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룡의 열렬한 生

매혹적인 카사노바였다가 여섯 살 아이가 되었던 그가
이번에는 뱃가죽에 복근을 새기고 나타나 해사하게 웃는다.
생의 보통날들을 치열하게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배우들이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이라고 말하며.

거친 가죽 워싱의 라이더 재킷은 씨와이 초이(Cy Choi), 빈티지한 티셔츠는 H&M, 그레이 코튼 팬츠는 폼 덱스프레시옹(Forme D’expression at Blush).

지금 한국 영화계에서 류승룡의 존재는 아주 특별한 것이다. 나라 안팎의 이런저런 붐 덕분에 노래하는 꽃미남들이 TV와 스크린을 장악한 지금, 그야말로 세월이 직조한 원숙한 연기에 진한 매력까지 갖춘 ‘꽃중년’ 배우들의 등장은 가뭄 끝에 단비였다. 그 한복판에 류승룡이 있었다. 뒷모습으로도 말을 건네는 목덜미와 우직한 등의 라인, 낮고 단호한 음성과 까칠한 수염, 대사와 대사 사이의 공간을 관능적으로 채우는 호흡과 눈빛까지 갖춘 그의 존재는 그야말로 ‘새로운 종’의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재밌는 건 그를 향한 환호가 전 방위적인 것이라는 데 있었다. 덥수룩한 수염이라면 기함부터 하던 여자들은 ‘더티 섹시’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헌사했고, 웬만한 캐릭터엔 눈썹도 까딱 않던 마초들은 ‘남자가 봐도 멋진 남자’라고 엄지를 들어 인정했다. 그뿐인가. 드라마 <개인의 취향>에서 젊은 건축가를 짝사랑하는 미술관 관장으로 등장했을 때는 일군의 게이 커뮤니티에서도(희화화되기는커녕 누가 봐도 갖고 싶어지는 성소수자의 등장이 얼마나 반가웠을까!) 달뜬 환호를 보냈다. 주요 영화제에서 다양한 상을 섭렵한 데 이어 일일이 기억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광고 출연까지, 인생의 가장 화려한 봄날을 맞이하고 있는 이 남자는 공인된 ‘대세 배우’로서의 삶을 화끈하게 즐기고 있을까?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저는 이 행복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합니다. 정말 기쁘고 감사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언젠가 대본이 단 하나도 오지 않는 그런 날이 오겠지요. 그렇다고 늘 쫓기는 심정으로 살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어진 일들을 최고로 즐기며, 매일매일 최선을 다하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이런! 유쾌한 ‘행복의 변’을 듣고 싶었는데 진득한 인생관이 되돌아왔다.

코튼 소재 롱 카디건은 율리우스(Julius at O’bjekt), 가죽 베스트는 씨와이 초이(Cy Choi), 면 소재 티셔츠는 고어(Goer at Movement), 끈 장식의 코튼 팬츠는 릭 오웬스(Rick Owens), 가죽 워커는 구이디(Guidi at O’bjekt).

그러니까 그의 표현대로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즐기는 것’이야말로 환호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 류승룡식 대처법이다. 오랫동안 별러왔던 ‘본격’ 몸의 연기를 준비하는 과정도 그랬다. 그는 4월 말 개봉하는 영화 <표적>에서 의문의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된 주인공 여훈 역할을 맡아 쉴 새 없이 쫓고 쫓긴다. 데뷔작 <고사: 피의 중간고사(2008)>를 통해 공포마저 감각적으로 시각화하는 천부적 재능을 선보였던 창감독은 제대로 된 드라마와 격렬한 액션이 믹스된 새로운 종류의 액션물을 창조해낼 주인공으로 류승룡을 택했다. 드라마 <나인>을 통해 열정적인 마니아들을 거느리게 된 이진욱, 류승룡과 함께 중년 연기자 전성시대를 열고 있는 유준상, 김성령도 합류했다. 누명을 쓴 채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달리는 그가 믿을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몸뚱이뿐! 몸의 조형을 위해 난생처음 5개월간의 피 말리는 몸 만들기에 들어갔고, 수많은 미디어에 의해 공개되었다시피 45년 생애 최초로 복근이란 것을 만들었다.

“시나리오를 본 순간 느낌이 왔어요. ‘이건 몸이 우선이다.’ 배우에게 몸은 악기입니다. 어떤 때는 몸을 울리는 관악기이고, 어떤 때에는 현란한 멜로디를 뽑아내는 현악기여야 해요. 캐릭터에 따라 꾀꼬리처럼 노래하는 플루트가 되었다가 지축을 울리는 호른이 됩니다. 이번에는 날아갈 듯 가볍고 날렵한 악기가 필요했습니다. 지방은 물론 불필요한 독소까지 날려버리는 식이 조절을 시작했죠. 극 중 캐릭터가 용병 출신이라 독한 액션 트레이닝도 병행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했죠. 하지만 힘들면 힘들수록 ‘좀더’를 외치며 즐겼습니다. 연기에 필요한 완벽한 몸을 얻기 위한 행복한 고행이었죠.”

자글자글한 주름의 니트 카디건은 포엠 보헤미안(Poème Bohémien at O’bjekt), 카키색 저지 티셔츠는 크로니클스 오브 네버(Chronicles of Never at Blush), 지퍼 장식 블랙 팬츠는 스톤 아일랜드(Stone Island), 가죽 워커는 캐롤 크리스찬 포엘(Carol Christian Poell at O’bjekt).

그가 몸을, 정확히 말해 ‘신체’를 사용할 줄 아는 배우라는 사실은 촬영장에서 어김없이 드러났다. 이번 영화에서 그랬듯이 스스로 표적이 된 그는 카메라는 물론이고 지나가던 행인들의 시선까지 자신을 따라오게 만드는 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최신 유행하는 개그 신조어들을 늘어놓으며 능청을 떨다가도 촬영이 시작되면 팔다리가 먼저 반응하기 시작했다. 조명이 터질 때마다 온몸의 근육과 손끝, 발끝, 입술 근육과 눈썹의 각도까지 마음껏 움직이는 이 남자는 배우라기보다 무용수 같다. “여기 계단에 거꾸로 누워보고 싶어요. 한 손으로는 태양을 가리고 하늘을 바라볼게요. 고꾸라질까봐 걱정하진 마세요.” 옷의 구조와 패브릭의 디테일을 이해하고 즉각 표현해낼 때는 캣워크를 누비는 영민한 모델 같은 면모도 풍겼다. 거기에 관객들에게 배우 류승룡을 각인시킨 그 백만 불짜리 눈빛! “촬영하는 게 즐거워요. 인생의 그래프 중에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한 점을 기록하는 일이니까요. 오늘의 내 모습, 이 감정이 이미지로 기록된다니 얼마나 근사한 일이에요. 독창적이고 특이한 작업일수록 흥분됩니다. 이거야말로 배우로 사는 즐거움 아니겠습니까?” 촬영이 끝나자 지나가던 행인들 쪽에서 탄성에 가까운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좀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에게 연기는 치유이자 구원이었다. “어린 날 저는 좀 우울한 아이였어요. 시행착오가 유난히 많았죠.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할까, 나는 왜 다리가 짧을까? 해결되지 않을 고민과 공포로 허우적거리던 시기가 있었죠. 고등학생이 되고 본격적으로 방황을 했는데 교화 차원에서 연극반으로 보내졌어요. 그런데 그게 나를 바꿔놓았죠.” 무대라는 공인된 장에서 분노와 욕망을 표출할 수 있는 기회를 찾은 그는 자연스럽게 배우가 되겠노라 마음먹었고, 재수 끝에 연극과 학생이 됐다. 하지만 알려졌다시피 꽃중년 대세남이 되기까지 그는 꽤 오랜 무명 시절을 보냈다.

아방가르드한 디자인의 블랙 티셔츠는 팝이슈(Pop Issue at Blush), 불에 그을린 듯한 펠트 모자는 알렉산드르 마나미스(Aleksandr Manamis at O’bjekt), 체인 장식 가죽 팔찌는카스트로 엔와이씨(Castro NYC at Blush), 반지는 베르크슈타트 뮌헨(Werkstatt München at O’bjekt).

대학 졸업 후 5년 동안 넌버벌 뮤지컬 <난타> 무대를 종횡무진하다가(호소력 짙은 음성과 천재적인 감정 전달 능력을 가진 그에게 대사를 거세당한 그 시절은 어쩌면 형벌이었는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연기를 해보겠다고 영화판에 나왔을 때, 그를 찾아주는 감독은 대학 동문인 장진 감독뿐이었다. 연기보다는 온갖 아르바이트를 주업 삼아 젊은 날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그 시간들마저도 ‘배우가 되는 시간’이었다고 표현했다. “물론 열등감과 피해망상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회식 자리에 가도 주연배우들 근처에는 안 가고 먼 곳에 멍하니 앉아 있곤 했지요. 하지만 그 시절에 생의 희로애락, 슬픔과 고독 같은 감정들을 온전히 체득한겁니다.” 그 시간들을 기꺼이 견디자 마침내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믿을 수 있는 배우’라야 해낼 수 있는 역할들(깡패와 조폭, 형사와 국정원 직원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개성파 캐릭터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동시에, 비슷한 방식으로 소비되다가 ‘맛깔나는 감초’로 사라지지 않기 위해 더 노력해야 했다. 아니, 전력을 다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최종병기 활>에서는 청나라 장수 쥬신타 역으로 변발한 채 악역 연기의 정점을 찍었고,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는 요란하지 않게 정중동을 표현해내는 기막힌 존재감으로 혁명가 허균을 완벽하게 그려냈다. <내 아내의 모든 것>의 장성기는 오일리한 카사노바가 아니라 여성의 감성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아름다운 영혼이었고, <7번방의 선물>의 여섯 살 용구는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심금을 울렸다. “변신에 대한 특별한 감각은 없습니다. 그저 TV와 영화를 종횡무진, 쉬지 않고 넘나드는 동안 균형감이라는 것이 생긴 거겠지요. 늘 잊지 않으려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면 연기는 기싸움이 아니라 기를 주고받는 행위라는 겁니다. 기와 자존심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연기는 구기 종목이에요. 예를 들어 이병헌과의 연기는 테니스 같았어요. 적당한 힘과 긴장을 유지한 채 서로의 기를 주고받았지요. 이선균 씨와의 연기는 길고 아슬아슬한 랠리를 주고받는 탁구와도 같았습니다. <7번방의 선물> 때는 남자 핸드볼이라고 할까요? 그 누구도 튀지 않으면서 현란한 패스워크를 주고받았지요. 어떠한 경우에도 내가 아니라 우리가 빛나야 합니다.” 아, 그의 연기는 어쩌면 좋은 배우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선한 마음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글자글한 주름의 니트 카디건은 포엠 보헤미안(Poème Bohémien at O’bjekt), 지퍼 장식 블랙 팬츠는 스톤 아일랜드(Stone Island), 가죽 워커는 캐롤 크리스찬 포엘(Carol Christian Poell at O’bjekt).

그에게서 성공의 유통기한을 늘리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기미를 찾아볼 수 없어 다행이었다. 오히려 그는 지금, 아주 여유로운 마음으로 평범한 행복을 누리는 데에 열중하고 있다. “마흔다섯이 된 지금도 내 마음속에는 소년이 살아 있고, 호기심과 모험심도 왕성합니다. 나 자신을 완벽하게 컨트롤하고 싶지만 자유 또한 꿈꾸지요. 하지만 자꾸 불평을 얘기하려는 혀를 가까스로 붙잡고 ‘보통의 행복’을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달뜬 환호 속에서 평범의 위대함을 좇는 이 배우야말로 얼마나 비범한가! 삶의 보통날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그가 표현해내는 생의 표정들을 오래도록 지켜볼 수 있기를 바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