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강국, 이탈리아

놀라운 장인 정신, 타고난 스타일 감각, 환상적인 영화배우, 그리고 열정적이고 아름다운 사람들까지!
이탈리아가 패션 강국인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2007년 로베르토 카발리의 드레스를 입은 케이트 모스.

미국인들이 스포츠웨어에서 최고이며, 영국인들이 혁신적인 측면에서 타의 추종의 불허한다면, 프랑스인들의 시크함 역시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탈리아인들은? 당연히 글래머다. 누구도 이탈리아인처럼 화려할 수 없다. 그건 타고난 것이다. 건성으로 하는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탈리아인들은 어떤 것도 건성으로 하지 않는다. 도나텔라 베르사체는 이렇게 요약한다. “저는 이탈리아 여자예요. 그건 제 핏속에 흐르고 있어요. 제가 디자인하는 방식에도요. 그건 저의 유산 중 하나입니다. 열정, 에너지, 컬러, 요란함! 이탈리아에선 모든 게 그렇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런던 역시 이런 이탈리아 감성에 흠뻑 젖어 있다. 45년부터 현재까지 이탈리아 패션의 탄생을 총망라한 전시 <The Glamour of Italian Fashion>이 V&A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4월 5일부터 7월 27일까지). “이 주제가 이처럼 깊이 탐구된 적은 없어요”라고 20세기와 현대 패션을 담당하는 큐레이터 소네트 스탠필이 말을 꺼냈다. “이번 전시에는 이탈리아인들도 모르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탈리아 패션(글래머, 가운들, 그리고 현란함)은 전후 유럽의 우울한 시절에 탄생했다. 51년 귀족 사업가였던 지오반니 바티스타 지오르지니(Giovanni Battista Giorgini)는 이탈리아 전역의 재단사들과 드레스 장인들(에밀리오 푸치, 폰타나 자매, 로베르토 카푸치 등)의 작품을 모아 피렌체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패션쇼를 열기로 했다. 전쟁 전에 그는 미국의 여러 백화점에서 바이어로 일했기 때문에 미국 시장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거금을 쓸 만한 낙천적인 바이어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하기도 했다. 지오르지니는 이탈리아 패션의 경제적 잠재력을 알아본 최초의 인물이었다. “지오르지니는 디자이너들에게 ‘쇼를 열 계획입니다’라고 적힌 편지를 보냈고 그들 모두 참석했습니다”라고 스탠필은 설명했다. “당시는 전 세계 바이어들이 여전히 배를 타고 유럽으로 오던 시대였다는 걸 기억해야 해요. 그래서 지오르지니는 그들을 초대하기 위해 엄청난 볼거리를 준비해야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쇼장으로 선택한 곳은 바로 샹들리에 조명이 환하게 빛나는 피티 궁전의 ‘살라 비앙카(하얀 방이라는 뜻)’. “쇼는 며칠 동안 계속됐습니다. 그는 손님들에게 와인과 식사를 대접하고 그들이 이탈리아 귀족들과 어울릴 만한 세련된 행사를 정기적으로 열었습니다. 아주 사적이고 화려한 행사였어요.” 지오르지니는 파리의 살롱 프레젠테이션(그때까지 패션계를 지배하던)이 끝난 직후 피렌체의 패션쇼 스케줄이 이어지도록 바이어들을 설득했고, 그 행사는 곧 패션 위크 일정의 일부가 됐다.

영화 산업도 이탈리아 패션이 세계 무대로 진출하는 데 한몫했다. 좀더 저렴한 비용과 더 화창한 날씨의 유혹에 할리우드 감독들과 세계적인 스타들은 이탈리아의 유명한 시네시타 스튜디오로 향했다. 도시 자체가 야외 세트장이 됐다. “영화는 이탈리아 패션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어요. 처음으로 세계인들이 우리 고향을 보게 된 겁니다”라고 로베르토 카발리는 회상했다. 반짝이는 여신 드레스들로 이뤄진 그의 현재 컬렉션 의상들은 이탈리아 영화 제작 황금기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당시는 경제 붐이 일던 시대였어요”라고 로베르토 카푸치, 크리지아에서 일하다 2005년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한 지암바티스타 발리는 말한다. “위대한 이탈리아 여배우들의 시대였죠. 저는 특히 미국 출신의 이탈리아 백작 부인 콘수엘로 크리스피와 모니카 비티에게 집착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고향 로마에서 성장할 때 이상적인 여성상이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부터 90년 에 실린 에밀리오 푸치 룩. 55년 지오르지니가 피렌체에서 열었던 패션쇼. 69년 에 등장한 밀라 쇤 룩. 2008년 에서 프라다 룩을 입은 제시카 스탬. 67년 불가리 주얼리를 착용한 엘리자베스 테일러.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은 당시 상황을 완벽하게 활용했다. 특히 세상 물정에 밝았던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로마의 휴일>의 스타 오드리 헵번을 자신의 피렌체 매장에 초대해 쇼핑하게 했다. 그리고 그것을 홍보하기 위해 사진작가를 참석시켰다. 사진작가들이 떼를 지어 모페드(모터 달린 자전거)를 타고 속도를 냈고 페데리코 펠리니의 <라 돌체 비타>를 통해 ‘파파라치’라는 용어가 탄생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의 삶도 마찬가지. 그들은 발렌티노 가라바니를 방문해 피팅을 하고 다른 사람들이 식료품 매장에서 장을 보듯 아무렇지 않게 값비싼 보석을 사러 비아 콘도티에 있는 불가리 매장에 들어갔다 나오는 등 로마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당시 버튼은 “리즈가 아는 유일한 이탈리아어는 불가리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어쨌든 여러 미국 스타들이 이탈리아의 신인 꾸뛰리에와 주얼리 디자이너의 컬렉션 의상을 구입하기 시작하면서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은 누구나 다 아는 이름이 되었고 ‘메이드 인 이탈리아(80년대 공식적으로 도입된 용어)’는 고급스러움의 상징으로 전 세계 사람들의 욕망에 불을 지폈다. “저는 당시 글래머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정확히 모릅니다”라고 스테파노 가바나는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유명한 미국 스타들이 이탈리아가 유쾌하고, 옷도 더 잘 입는 나라라는 걸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이런 현상의 절정은 66년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트루먼 카포티의 가장무도회였다. 세계에서 가장 옷 잘 입는 두 여인 마렐라 아넬리와 리 래지윌 공주가 그 행사를 위해 이탈리아 디자이너 밀라 쇤(Mila Schön)을 선택하는 일이 벌어진 것.

70년대는 이탈리아 기성복 브랜드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패션 수도가 피렌체에서 밀라노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70년 미우치아 가족 사업에 합류한 프라다는 78년엔 어머니 루이자로부터 회사를 물려받았으며 1년 후에 나일론 백팩을 내놓았다. “멋진 것을 만들고자 하는 열과 욕망이 있었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구축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75년 자신의 첫 컬렉션을 론칭한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회상했다. “놀라운 시대였습니다”라고 베르사체도 동의했다. 그녀의 오빠 지아니는 80년대 초 이탈리아 패션에 완전히 새로운 언어를 창조했다. 요란한 색상, 짧은 헴라인, 눈부신 장식들! 그리고 대담하고 관능적인 브랜드들이 폭발적으로 등장했다. 로메오 지글리, 돌체앤가바나, 톰 포드가 이끌던 구찌(그는 기울어가던 하우스의 운명을 되돌려놓았다) 등등!

브랜드들이 강력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명성은 수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장인 정신, 전문적인 테일러링, 고급스러운 텍스타일제조업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가령 프라다는 1913년 밀라노의 작은 가죽 제품 매장으로 시작했다). “이탈리아 패션은 크든 작든 기술이라는 유산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라고 아르마니는 설명했다. 이탈리아에선 전문적인 장인들로 가득한 공장과 작업장들이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코모의 경우 실크 생산과 직조, 토스카나는 가죽, 베네치아는 울로 유명하다. 51년에 아킬레 마라모티가 설립한 막스마라는 품질에 중점을 두고 의복을 대량생산한 최초의 기업 중 하나다. “그는 품질이 뛰어난 소재에 사로잡혀 있었어요”라고 스탠필은 말했다. “그의 목표는 캐시미어를 대량 공급하는 것이었죠.” 스테파노 가바나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탈리아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우리는 국내에서 제품을 생산하고 있어요. 이탈리아야말로 가장 재능 있는 장인들을 찾을 수 있는 곳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입니다.” 도메니코 돌체가 말을 이었다. “장인들을 선발할 때 알타 모다 컬렉션을 생각하면서 폭넓은 리서치를 합니다”라고 그는 최근 론칭한 꾸뛰르 라인을 언급하며 말했다. “우리는 자수를 책임지는 새로운 팀을 구성했어요.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새로운 테크닉을 개발했습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92년 에 실린 지아니 베르사체의 화려한 진 수트. 54년 살바토레 페라가모와 오드리 헵번. 97년 트레비 분수 앞에서 모델들과 포즈를 취한발렌티노 가라바니. 97년 도메니코 돌체와 스테파노 가바나. 87년 에 등장한, 조르지오 아르마니 수트를 입은 크리스티 털링턴. 2003년 에 실린 미우치아 프라다의 모습.

이탈리아 패션 제국만의 또 다른 특징은 가족이 운영하는 긴밀한 조직 구조다. “오빠와의 작업은 제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권이었어요”라고 베르사체는 회상했다. “그래서 제 이름을 내건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사실이 아주 자랑스럽습니다. 다른 곳에서 작업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관점을 시도하고 그것에 제 스타일을 맞추는 건 상상할 수 없어요.” 카발리 역시 동의했다. “제 사업은 완전히 가족적입니다.” 그의 아내 에바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며 두 사람의 자녀 토마소, 크리스티나, 라첼레는 각각 와인, 고객, 그리고 액세서리 부문을 책임지고 있다. “우리는 아주 열심히 일하며 서로의 능력을 매우 존중합니다. 패션이 핏속에 흐르면 창의력에 도움이 되고 구성원 간의 결속력은 더할 나위 없이 강합니다.” 안젤라 미쏘니도 같은 의견. “가족 사업일 경우 그것은 유산이 됩니다. 감정적인 헌신이 가능하지요.” 그것은 미쏘니 가족 구성원들이 정기적으로 등장하는 광고 캠페인을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가족적인 분위기가 불리할 때도 있다. 재능 있는 신인이 자라나기 힘든 환경이라는 것. 신인 디자이너에게 이탈리아는 진출하기 쉬운 곳이 아니라는 의미다. 다른 패션 도시들과 비교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런던에서는 젊은 디자이너들에 대한 지원이 확실하고 그것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집니다”라고 가바나는 설명했다. “영국은 늘 실험에 개방적이었어요.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말이에요. 그건 패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영국 DNA의 일부죠. 이탈리아 DNA는 과거 전통에 묶여 있어요. 실험은 이탈리아인의 행동과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보그>의 프랑카 소짜니가 진두지휘하는 <Who is on Next> 같은 프로젝트와 이탈리아계 아이티 디자이너 스텔라 진(Stella Jean) 같은 신예 스타를 지원하고 있는 아르마니 같은 거물급 디자이너들 덕분에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젊은 디자이너들을 지원하고 장기적으로 그들을 장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라고 베르사체는 말했다. “그들이 성장하고 발전하도록 돕는다면 언젠가 그들은 자신의 라벨을 시작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패션을 변화시킬 겁니다. 지원, 헌신, 시간이 함께한다면 우리는 밀라노 캣워크에 젊은 패션이 돌아오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