한다. 모든 화보와 인물 사진이 친구나 가족이 찍은 듯 친근하며 그들의 의상 역시 하이패션이 선사하는 가장 현실적인 아이템들에 국한된다. 이네즈와 비누드라는 당대 최고 사진가는 대형 세트나 조명 대신 안락한 거실에서 커버 걸인 지젤을 촬영했고, 크레이그 맥딘은 비현실적인 여신이 아닌 침대와 부엌에서 아이들과 노는 엄마로서의 우마 서먼의 모습을 포착했다. 모든 것이 네타포르테의 회장인 나탈리 마스넷의 치밀한 전략이다. “화려하고 완벽한 여성의 이미지만 보여주는 잡지와는 달라요. 인공적인 푸시업 브라를 입은 모델로 가득한 그런 잡지 말이죠. 우리 잡지는 ‘포스트 인스타그램 세대’를 위한 겁니다. 우리 독자들은 현실적인 것이야말로 어떤 것보다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고 있죠.”

패션이 선사하는 아름다운 신기루, 환상을 배제한 패션지가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알 수 없지만, 거리에서 느껴지는 현실적 패션에 대한 갈망은 꽤 뜨겁다. 지난 3월 드리스 반 노튼 쇼가 열린 파리 시청 계단을 오르던 어느 유명 패션 칼럼니스트는 앞서 걷던 은발 여성에게 칭찬을 던졌다. “정말 멋지군요. 거리의 ‘공작새’들보다 당신이 훨씬 우아해요.” 반 노튼의 캐멀 재킷을 입은 그 여성은 요즘 뜨는 인터넷 쇼핑몰 ‘매치스 패션’의 창립자인 루스 채프먼. 채프먼은 감사 인사를 던지며 이렇게 답했다. “저도 곰돌이 젤리 클러치를 들었으면 더 많이 사진에 찍혔을 텐데 말이죠.” 아마 그들이 비아냥의 대상으로 삼은 건 톰 포드의 오색 자수 코트와 부츠를 신고, 올림피아 르 탱의 곰돌이 젤리 클러치를 껴안고 쇼장 앞에서 포즈를 취하느라 정신이 없던 스트리트 패션 스타였을 것이다.

한때 스트리트 패션 사진가들의 열정에 힘입어 과장된 패션으로 쇼장을 찾던 이들도 이제 이성을 찾는 듯하다. 이번 시즌 심플한 블랙 재킷과 팬츠만 입고 발렌시아가 쇼장을 나서던 스타일리스트이자 알렉산더 왕의 친구인 바네사 트라이나, 자수 장식의 드리스 반 노튼 코트를 질끈 묶어 매고 카메라 세례를 피하던 레인 크로포드의 사라 럿슨도 이런 부류다. 2년 전만 해도 20cm가 넘는 넓디넓은 알라이야 벨트에 네오프렌 소재 드레스를 입고 땀을 닦아가며 쇼장을 배회하던 한국의 어느 바이어도 이번 시즌엔 이렇게 속삭였다. “이제 오버해서 차려입는 것만큼 한심해 보이는 것도 없죠?”

그렇다고 패션의 환상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패션 세계에선 생로랑의 빨강 입술 원피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는 부잣집 아가씨도, 모스키노의 맥도날드 로고 티셔츠를 재빨리 입어준 아이돌 스타도 다 같이 중요하니까. 다만 현실과 일상 속에서 좀더 근사하고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의상의 자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사실. 눈에 확 띄는 로고 장식 네오프렌 맨투맨 티셔츠는 이제 조카와 어린 딸에게 양보할 때다. 에르메스와 자신의 이름을 담은 라벨에서 조용한 패션의 힘을 증명하고 있는 크리스토프 르메르는 밋밋하고 심심하게까지 보이는 3월 초 컬렉션에서 나름대로 분명한 해답을 제시했다. “누구나 패션 병정이 될 순 없어요.” 그렇다면 그의 캐시미어 코트와 팬츠 수트를 입는 여성들은 누굴까? “여인일 뿐입니다. 어떤 수식어도 필요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