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고 경쾌한 큐롯 팬츠

때로는 바지 같고 때로는 치마 같다. 때로는 소년 같고 때로는 여성스럽다.
패션의 가장 모호하고 까다로운 존재, 큐롯 팬츠가 쉽고 가볍고 경쾌하게 다시 태어났다.



클로에 쇼에서 무릎 길이의 나풀거리는 아이보리색 반바지가 등장했을 때, 반사적으로 ‘멋지다’고 감탄한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건들거리는 동네 사내아이들의 농구 유니폼을 닮은 그 팬츠는 섹시하게 아주 짧거나 발목 길이 시가렛 팬츠처럼 맵시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오랜만에 맞닥뜨린 이 어중간한 길이와 어중간한 정체성(치마와 바지의 두 얼굴을 지닌)이 올봄 가장 핵심적인 팬츠라는 사실을 천명한다면? 트렌드에 목숨 거는 사람들은 아마도 패션 공황 상태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머릿속엔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큐롯 팬츠에 대한 몇 가지 결정적인 고정관념이 있으니까. 배가 두둑해 보이는 하이 웨이스트 라인, 종아리를 굵거나 휘거나 짧아 보이게 만들기에 딱 좋은 길이, 걸을 때마다 다리를 휘감을 정도로 지나치게 폭이 넓거나 뻣뻣한 A라인, 그리고 어떤 신발과도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까다로움까지!

그러나 과거 유행이 현재로 소환될 때는 반드시 동시대적으로 달라진 양상을 갖추기 마련이다. 2014년식 큐롯 팬츠는 60년대 모델 브리짓 라슨이 입었던 똑 떨어지는 검정 바지보다 훨씬 덜 엄숙하고(실루엣이 땅과 수직을 이룬다), 70년대 로렌 허튼이 입었던 마리 콴트의 바지보다 덜 직접적이다(부채를 펼친 것 같은 사다리꼴). 그리고 2000년대 초, 제니퍼 로페즈를 시초로 여자 팝 뮤지션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던 저지 소재 가우초 팬츠보다 덜 흉하다(유행하던 당시에도 의견이 분분했다). 배를 압박할 정도로 꼭 맞게 재단된 높은 허리선은 골반에 걸칠 수 있게 낮고 느슨해졌고, 자신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던 실루엣(평면을 주제로 한 꼼데가르쏭의 2012 F/W 컬렉션 못지않게 각이 살아 있는)은 능수버들처럼 나긋나긋해졌다. 계절에 맞는 코튼, 실크, 시어서커 같은 소재는 걸음에 따라 가볍고 부드럽게 펄럭일 뿐이다. 에르메스의 악어가죽 큐롯 팬츠조차 아주 얇게 가공되어 웬만한 자카드보다 섬세하게 주름진다.

이 정도면 ‘페르마의 정리’라 해도 좋을 패션 난제, 큐롯 팬츠 공식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듯. 이제 과거의 오명에서 벗어난 바지에 적극적으로 다가설 용기가 필요한 때다. 그렇다면 동시대적으로 둔갑한 큐롯 팬츠에 걸맞은 모던한 선택과 현대적인 스타일링이란 뭘까? ‘휘슬스’의 CEO 제인 셰퍼드슨의 취향을 참고해보자. “올봄 제가 가장 좋아하는 큐롯 팬츠는 올인원 스타일입니다.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긴 올인원의 업데이트 버전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올인원은 검정 새틴 소재 튜브톱처럼 아주 포멀하거나 피크닉용 데님 덩거리처럼 지나치게 캐주얼하지 않나. 큐롯 팬츠를 ‘잘’ 입는 방식에 대한 일반적인 조언은 이렇다. “하이힐(발가락이 드러나는 앵클 스트랩 샌들이면 금상첨화)과 크롭트 톱에 매치하는 게 보기 좋아요(알렉산더 왕처럼!). 가능한 한 심플하게 입어야 합니다. 가는 발목도 돋보이고 우아하면서도 모던하게 보이죠.”

‘에지’가 전부일 것 같은 빅토리아 베컴이 2014 S/S 컬렉션 피날레에 큐롯 팬츠 차림으로 나타난 건 이번 시즌 큐롯 팬츠의 존재감을 강조하는 작지만 큰 사건이었다. 그녀가 입은 건 자신의 컬렉션 전반에 등장한 팬츠. 화이트 셔츠와 블랙 힐에 매치한 그 모습은 격식을 차린 듯하면서도 어딘가 경쾌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날이 선 바지 주름의 울 팬츠부터 상의, 액세서리까지 일관된 컨셉으로 맞추는 건 재미있는 방식이 아니다. “덜 구조적인(좀더 캐주얼한 느낌) 큐롯 팬츠를 실크 블라우스, 테일러드 블레이저와 함께 입으면 전체적으로 균형을 맞출 수 있죠.” 네타포르테의 패션 디렉터 홀리 로저스는 좀더 과감해지라고 조언한다. “재미를 주세요. 큐롯 팬츠에 겐조나 크리스토퍼 케인의 그래픽적인 스웨트 셔츠 하나면 감각적인 데이타임 룩을 연출할 수 있죠.”

한편 ‘큐롯 팬츠’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데 조심스러운 이들도 있다. 무릎에서 정강이 사이인 큐롯 팬츠 외에 아주 짧거나 아예 발목까지 길게 내려오는 바지를 폭넓게 아우르려는 의도일 것이다. 매치스닷컴 패션 팀의 나탈리 킹햄에 의하면, 매치스닷컴에서는 큐롯 팬츠 대신 ‘와이드 레그 팬츠’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2013 가을 컬렉션부터 통 넓은 바지들을 눈여겨봤습니다. 60년대 생트로페의 오드리 헵번을 떠오르게 하죠(실제로 젊은 시절 그녀가 큐롯 팬츠를 입은 모습은 거의 찾을 수 없는데도). 짧고 박시한 상의나 블라우스에 납작한 샌들과 신으면 깔끔하고 날렵해 보일 거예요.” 어쨌든 큐롯 팬츠라 불리지 못하더라도, 런웨이 룩은 느긋하고 따스한 생트로페 햇살과 향기로운 바닷바람을 머금은 듯 여유롭기 그지없다. 큼지막한 반팔 티셔츠와 오버사이즈 버튼업 셔츠, 늘어지는 재킷은 낙낙한 큐롯 팬츠와 함께 더없이 편안하게 몸을 감싼다. 머리칼은 바람에 나부끼도록 내버려둔 채, 바지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고 걷는 모습은 스케이트보드를 타거나 서핑을 즐기는 톰보이 걸들의 전형이다.

여전히 이 태평스러운 방식(서퍼 쇼츠처럼 새롭게 태어난 큐롯 팬츠!)이 자신과는 맞지 않다고 느낀다면? 클래식한 큐롯 팬츠에 일가견 있는 까르벤의 기욤 앙리(2012 가을 컬렉션 때 크롭트 셔츠에 매치한 기숙학교 교복풍 큐롯 팬츠를 선보인)의 조언에 귀 기울이는 게 좋겠다. “타이츠와 함께 입을 수 있는 간소한 팬츠예요. 실루엣은 신선하면서, 입었을 땐 맞춤복 같아 보이죠.” 물론 앙리 역시 100% 여성스럽기보다 말괄량이가 즐겨입을 법한 옷이라는 걸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런 가벼움 속에서도 늘 우아함을 발견합니다.” 그러니까, 돌아온 큐롯 팬츠는 소년 같지만 여성스러운 방식으로 여자들의 몸과 마음을 더할 나위 없이 편하게 할 아이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