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트렌드

패션, 보통 사람들에 주목하다

2016.03.17

by VOGUE

    패션, 보통 사람들에 주목하다

    눈에 보이는 미의 기준을 극단으로 밀어붙일 때, 패션계는 진짜 아름다움이 뭔지 깨닫는다.
    그리고 이제 ‘진짜’를 보여주기 위해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보통의 존재를 향해 눈을 돌리고 있다.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에는 별의별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다 나온다. 나이 마흔에 뮤지컬 배우가 되려는 사람, 목에 철심을 박고도 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33세 남자, 가족이 울며불며 뜯어말려도 트로트 가수가 되고 말겠다는 가장, 주차장의 자동차만 보면 달려가 포즈를 연습하는 레이싱 모델 지망생 등등. 55kg이 넘는 몸무게에 키가 170cm도 안 되는 누군가가 “난 패션모델이 될 거야!”라고 말한다면, <안녕하세요>의 출연자들에게 느끼던 것과 비슷한 감정을 갖게 될 듯.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해 이런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지 모른다. “도대체 가당키나 하니?”

    그러나 절대 일어나지 않을 듯한 일이 실현되는 것이 최근 패션계 상황이다. 예전 같으면 끔찍하게도 높은 미의 기준 탓에 패션계는 쳐다보지도 않았을 거리의 보통 사람들(연예인들은 자신들과 반대말로 사용하고, 패션계에서는 모델의 반대말로 사용되는 단어 ‘일반인’)이 패션쇼에 서거나 광고 모델이 되는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

    당신이 패션모델 프로필에 유난히 ‘빠삭’하다면, 지난가을 시즌부터 디젤 광고의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을 것이다. “식상한 모델들 대신 당대의 창의적인 분위기와 다양성을 반영할 사람들을 찾고 싶었어요.” 디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니콜라 포미체티는 광고를 위해 텀블러에 모델을 모집하는 ‘캐스팅 콜’을 포스팅했다. 그러자 15세 미술학교 학생부터 딸기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플러스 사이즈 그래피티 아티스트, 65세 전직 패션 에디터 등이 모여들었고, 그 결과 디젤은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이고 개성이 뚜렷한 이미지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번 시즌 광고는 더 큰 뉴스거리였다. 근이영양증을 앓는 26세 패션 블로거 질리안 머카도가 휠체어에 앉은 채 광고에 등장했으니까. 그녀는 디젤 페이스북의 모델 캐스팅 콜을 통해 선발된 케이스다. 카메라가 익숙지 않아 몹시 긴장한 머카도의 소감은? “장애가 걸림돌인 건 명백한 사실이지만, 저는 늘 패션계의 일부가 되고 싶었어요.” 그렇다면 포미체티가 의도한 건 뭘까?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할 만한 휠체어가 아니라(물론 언론의 관심을 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디젤의 반항적 분위기와 어울리는 개성 뚜렷한 캐릭터들을 모으는 것. “개성과 다양성, 자신만의 독창적 아름다움을 지닌 인물들을 보여주는 게 목적이었죠.”

    디젤이 지구 상에 존재하는 반항아들의 아름다움을 찬양했다면, 바니스 뉴욕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데니스 프리드맨과 사진가 브루스 웨버가 선택한 건 사회적으로 터부시되는 이들이다. 프리드맨과 웨버는 세계 곳곳에서 17명의 트랜스젠더를 불러들였고, 포트레이트 촬영과 함께 각자의 사연을 담았다. “세상과 맞서는 그들의 용기에 대한 우리의 경외심과 존경심이 이 작업에 담기길 원합니다.” 사실 레아 T나 안드레 페직, 케이시 레글러에 익숙한 패션계에서 묘하고 중성적인 아름다움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 촬영하고 이야기를 듣는 내러티브적 방식은 단순한 호기심을 초월한다. 인간적 시선으로 그들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니까.

    이러한 접근은 미의 기준이 변화하는 과정의 일부, 혹은 새로운 표현 방식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 변화의 원인은 그토록 열렬히 추구해온 미의 기준이 지금 세상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기 때문. 과거 부유하고 여유로운 이들만 패션을 즐기던 시절엔 인형 같은 모델이 값비싼 디자이너 드레스를 입고 살롱에서 뱅그르르 도는 게 가장 적절했다. 가능한 한 대중과 멀리 떨어진 채 소수 상류층에 한정시키는 것이 하이패션의 마케팅 전략이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 세상은 다르다. 돈만 있으면 누구나 차별이나 장벽 없이 즐길 수 있는 게 패션이다. 이제 하이 패션이든 SPA 패션이든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공감을 얻는 것이 관건. 60년대 예술계에 팝아트가 등장한 것처럼, 지금은 패션계에 보통 사람들이 등장하고, 주변의 소소한 일들을 패션이 공유하는 시대다.

    “런웨이 모델들은 현실의 사람이 아니었죠.” 도나 카란은 DKNY 가을 컬렉션을 위해 23명의 뉴요커를 섭외했다. 뮤지션, 독립 큐레이터, 예술가, 생물학자, 건강관리사, 나이트 호스티스, 학생 등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인부터 인터넷에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평범한 인물들까지. “디자인보다 캐스팅 과정이 훨씬 재미있었어요!” DKNY 백스테이지 풍경을 보자. 한쪽 구석에서 프로 스케이트 보더가 손톱에 네일 래커를 바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여자 래퍼가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립스틱 색깔에 대해 의논 중. 메이크업 아티스트 야딤은 다른 패션쇼처럼 모두를 복제인간으로 만드는 대신 일대일 상담 과정을 거쳤다. “메이크업을 하기 전 각자에게 물어봤죠. ‘밤에 외출할 때 어떻게 메이크업하죠?’ ‘당신의 트레이드 마크는 뭐죠?’ 그들이 무대를 걸을 때 자신감을 느끼길 원했으니까요.” 키도 들쑥날쑥, 체형도 전부 다르고, 걸음걸이나 걷는 속도 역시 제각각이었지만 런웨이는 디자이너가 전하려는 활기찬 도시 에너지와 젊은 열기(때로 조금 수줍고 들뜬, 말하자면 살아 있는 느낌!)로 가득 찼다.

    이미 봄 컬렉션에서 두려움 없이 전진하는 건강미 넘치는 여대생들을 동원한 릭 오웬스는 가을 컬렉션에서는 또 다른 아이디어를 냈다. 자연스럽게 나이 든 여성들에게 경의를 표한 것. 오웬스가 애써 모델들을 찾지 않고, 평소 가깝게 지내거나 함께 작업하던 주변 여성들(90년대 톱 모델 나데이지와 안로르, 팔레 로얄 매장의 매니저 바바라 마리아니, CEO 엘자 란조, 미셸 라미의 딸 스칼렛 루즈, 매장을 설계한 건축가 안나 투마이니, 그의 어시스턴트로 일했던 디자이너 애샤 마인스 등)이었다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다. 그들은 성형수술 대신 늘어진 주름과 색이 바랜 모발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보통 여성들이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이 디자이너 의상에 대해 느끼던 거리감은 급격히 좁혀졌다. 몸매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그 옷들을 입을 수 있다는 실례를 보여주니까. <뉴욕 매거진> 패션 평론가 로빈 기반은 릭 오웬스 쇼에 대해 “결국 살아 있는 여성의 인격이 옷에 구조를 부여했다”라고 평한 것처럼, 옷과 옷을 입은 사람 간의 상호작용이 이뤄지는 것을 목격하게 되니까. 사실 우리는 옷의 ‘아우라’에 눌린 듯 보이거나, 캐릭터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사람을 자주 본다. 그러나 살아 있는 인형들의 전용 무대에서 누구보다 당당했던 뉴욕 젊은이들과 중년 파리지엔들은 만고의 진리를 증명했다. 뭘 걸치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

    최근 런던에는 이러한 수요를 재빨리 반영한 ‘안티 에이전시’가 등장했다. 설립자인 20대 스타일리스트 두 명은 ‘모델이 되기엔 너무 쿨한 사람들’을 위한 에이전시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아요. 매주 머리색을 바꿔도 상관하지 않고, 몸무게를 줄이라고 압박하지도 않죠.” 그들이 모델을 스카우트할 때의 기준은 외모가 아니라 어떤 취향과 호기심을 갖고 있으며, 재미있고 열정적인 캐릭터인지의 여부(페이스북을 통해 체크한다). “타깃으로 하는 소비층을 충분히 대변하는 사람이 모델로 등장하면 그 광고는 진짜가 되고, 소비자들은 광고 출연자에게서 직접적인 영감을 받게 됩니다.” 실제 베르수스, 유니클로, 닥터 마틴 같은 브랜드들이 안티 에이전시의 주요 고객이다.

    최근 케이티 힐리에와 루엘라 바틀리 듀오도 자신들의 MBMJ 첫 광고를 위해 4월 2일부터 일주일간 SNS로 모델을 공개 모집했다. #CastMeMarc 해시태그를 달아 트위터나 인그타그램에 셀피를 올리기만 하면 응모 끝. 이미 마감한 지금도 실시간으로 계속 올라오는 중이며, 마감 이틀이 지난 상황에서 트윗은 1만5,000여 개, 인스타그램은 6만 7,000개가 넘는다. 어떤 인물이 등장하고 또 어떤 이미지가 완성될지는 미지수. 그러나 MBMJ 티셔츠나 액세서리, 문구에 만족하던 이들이 좀더 적극적으로 바뀌는 건 분명하다. 자신과 다를 바 없는(소셜 네트워크상에서 친구 사이일 수도 있는) 광고 속 인물을 통해, 모델 몸매가 아니더라도 옷과 하나가 되는 것을 경험할 듯. 릭 오웬스 말처럼, 그동안 알지 못한 자신의 모습도 깨닫게 될 것이다. “서로를 예전과 다른 방식으로 보게 만들 겁니다. 그리고 한동안 그것에 대해 생각하게 될 거예요. 좋은 방식으로 말이죠.”

    에디터
    패션 에디터 / 송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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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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