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의 힙합 패션 스타일

‘엉덩이를 흔들다’라는 말에서 유래한 대중음악의 한 장르가 90년대 유행의 회전문을 타고 패션계로
돌아왔다. 스크린과 MTV, 런웨이와 리얼웨이를 넘나들며 하이패션에 젊음과 아이디어를 주입하고 있는
2014년형 힙합 스타일!



90년대에 10대 시절을 보낸 토즈 코리아 김수림 홍보팀장은 얼마 전 벼르고 벼르던 영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를 감상한 뒤 이런 감흥을 인스타그램에 남겼다. “어제 이 영화를 본 후, 오랜만에 90년대 힙합 모드!” 문구와 함께 그녀가 올린 사진은 ‘노티 바이 네이처(Naughty By Nature)’의 <Anthem Inc> 앨범 가운데 ‘Hip Hop Hooray’를 스마트폰으로 들을 때 캡처한 컷이다. 그녀에게 이 화면을 다시 캡처해 카톡으로 보내자, 늘 그렇듯 화끈한 투로 회신 문자가 왔다. “완전 힙합 사랑하는 1인입니다.” 그러더니 반바지나 면바지에 닥터 마틴을 신고 나이트클럽 대신 홍대 클럽을 전전한 세대라며 힙합 고해성사를 이어갔다. 아닌 게 아니라 인스타그램과 연동된 페이스북의 이 사진 댓글에서도 그녀의 소소한 과거가 까발려졌다. “그대가 힙합 소녀였다는 사실을 깜빡!” “우린 홍콩 클럽까지 섭렵했던 힙합 자매!” 등등.

지금 패션에는 90년대가 완전히 분해되어 당대를 구성한 요소들이 현재 패션 무대에 재해석되어 나타나는 중이다. ‘힙합’ 역시 피해갈 길 없다. 어찌 보면 늦었는지 모른다. 카이(Kye)의 계한희, 로다테의 멀리비 자매, 에밀리오 푸치의 피터 던다스, 발맹의 올리비에 루스테잉 같은 젊은 디자이너들은 자신이 10대 시절을 보낸 90년대에 처음 들었던 힙합 음악이 중세 시대 교회 종소리처럼 익숙하기만 하다. TLC와 로린 힐 같은 여자 힙합 뮤지션들의 음악은 물론 스타일도 따라 했다고 김수림 팀장은 자신의 힙합 전성기를 추억한다. “그들처럼 상의와 하의를 포대 자루처럼 똑같이 크게 입진 않았고, 바지는 풍성하고 헐렁하게, 대신 상의는 꽉 조이게 입었어요. 그리고 피어싱도 진주 같은 것으로 여성미를 강조했죠. 윤미래나 ‘룰라’ 초창기의 채리나처럼요.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서 페라가모 룩이 아닌 청바지 힙합 스타일의 여자애는 딱 저 한 명이었어요. 하하!”

그녀는 카이스트 재학 시절 힙합 동아리 ‘구토스’의 멤버였다고 한 번 더 실토했다. “남자들이 주를 이뤘기에 저는 ‘정신적 지주’ 역할만 했죠. 하지만 구토스 공연 땐 그 유명한 ‘Ghetto Superstar’의 도입부를 부를 만한 여자 멤버가 없어 결국 제가 무대에 섰답니다.” 베이지색 통바지에 회색 탱크톱, 여기에 하이힐, 무려 여섯 개나 뚫은 귀의 귓불을 늘린 피어싱, 한 가닥 길게 염색한 긴 생머리가 당시 그녀의 힙합 공연 스타일! 내친김에 그녀는 자신의 아이폰 음악 재생 목록엔 힙합과 발라드뿐이라며 영화 <The Wolf of Wall Street>의 수록곡을 즉석에서 검색해 방언이라도 터진 듯 줄줄 읊었다. “사이프레스 힐의 ‘Insane in the Rainy’, 서 믹스 어 랏의 ‘Baby Got Back’ , 디 아웃데어 브라더스(The Outhere Brothers)의 ‘Boom Boom Boom’ , 노티 바이 네이처의 ‘Hip Hop Hooray’까지. 이 네 곡이 영화에 나온 대표적인 힙합곡이자 우리가 클래식이라고 분류하는 힙합 음악이죠.”



카이의 디자이너 계한희에게도 힙합 사운드는 친구와의 수다처럼 친근하다. “브랜드 ‘카이’가 ‘contemporary upscale street wear’를 추구하다 보니 늘 힙합에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요.” 뉴욕 패션 위크에 참가하느라 현지에 머물고 있는 그녀가 이메일을 통해 자신의 힙합 기질에 대해 답했다. “그래서 굳이 힙합을 주제로 컬렉션을 해야겠다고 작심할 필요가 없어요.“ 개인적으로 가장 즐겨 듣는 장르가 힙합이기에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만하다. “요즘 힙합이라면 갱스터 랩뿐만 아니라 R&B, 트랩 같은 일렉트로닉 장르까지 워낙 다양해요. 저는 해외 힙합 뮤지션들도 좋아하지만 한국 아티스트들도 좋아해요. 프라이머리, 자이언티 등등.” 아울러 요즘엔 유명 인사들 가운데 힙합 뮤지션들이 옷을 가장 잘 입는 것 같다고 덧붙인다. “카이 옷을 즐겨 입는 리타 오라, 여성 아티스트 가운데 슈퍼 패셔니스타인 리한나, 또 패션이라면 뒤처질 수 없는 에이셉 라키. 물론 글로벌 아이콘인 지드래곤이야말로 최고의 멋쟁이 힙합 뮤지션이죠. 소화하지 못하는 스타일이나 브랜드가 없으니 가히 최고라고 할 수밖에요!” 하긴 지드래곤이나 에이셉 라키는 지난 1월에 열린 파리 남성복 컬렉션과 오뜨 꾸뛰르 쇼의 VIP로 초대된 인물이다. 또 리한나는 올봄을 위한 발맹 광고는 물론, ‘셉템버 이슈’와 맞먹는 미국 <보그> 2014년 3월호 표지 모델로 발탁됐다.

이쯤에서 우리는 ‘Hood By Air’라는 세 단어로 조립된 문장을 눈여겨보며 오래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당대 패션의 처음과 끝을 자처하는 미국 ‘스타일닷컴’은 2014년 봄여름판 <스타일닷컴/프린트> 매거진 취재를 위해 20대 중반의 셰인 올리버가 전개하는 ‘후드 바이 에어’ 작업실을 급습했다. HBA라는 단순하고 커다란 이니셜로 더 익숙한 이 브랜드의 이름은 신조어나 마찬가지다. “새로운 은어입니다. ‘눈에 띄거나 멋을 부리다’와 동의어죠”라고 디자이너가 ‘Hood By Air’에 대해 설명했다. “셰인의 브랜드는 패션과 도시의 거리 문화와 음악 사이를 연결해주는 다리입니다.” 매튜 윌리엄스가 <스타일닷컴/프린트> 취재진에게 전했다. 칸예 웨스트와도 작업하는 매튜는 초창기에 올리버에게 티셔츠를 사 입은 적이 있으며 함께 협업도 진행할 정도다. 잘나가는 것들의 집합소인 오프닝 세레모니에서는 2012년 봄부터 HBA를 바잉 중이다.

셰인 올리버는 힙합 요소, 스트리트 요소들을 쉽게 볼 수 있다고 전한다. “우리 옷엔 그런 면들이 있습니다. 그게 제 안에 있기 때문이죠. 저는 힙합 문화에서 살아왔기에 그게 뭘 의미하는지 잘 압니다. 하지만 뭔가 더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것보다 힙합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 말이죠. 그게 다른 브랜드와 구분 짓는 또 다른 방식인 것 같아요.” 그의 이런 신조는 결국 하이패션의 오만한 안목을 무릎 꿇게 만들었다. 될성부른 브랜드를 발굴하는 데 혈안이 된 어느 대형 홍보 회사가 HBA를 끌어안은 뒤부터 슈퍼 편집장들과 유명 바이어들이 그들의 패션쇼 맨 앞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뉴욕에서 본 아주 흥분된 쇼!”라는 게 그들의 평판. <스타일닷컴> 편집장 더크 스탠든은 스트리트 패션과 하이패션의 융합을 환영하는 식의 기사를 봄호에 실었다. “그들의 첫 쇼에 에이셉 라키가 모델로 등장했다. 그건 컬트 스트리트 웨어 라벨이 하이패션 무대에 등장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HBA는 클럽과 갤러리에서 돋보이기 위한 옷을 만들고 싶은 이스트 뉴욕의 어느 10대에서 시작된 브랜드다. 결국 모델 조안 스몰스는 HBA를 입고 <스타일닷컴/프린트> 2014년 봄여름판의 표지에 떡하니 등장했다.



계한희가 최고의 멋쟁이 힙합 뮤지션으로 꼽은 지드래곤은 태양과 함께 얼마 전 파리 남성복 컬렉션 기간 중에 HBA 프레젠테이션에도 들렀다. 또 ‘엠부시’를 디자인하는 힙합 듀오 엠플로의 멤버인 버발과 그의 여자 친구를 겐조 쇼에서 만나 기념 촬영한 뒤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렸다(이 사진들은 ‘보그닷컴’을 통해 다시 볼 수 있다). 대관절 세상의 어떤 옷이 지디의 몸을 거치지 않았을까 싶은 요즘, HBA는 물론 힙합 정신으로 중무장한 또 다른 브랜드들이 지디와 태양 덕분에 유명세에 날개를 달고 있다. 23이라고 등에 쓰인 ‘파이렉스’의 초록색 체크 셔츠 역시 지디로 인해 서울에서 더 유명해졌다. 파이렉스는 칸예 웨스트의 스타일리스트로 이름을 날린 버질 에이브로가 작년 봄에 시작한 브랜드다. 또 ‘피갈레’는 태양이 ‘링가 링가’ 뮤직비디오에도 입고 나와 대중적으로 히트 치기도 했지만, 이미 에이셉 라키는 물론, 캐롤린 드 메그레 같은 파리 골수 멋쟁이들도 입고 다닌다. 요즘 패션계가 우상처럼 숭배하는 에이셉 라키(톱 모델 샤넬 이만이 여자 친구!)는 ‘션 샘슨’도 자주 입는다. 캘리포니아에서 자랐지만 런던에서 공부한 디자이너의 취향으로 인해 힙합 패션에 파격을 가미한 디자인으로 작품성까지 갖춰 호평을 얻는 브랜드다.

힙합 느낌의 브랜드들은 런던에서도 특유의 시시껄렁한 태도로 출몰해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나시르 마자르’는 90년대 힙합과 스트리트 패션에서 영감을 얻는 디자이너로, 요즘 런던 패션 위크에서 확 떴다. 가레스 퓨, 빅터앤롤프, 뮈글러, 베르나르 윌헴 등과 협업을 통해 하이패션과 친분을 쌓은 그는 헤어 스타일리스트 출신으로 오페라와 뮤지컬 소품 제작 쪽에서 경력을 쌓았다. 덕분에 그의 컬렉션에는 독특한 힙합 모자들이 일품이다(마돈나가 <데이즈드앤컨퓨즈드> 표지에 그의 모자를 쓰고 나와 화제가 됐다).



“힙합은 라운지나 일렉트로닉과 달리 기승전결이 있어요”라고 김수림은 거의 전문가다운 식견을 보여준다. “생각보다 공격적이지 않고 사랑이나 이별을 다룬 곡도 많아 쉽죠.” 그렇다면 2014년 힙합 스타일링도 수월할까? 계한희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힙합 패션이라고 하면 ’후부’나 ‘MF’류의 브랜드와 함께 엄청나게 큰 배기 팬츠나 화려한 체인 같은걸 떠올린다며 아쉬워한다. “사실 요즘은 힙합 패션이라고 따로 묶거나 규정짓긴 힘듭니다. 워낙 종류도 많은 데다, 힙합이 스트리트 문화의 유니폼에서 벗어나 하이엔드 슈퍼 브랜드의 컬렉션에서도 볼 수 있으니까요.” 사실 리카르도 티시가 칸예 웨스트의 앨범 커버와 공연 의상을 디자인하고, 또 멋쟁이들이 죽고 못 사는 지방시 남성복 컬렉션에 힙합 스타일은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고 있다. “이미 작년에 최고의 히트를 친 스냅백이나 비니 같은 아이템부터 시작해, 농구도 안 하면서 다들 신는 나이키 조던이라거나 한국에 공식 수입도 되지 않고 있는 슈프림을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잖아요? 작정하고 힙합 룩을 연출하지 않아도, 보시다시피 이미 힙합은 패션계 전반에 은근슬쩍 자리 잡았어요.”

스트리트 문화와 현상에 일가견이 있는 패션 저널리스트 홍석우는 어느 일간지를 통해 2014년을 정의할 일곱 개 트렌드 가운데 하나로 힙합을 끼워 넣었다. “근래 하이패션 신의 큰 변화는 누가 뭐래도 ‘힙합’의 공습이다. 다른 층위를 바라보던 두 문화의 기막힌 만남은 동시대 패션의 새로운 원동력 그 자체였다.” 그러면서 거대한 모피 코트와 누가 봐도 졸부 스타일의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상징하던 힙합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며, 지금 힙합 패션은 절제된 무채색과 강렬한 표어(슬로건) 그래픽을 접목하며 고급 패션 시장의 주류로 급부상 중이라고 썼다. 에이셉 라키만 해도 퍼프 대디풍 옷차림을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다. 아주 말쑥하고 댄디하며 젠틀하다.



몇 년 전, 빈틈없이 세련된 쟈뎅 드 슈에뜨에 합류한 스타일리스트가 젊고 파격적인 성분을 주입하기 위해 동원한 것 역시 힙합 분위기였다. “힙합은 우리 세대에겐 문화적 신세계였어요”라고 쟈뎅 드 슈에뜨와 럭키 슈에뜨 스타일리스트이자 ‘보그닷컴’의 패션 칼럼니스트 오선희가 힙합 찬사를 시작했다. “90년대 초·중반에 10대를 보낸 우리는 처음으로 힙합을 듣고 자란 세대죠. 모든 장르의 음악이 그렇지만 힙합은 음악인 동시에 패션이며 스타일이고, 스타일링인 동시에 포즈와 제스처이며 라이프스타일입니다.” 그녀는 어느 세대나 ‘쿨’은 있었지만 90년대의 쿨은 단연 힙합과 얼터너티브 록이라고 덧붙인다. “젠더리스적 쿨한 요소를 늘 염두에 둬야 하는 브랜드가 쟈뎅 드 슈에뜨예요. 그래서 저는 시대별로 이 브랜드에 적용할 만한 쿨의 요소들을 찾죠. 아무래도 제가 90년대 키드이기에 힙합을 차용하는 게 가장 쉽고 재미있었어요.”

‘힙합 걸’ 김수림은 자신의 베스트 프렌드들 역시 힙합 무드로 충만하다고 전한다. “스타일리스트 오선희와 저는 여전히 TLC 팬이에요. 요즘도 우린 TLC의 페이스북에 ‘좋아요’ 단추를 마구 누르죠. 또 저와 아주 친한 친구의 남편이 언더그라운드 힙합계에서 활동하는 ‘갱톨릭’입니다.” 지금 보기엔 대체 언제 힙합 소녀 시절이 있었을까 싶을 만큼 차갑고 도회적인 외모지만, 그녀는 타샤니와 업타운 공연은 물론, 작년에도 스눕독 내한 콘서트를 그때 그 시절 친구들과 즐기러 갔다. “다른 장르에 비해 뮤지션 그 자체로 무대 위에서 많은 걸 보여주다 보니, 그게 패션에 영감을 많이 주는 듯합니다. 게다가 그래피티 역시 힙합과 밀접한 관계가 있죠. 그러니 힙합은 어떤 큰 문화로서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상당히 어필하고 있습니다.” 스타일리스트 오선희는 힙합이 지닌 젊음과 에너지의 초월성에 의미를 둔다. “힙합 패션의 매력이오? 마돈나 음악처럼 시대와 세대를 초월해 젊은이들을 춤추게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