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가 된 모델

모델이 아이돌 그룹 뺨치는 유명 인사가 되자, 모델 이후 삶이 궁금해졌다.
그중 몇몇은 액세서리 디자이너나 배우로 거듭나는 중.
요즘엔 자신에게 옷을 입혀주던 패션 에디터로 터닝하고 있다.



어느 영역에든 위인 대우를 받는 인물에 관해 귀가 쫑긋할 뒷얘기가 있다. 패션계에도 구전동화처럼 전해오는 이야기가 많다. 이브 생로랑과 칼 라거펠트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 빗대거나, 코코의 절절한 남성 편력, 그레이스 코딩턴의 모델 시절 등등. 그중 코딩턴은 전 세계 패션 프레스 상위 1%에 드는 슈퍼 스타일리스트지만 60년대만 해도 영국의 톱 모델이었다. 노만 파킨슨의 앵글 앞에서 옷을 입고(‘입히고’가 아니다!) 폼 잡던 그녀가 교통사고로 일을 오래 쉰 다음 복귀할 땐, 당시 모델로서 거의 은퇴 시기. 그녀의 끼를 눈치챈 영국 <보그> 편집장 베아트릭스 밀러는 코딩턴에게 패션 에디터 자리를 제안했다. 압축된 몇 문장만으로 ‘패션 에디터가 된 패션모델의 일대기’를 다 전할 순 없으나, 그녀가 일류 모델이었다는 과거사는 패션 전설 가운데 하나다.

그로부터 50여 년 뒤인 지금, 영국 출신 A급 모델로 요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에디 캠벨에게 그레이스 코딩턴과 비슷한 각본이 전개될까? 에디 캠벨을 발굴해 키웠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 러브 매거진의 편집장 케이티 그랜드가 자신의 SNS에 에디를 객원 에디터로 발표했다(케이티는 마크 제이콥스, 자일스 디컨, 조나단 선더스 등에게 영감을 주는 스타일리스트로, 콘데나스트 출판사를 통해 잡지를 내는 당대 패션 거물이다). “에디는 훌륭한 작가(writer)예요. 그녀가 우리를 위해 일하게 돼 정말 기쁘군요.” 그녀는 스타일리스트가 아닌 ‘라이터’로 에디를 지목했다. “정말 똑똑하고 재능이 넘치는 모델이에요.” 에디는 그 유명한 세인트폴 여학교 출신으로 작년엔 미술사에 관한 한 세계 최고 중 하나인 코톨드 인스티튜트에서 미술사 학사 학위를 받은 재원. 당시 그녀의 소감은? “별생각 없어요. 언젠가 진지한 직업을 가질 때 유리할 것 같긴 해요.” 에디로 치면 건축가 소피 힉스가 엄마요, 모델 겸 배우인 올림피아를 자매로 뒀다. 게다가 엄마는 <하퍼스&퀸> <보그> <태틀러>에서 패션 에디터로 일한 적 있다. 엄마가 패션 에디터에서 건축가로 ‘턴’했다면, 딸은 모델에서 패션 에디터로 ‘턴’한 셈.

그런가 하면 슈퍼스타 케이트 모스 역시 얼마 전 패션 에디터 명함을 팠다. 데뷔 후 탑샵 콜라보레이션을 기념해 출현한 5월호까지, 무려 34차례 표지를 자신에게 할애한 영국 <보그>를 위해 객원 기자로 일하게 된 것(편집진 명단을 피라미드 구조로 표기한 마스트헤드 지면에 그녀의 이름이 케이트 펠란과 함께 ‘컨트리뷰팅 패션 에디터’로 올라 있다). 편집장 알렉산드라 슐만은 “케이트가 우리와 함께 일하게 돼 말할 수 없이 기뻐요”라며 작년 10월 <데일리 텔레그래프>를 통해 동네방네 소문냈다. “그녀는 의심의 여지 없이 멋진 스타일 감각을 갖고 있어요. 깊이 있는 패션 지식에다 어떤 이미지가 훌륭하고 그게 <보그> 지면에서 어떻게 하면 제대로 드러날지 잘 알죠. 그녀와 함께 일하길 너무 기다렸답니다.” 그리하여 지난 3월호 영국 <보그>에 케이트 모스의 패션 에디터 데뷔작이 실렸다. 촬영은 머트 앤 마커스, 모델은 다리아 워보이! 화보 첫 장에 실린 전문엔 ‘<보그>의 뉴 패션 에디터, 케이트 모스’라고 크게 기록돼 있다.



그레이스 코딩턴 외에 토니 굿맨, 카밀라 니커슨, 카린 로이펠트, 엠마누엘 알트 등은 패션 쪽에서라면 누구라도 엄지를 치켜올릴 만한 패션 에디터이자 스타일리스트다. 그러나 아주 오랜 과거사를 뒤져보면, 그들은 카메라에 한쪽 눈을 대고 뒷모습을 보이는 사진가 옆에서 팔짱 끼고 서 있지 않았다.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토니 굿맨이 모델이었다고? <보그> 신상털기가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궁금하다면, 구글 검색창에 ‘Tonne Goodman’이라고 쳐보시라. 그녀가 출현한 70년대 <보그> 흑백사진이 눈에 띌 것이다. 알트? 유튜브를 통해 94 F/W 고티에 패션쇼 영상을 검색해보시라. 그녀가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 게 보인다. 사실 그녀는 1960~70년대 랑방과 니나 리치 모델이었던 엄마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저의 첫 캣워킹은 86 F/W 고티에 쇼였어요. 열아홉 살 때였죠.” 그런 뒤 스물일곱 살 때 다시 고티에 쇼에 서봤으나, 사진과 스타일 만드는 일이 더 좋아 모델은 미련 없이 포기했단다.

현재 이름 날리는 패션 에디터들의 뒤를 캐다 보면 재미있는 일화가 한두 개가 아니다. 셀린, 맥퀸 등의 성공 덕분에 인기가 하늘로 치솟는 카밀라 니커슨은 또 어떤가. <젠틀우먼> 올 봄호에 실린 그녀의 특집 인터뷰 서두엔 이런 에피소드가 기록돼 있다. “카밀라 니커슨은 패션계에 일찍 발을 디뎠다. ‘열네다섯 살쯤 학교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에디 캠벨의 엄마에게 스카우트됐어요.’ 그녀가 소피 힉스(당시 영국 <보그> 패션 에디터)와의 우연한 만남에 대해 이야기한다. 며칠 뒤 그녀는 어느 이름 모를 일본 디자이너(곧 패션계의 상상력을 잡아낼)의 과장된 드레스를 입고 촬영했다. ‘그녀의 이름은 레이 카와쿠보였죠.’” 그러면서 꼼데가르쏭을 입고 촬영하던 중 자신을 흥분시키는 뭔가를 발견했다고 덧붙인다. 옷과 헤어와 메이크업과 사진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것! “패션 에디터라는 게 요즘처럼 전도유망한 직업이 아니던 시절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금방 알았죠. 이게 제가 하고 싶어 하던 바로 그거라는 걸!”

이 여인들이 다들 왜 그렇게 키가 컸나 싶었더니 아닌 게 아니라 모델 이력 때문이지 싶다. 그들만큼 마르고 훤칠하며 매력적인 모델을 꼽자면? 애냐 루빅 역시 얼마 전 패션 에디터가 됐다. 에디나 케이트와 다른 점이라면, 자진해서 패션 에디터가 된 케이스. 그녀는 2012년 6월부터 <25> 매거진에 합류했다. 여자의 관점으로 에로티시즘을 해석한 이슈는 모두 여자 사진가들에 의해 촬영됐다. 엠마 서머튼, 애니 레보비츠, 파올라 쿠닥키, 코린 데이 등등. 아울러 리야 케베데, 이네즈 반 램스위어드, 엘레트라 비더만, 록산느 로윗 등 패션계에서 힘 좀 쓰는 여인들이 취재 대상. 애냐는 이를 직접 기획하고 친구들에게 취재를 맡겼다. 한마디로 패션 에디터 그 이상의 편집장 역할을 맡은 것. 2010년쯤 그녀는 오스트리아에 사무실을 둔 <25> 발행인의 요청으로 이 일에 뛰어들었다. 그 후 화보 촬영과 레이아웃은 물론 스태프들을 꾸리는 등 전반적인 편집 업무에 개입했다. “몇 달 안에 잡지는 새 모습으로 바뀌었죠. 저는 모든 과정을 즐겼어요. 실제로 <25> 덕분에 상도 많이 탔고요. 나중에 발행인 친구가 자신은 잡지 일이 싫어졌으니, 원하면 ‘25’란 이름을 가지라고 하더군요!” 다시 말해, 과거의 이름으로 새로운 잡지를 창간한 그녀다.



애냐 루빅보다 친근한 이미지와 인형처럼 깜찍한 외모로 패션 피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코코 로샤 역시 에디터가 됐다. 몇몇 방송 프로그램을 위해 마이크를 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취재기자도 겸한 그녀이기에 기자로 종횡무진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패션 에디터가 아니다. 뜻밖에도 하이테크를 다루는 잡지. 작년 여름, 매거진에 합류한 코코에겐 자신만의 칼럼이 따로 마련됐다(pcmag.com/authorbio/coco-rocha에는 구글 글래스 기사를 비롯, 현재까지 기사 네 개가 올라왔다). “하이패션 모델이 하이테크 잡지에 글을 쓴다는 게 좀 어색할지 모르지만, 사실 저는 새로운 하이힐보다 태블릿 신제품 사는 걸 좋아해요!” 첫 칼럼 취재를 위해 그녀는 뉴욕의 3D 프린팅 회사 ‘Shapeway’에 들렀다. “3D 프린팅이 패션계에 어떤 혁명을 일으킬지 궁금하지 않나요?” 궁금해요, 코코! “공급과 수요 면에서 급격한 변화가 있을 거 같아요.” 조만간 콘데나스트 소속 <와이어드>지에서도 그녀의 패셔너블한 이름을 보게 되지 않을까. 모델에서 테크놀로지 저널리스트로 거듭나고 있는 그녀가 팬들에게 바라는 건? “패션과 테크놀로지는 분명 공생할 길이 있습니다. 이런 제 신념을 독자들도 충분히 이해했으면 좋겠군요.”

서울에서도 모델 남보라 양이 패션 에디터가 되어 카메라 앞뒤를 넘나들며 일하는 중. 2005년쯤 일명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모델이 된 이 늘씬한 아가씨는 자신이 주인공인 촬영장에서도 누가 사진을 잘 찍는지, 이번 트렌드는 뭔지, 어디서 촬영하는지가 더 궁금했다고 털어놓는다. “사진가 김현성이 내는 컬처 매거진 <오 보이> 창간 때부터 모델 일을 겸하며 편집 업무를 도왔어요. 처음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닌데, 잡지 한 권이 제작되는 과정이 흥미로웠죠.” 현재 그녀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팅 그룹 JOH에서 발행하는 매거진 에서 기자로 일한다. “모델을 통해 새로운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면, 기자들에겐 이런 경험과 시각을 기획할 즐거움이 주어져요. 그림 그리는 상황을 예로 들면, 기자는 어떤 그림을 그릴지 정하고 밑그림을 그립니다. 모델은 붓이 되어 물감을 적신 뒤 섬세하게 붓 자국을 남기고. 어떤 붓을 쓸지 정하는 건 기자의 몫이죠!”

모델이 기자가 된 현상을 쭉 지켜본 패션지의 몇몇 어른들은 “모델이 지적이지 않다는 편견은 말도 안 되는 난센스”라고 지적했다. 이제 아이리시 댄서 출신으로 고티에 쇼에서처럼 켈틱 댄스를 추듯 통통 튀며 하이테크와 하이패션의 경계를 넘나들 코코 로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과 퀭한 눈빛으로 페이지를 배열할 애냐 루빅, 모델보다 더 멋지게 빼입고 후배 모델들을 호령하며 화보를 진행할 케이트 모스…. 팬들이라면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을 장면 아닌가? 그러니 올가을 여러분은 <러브> 매거진에서 패션 기사를 읽은 뒤 ‘이 기똥찬 필자가 누구야?’ 하는 맘으로 크레딧을 확인해보자. ‘에디터 / 에디 캠벨’이라 적혀 있을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