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코 라반의 디자이너 줄리앙 도세나

여러 명이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만큼 해내기 힘든 일이란 뜻이다.
파코 라반 하우스의 부활이라는 난제를 맡은 30세 줄리앙 도세나를 파리에서 만났다.



프랑수아즈 아르디, 혹은 브리짓 바르도가 디스크 조각을 연결해 만든 드레스 차림의 관능적인 모습을 기억하시나. 프렌치 시크를 대표하는 두 여인 모두 파코 라반(Paco Rabanne)의 열렬한 팬이었다. 66년 2월 1일, 파코 라반은 ‘동시대 재료를 이용해 만든 입을 수 없는 12벌 드레스(Twelve Unwearable Dresses in Contemporary Materials)’라는 이름의 첫 컬렉션을 발표했다. 플라스틱, 금속 조각 등을 활용한 그의 실험적이고 미래적인 의상이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음은 물론이다. 99년 7월 꾸뛰르 컬렉션을 끝으로 브랜드 창립자가 현역에서 은퇴한 후, 파코 라반 하우스는 그야말로 ‘회전문 신드롬’의 대명사였다. 2005년 F/W 파리 패션 위크에서 패트릭 로빈슨이 이끄는 기성복 컬렉션이 열렸지만 세 시즌 만에 하우스는 다시 문을 닫았다. 2011년 가을, 인도 출신 디자이너 매니시 아로라를 영입하며 2012년 봄 컬렉션으로 부활을 시도했지만 결국 두 시즌 만에 지방시에서 리카르도 티시에게 일을 배운 29세 리디아 마우러로 교체됐다. 모델 뺨치게 예쁜 그녀마저 두 시즌이 한계였다.

지난가을, 파코 라반 하우스는 또 한 명의 생소한 이름을 지명했다. 니콜라스 게스키에르의 발렌시아가에서 수석 디자이너로 5년간 일한 줄리앙 도세나(Julien Dossena)가 주인공. 게스키에르가 발렌시아가를 떠날 때 함께 하우스를 나와 자신의 브랜드 ‘아토(Atto)’를 론칭한 그는 단 한 번의 컬렉션으로 패션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 그가 이전 디자이너들과 같은 길을 걷게 될지, 파코 라반 하우스의 전성기를 되찾을지는 패션계 관심사 중 하나다. 지난가을에 열린 첫 컬렉션, 그리고 3월 초에 열린 두 번째 컬렉션을 통해 판단하건대, 그의 데뷔는 일단 성공! 패션쇼를 마치고 바이어들을 만나며 전에 없이 분주한 그를 만나기 위해, 세상의 모든 하이패션 부티크가 집결한 몽테뉴 거리 파코 라반 스튜디오를 <보그>가 방문했다. 온통 하얀색 벽을 배경으로 기하학적인 메탈 가구들이 놓인 스튜디오는 딱 파코 라반 하우스의 모습. 이제 갓 서른이 된 이 젊은이가 <보그 코리아> 팀을 향해 활짝 웃었다.



VOGUE KOREA(이하 VK) 스튜디오가 아주 멋지다. 이곳에 처음 출근한 날을 기억하나?
JULIEN DOSSENA(이하 JD) 다양한 이미지와 직접 그린 스케치로 가득한 아이디어 보드를 들고 출근했다. 사실 파코 라반 하우스로부터 러브콜을 받은 순간부터 2014 봄여름 컬렉션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출근 전부터 준비가 완료된 상태였다.

VK 그 아이디어 보드에는 어떤 이미지들이 붙어 있었나?
JD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 60년대 미국 <보그> 사진가 윌리엄 클라인이 감독한 66년작 영화 속 장면들, 프랑수아즈 아르디와 브리짓 바르도의 뮤직비디오 속 모습들이 있었다. 하지만 흔히 떠올리는 파코 라반 여성의 모습이 아닌, 새로운 ‘파코 라반 걸’을 제시하는 게 첫 컬렉션의 목표였다. 그래서 2014년 봄 컬렉션은 라반 걸들이 꼭 지녀야 할 기본 아이템들로 이뤄졌다. 실버 진, 봄버 재킷, 60년대풍 오버올, 페이턴트 미니 드레스 등등. 한 시즌이 지나면 못 입는 옷이 아니라 새로운 파코 라반 하우스에서 계속 가져갈 아이템들이다. 나만의 아카이브를 만들고 싶었다.

VK 첫 컬렉션 이후 꽤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쇼가 끝나고 리뷰를 확인하나?
JD 거의 모든 리뷰를 확인한다. 다른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니까. 이를 통해 내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됐는지 알 수 있다. 다들 이해하는 것 같아 기뻤다. 모델이 입고 무대에 섰을 때 ‘에지’ 있고 멋져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객의 입장에서 갖고 싶은 것도 중요하다. 패션으로서의 아름다움과 옷으로서의 기능성이 조화를 이루길 원했는데, 프레스들이 바로 그 점을 좋게 여긴 것 같다. 수지 멘키스와 같은 어린 시절 나의 영웅들로부터 인정받았다는 게 꿈만 같다.

VK 며칠 전, 가을 컬렉션 쇼가 끝나고 ‘스타일닷컴’에서는 “파코 라반의 상투적인 요소들을 모던하고 웨어러블하게 변화시킨 도세나만의 방식이 놀랍다”고 평했다.
JD 정확히 내가 의도한 부분이다. 파코 라반은 아주 뚜렷한 개성을 지닌 하우스였다. 이를 유지하면서도 동시대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는데, 과연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알 수 없었다. 방대한 아카이브가 있지만 일부러 그걸 보러 가지 않은 이유다. 물론 아카이브에 관심이 많고, 라반의 장인 정신이 담긴 그 드레스들을 둘러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카이브에 빠지기 시작하면 현실적 균형이 깨질 것 같았다. 그 대신 60년대 메탈 드레스 차림의 브리짓 바르도의 사진을 보는 식이다. 거기엔 실제로 드레스를 입고 거리에 나설 수 있었던 시대 분위기, 혁신적 여성상, 도전적 에너지 등이 담겨 있다. 그것들을 현재에 맞게 재해석했다.

VK 메탈 체인 드레스, 가죽 패치워크 조끼 등의 스타일링도 인상적이었다.
JD 색다른 아이템들도 스타일링에 따라 일상에서도 충분히 입을 수 있는 것들로 변신할 수 있다. 가령 오프닝 룩으로 나온 페이턴트 가죽 패치워크 조끼는 그 자체로 강렬하지만, 기본형 셔츠와 턱시도 팬츠와 매치하면 당장 거리에 나서도 어색하지 않다. 결코 과하게 차려입은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되기에 컬렉션 준비 과정에서 늘 덜어내고, 덜어내고, 또 덜어낸다.

VK 이번 컬렉션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룩은 어떤 것인가?
JD 오프닝 룩도 맘에 들고, 가죽과 니트 소재를 반반씩 섞은 재킷, 마지막 실버 스커트 시리즈도 마음에 든다. 사실 각각의 룩에는 저마다 마음에 드는 요소가 있다. 모두 내 자식 같아 하나만 고를 수가 없다. 하하!

VK 다음 컬렉션은 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JD 첫 컬렉션을 준비할 때는 ‘파코 라반 걸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질문에 집중하며 내가 하고 싶은 요소들로 씨를 뿌렸다. 두 번째 컬렉션을 준비하면서는 많은 새싹 중에 어떤 것들을 키워야 할지 더 많이 고민했다. 세 번째부터 나의 확실한 아이덴티티를 보여주게 될 것 같다.



VK 당신이 상상하는 라반 걸의 하루는 어떤 모습인가?
JD 그녀는 일을 아주 열심히 한다. 패션을 좋아하지만 옷을 과하게 입진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날의 자신과 어울리는 룩을 차려입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한 벌의 재킷과 리바이스 진만으로 멋지고 창의적일 수 있다.

VK 창립자인 파코 라반은 어떤 여성상을 그려냈다고 생각하나?
JD 프랑스적이고 혁신적이며 젊은 여성! 60년대 프랑스는 아주 독특했다. 옛것을 그대로 간직한 채 끝없이 새것을 추구했다. 라반은 “퇴보는 결코 있을 수 없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로 혁신적이었다. 그가 이야기한 젊음은 나이만 어린 게 아니라, 늘 활기찬 에너지를 의미했다.

VK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디자인 팀 역시 젊은 에너지로 충만한 듯하다.
JD 작년 가을 새롭게 팀을 꾸렸다. 나를 제외한 모든 디자이너 팀원들이 여자고, 나와 같은 또래, 즉 30세 전후다. 컬렉션이 완성되면 그들에게 좋은지 묻고, 사고 싶은지도 묻는다. 디자인이 아무리 훌륭해도 사고 싶지 않다면 의미가 없다. 다들 파코 라반이라는 이름을 원위치에 올려놓고 싶다는 마음으로 재미있게 일한다. 흥미로운 점은 디자인팀 어시스턴트들은 모두 남자라는 사실이다. 정말 페미니즘적인 팀 아닌가?

VK 당신은 게스키에르의 발렌시아가 팀에서 일했다.
JD 2008년부터 5년간 발렌시아가에서 일했다. 내겐 학교나 다름없었고,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니콜라스는 당대 최고 디자이너다. 그의 패션 세계는 누구와도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그가 발렌시아가를 떠날 때 나도 떠났다. 우리는 아주 작은 팀이었기에 당연한 선택이었다.

VK 패션 디자인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JD 나는 패션과 거리가 먼 아주 작은 마을에서 자랐다. 10대 시절만 해도 패션에 무관심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 눈에 띄는 모든 종이 조각에 그림을 그렸다. 커갈수록 순수예술에 대한 확신이 없어졌고, 심오한 척하는 순수예술과는 잘 맞지 않다는 걸 느꼈다. 그러다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당시 벨기에 디자이너들에게 미쳐 있었기에 브뤼셀의 캄브르 예술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할 때만 해도 패션 사진가나 아트 디렉터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림 그리는 즐거움 대신 옷을 직접 만드는 즐거움을 터득해버렸다.

VK 그럼 컬렉션 준비 과정에서 스케치도 많이 할 것 같다.
JD 그렇긴 하지만 모델에게 직접 옷감을 맞춰보며 작업하는 경우가 더 많다. 상상만으로 스케치한 룩을 살아 있는 모델에게 실제로 입혔을 때 얼마나 다르게 보이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각각의 아이템을 스케치한 뒤 제작해서 직접 입혀보며 전체적인 스타일을 완성해나간다.



VK 당신의 ‘아토’ 컬렉션은 파코 라반과 어떻게 다른가?
JD ‘아토’는 아버지 이름에서 따왔다. 발렌시아가를 떠난 후,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겠다고 생각했고, 쇼 대신 바이어를 위한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컬렉션을 선보이는 소규모 브랜드를 론칭했다. 두 시즌밖에 안 됐지만 전 세계 30개 매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내가 두 브랜드를 모두 해내고 있다는 사실이 아주 자랑스럽다. 파코 라반이라는 역사적 꾸뛰르 하우스를 재건하는 것과 아토라는 새로운 방식의 젊은 브랜드를 이끄는 건 전혀 다른 작업이다. 둘 다 정말 흥미롭다.

VK 두 브랜드 모두 여성복이다. 당신은 평소 어떤 옷을 입나?
JD 아주 기본적이고 클래식한 아이템들을 좋아한다. 아페쎄 데님, 꼼데가르쏭 티셔츠와 양말을 유니폼처럼 입는다. 최근에는 아미(Ami) 치노 팬츠가 마음에 들어 색상별로 구입했다. 물론 발렌시아가에서 일하던 시절에는 발렌시아가를 많이 입었다.

VK 직접 입진 못해도 좋아하는 브랜드가 있나? 디자이너로서 롤모델은 누군가?
JD 당연히 니콜라스 게스키에르! 그리고 레이 카와쿠보! 그녀의 창의적인 컬렉션도 훌륭하지만 비즈니즈 측면에서도 굉장하다고 생각한다. 매장에 들어서면 티셔츠부터 향수까지 그야말로 모든 걸 다 사고 싶다. 그리고 아제딘 알라이야! 그의 완벽한 재단은 볼 때마다 놀랍다. 세 사람 모두 스타일은 전혀 다르지만 독립적이며 개성이 뚜렷하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VK 당신의 하루는 이미 너무 바쁠 것이다. 자유 시간에는 뭘 하나?
JD 소설책 읽는 걸 무척 좋아한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은 모든 일과를 마치고 침대에서 독서를 즐길 때다. 전시도 자주 본다. 파리는 수많은 전시가 열리지만 한편으론 한정돼 있기에 런던이나 뉴욕을 방문할 때가 많다. 가끔 ‘DVD 데이’를 정해 하루 종일 다큐멘터리를 볼 때도 있다. 하지만 모든 건 파코 라반에서 일을 시작하기 전의 이야기다. 지금은 일만 하기에도 벅차다.

VK 당신은 전혀 지쳐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즐거워 보인다.
JD 지금으로서는 파코 라반 하우스가 잘되길 바랄 뿐이고, 그 작업을 내가 주도한다는 사실이 뿌듯할 뿐이다. 파코 라반 하우스가 명성에 걸맞은 위치에 다시 올라설 수 있길 원한다. 메탈 미니 드레스로 유명한 브랜드라고 기억되는 대신, 패션을 좋아하는 여자들이 입고 싶어 하는 하이패션 하우스로 성장시키고 싶다. 쿨하고 건축적이며 세련된 룩들로 가득한 그런 브랜드 말이다.

VK 지난 두 번의 컬렉션을 보면 제대로 된 트랙에 들어선 것 같다.
JD 그렇게 봤다니 정말 고맙다. 우리 디자인 팀에서 샴페인을 준비했다. 파코 라반과 <보그>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