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엔 숲으로

마스다 미리의 만화 <주말엔 숲으로>에서 주인공 하야카와와 친구 세스코는 숲을 걷다 이런 이야길 나눈다.
“숲 속에는 무언가 그리운 향기가 있어. 우리들은 계속 도시에 살아왔는데,
그리운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아픈 마음을 달랠 길 없는 6월, 지금이야말로 숲길을 걸을 때다.

나들이라면 누구나 봄을 떠올리지만 연중 가장 푸른 시절은 여름이다.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고 비가 쏟아지는 이 시절이야말로 녹음이 우거지고 초록이 짙어진다. 믿기 힘들지만 가장 많은 꽃들이 피어나는 것도 여름이다. 5월에 만개하는 목본식물들이 한바탕 지나간 뒤, 산기슭에는 아찔한 향을 뽐내는 찔레꽃과 흰 들장미가 만개하고, 들에는 보랏빛의 메꽃, 초원에는 붉은 꽃창포와 패랭이꽃이 핀다. 이 아름다운 시절을 만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수목원을 찾는 것이다. 꽃과 나무를 찾아 방방곡곡을 찾아다닐 수 없는 이들에게는 수목원이 진리다.

충남 태안에 있는 ‘천리포수목원’은 그중에서도 백미다.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아시아 최초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이라는 빛나는 왕관을 받은 이 수목원은 일반에게 공개된 지 겨우 5년째다. 설립 이후 40여 년간 연구와 보존을 목적으로 그야말로 철저하게 관리되었다가 2009년에 그 무거운 철문을 열어젖혔다. 푸른 속살을 드러낸 ‘비밀의 정원’은 그야말로 신천지다. 식물도감에서 나올 법한, 아니 거기서도 보지 못한 희귀종들이 무심하게 거기에 있다. 곧게 뻗은 꽃대에 화려한 원통형 꽃이 수십 송이 달려 천상의 꽃이라 불리는 크니포피아, 아래쪽으로 풍성하게 처진 가지 덕분에 젊은 연인들이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데 최고의 명당이라는 니사나무(실제로 연인들은 이곳에 들어가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염색이라도 한 듯 분홍빛이 우아하게 번져 있는 미꽃산딸나무, 몸에 가시를 주렁주렁 매달아 짐승들이 잎을 뜯지 못하게 진화한 가시주엽나무, 바람난 처녀의 치맛자락처럼 하늘거리는 낮달맞이꽃, 봄엔 붉은색으로 잎을 틔웠다가 여름엔 노랗게, 찬 바람이 불면 녹색으로 변하는 삼색참죽나무…. 하루에 1시간씩 3년 내내 한강 변을 달려봐도 마주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귀한 식물들이 지척에 널려 있다.

이 아름다운 숲을 만들고 가꾼 이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45년 통역장교로 왔던 미국인 칼 밀러는 아름다운 한국 풍경에 반해 귀화, ‘민병갈’이라는 이름으로 살다 2002년 타계했다. 60년대 초 딸의 혼수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노인을 도울 겸 6,000여 평(약 2만 ㎡) 임야를 구입한 것을 시작으로 18만 평(59만5,041㎡)의 땅을 사들여 수목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오로지 수목원을 가꾸는데 일생을 바친 이 남자 덕분에 매화마름과 가시연꽃 등 멸종 위기 식물 5종, 목련 400여 종과 무궁화 250여 종, 동백나무 380여 종과 호랑가시나무류 370여 종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자생하는 1만5,000여 종의 식물들이 헐벗었던 산자락에 뿌리를 내렸다. 그의 이야기를 알고 나면 곳곳에서 좀더 애틋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민병갈 원장이 세계 최초로 발견해 국제학회에 이름을 올린 완도호랑가시나무, 고향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매일 절을 올렸다는 ‘어머니 목련’,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격하게 아꼈다는 블루베리나무(지금이야 블루베리 묘목을 전통시장에서도 쉽게 볼 수 있지만 한국에서 자생하기 힘들었던 이 나무를 살리기 위해 펜스를 쳐놓고 끔찍이 아꼈는데 그가 타계한 해에는 놀랍게도 열매를 맺지 않았단다), 한복을 즐겨 입으며 생의 마지막까지 거주한 한옥 ‘소사나무집’까지 어느 것 하나 이야기 타래가 얽혀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사실, 숲은 청량한 공기와 생경한 풍경 외에도 좀더 많은 것들을 가르쳐준다. 그곳을 걸어야만 알게 되는 멋진 사실들이 너무나 많다. 나무들에게도 각각의 성격이 있다는 걸 아시는지. 삼나무처럼 쾌활한 녀석들은 금방 키가 자라고 어엿한 아름드리나무가 되지만, 편백처럼 소심한 녀석들은 수십 년이 지나도 성인의 키에 미치지 못한다. 지랄맞은 성질의 나무 옆에선 잡초들마저 금방 시들지만 호기로운 야생화 군단은 기어이 씨를 퍼뜨리고야 만단다. 야생화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약용 성분은 이토록 강인한 생명력으로부터 오는 것일 터다.

숲의 수명을 주관하는 슈퍼갑이 미생물이라는 사실은 어떤가. 흙 속에 우글거리는 미생물과 박테리아가 흙을 잘게 부수고 작은 틈들을 만들지 않는다면 그 안으로 물이 스며들 수 없고, 꽃과 나무도 숲도 없다. 그뿐인가. 작은 벌레와 버섯과 곰팡이들이 식물에게 거름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생명의 순환 역시 유지되지 않는다. 박테리아와 곰팡이에게 빚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라니, 일찌감치 식물학자들이 “나무 100그루 더하기 100그루는 200그루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라고 선언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이러니하지만 관리가 안 된 수목원일수록 가볼 가치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람을 위한 숲’이 아니라 ‘나무를 위한 숲’이 될수록 자연에 가까워진다. 도태되면 도태되는 대로, 바람에 넘어지면 넘어진 대로, 시들면 시드는 대로 두고, 스스로 환경에 적응하는 식물들의 모습을 보존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러니 부디, 수목원의 쓰러진 나무를 보며 ‘입장료를 받으면서 관리도 제대로 안 하는군’이라고 푸념하지 말아주길!

둘러보면 곳곳에 수목원 천지다. 가평의 ‘아침고요수목원’은 원예학과 교수가 꾸민 곳답게 학술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가장 완벽한 숲을 품고 있다. 여름이면 붓꽃과 꽃창포 같은 토종을 비롯한 1,000여 종의 아이리스와 황홀한 산수국 군락을 만날 수 있다. 좀더 이색적인 숲을 걷고 싶다면 춘천에 있는 ‘제이드가든’을 권한다. 야트막한 숲길을 따라 다양한 테마의 유럽식 정원을 조성해놓은 덕분에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에서 두 주인공이 들꽃 같은 사랑을 했던 ‘혜교의 집’이 바로 여기다) 이곳이야말로 그림 같은 풍경을 선사한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찾는다면 예전에 ‘광릉수목원’으로 불렸던 ‘포천 국립수목원’을 찾는 것도 좋겠다. 근처에 세조와 그의 왕비 정희왕후의 능을 모신 덕분에 조선 왕실이 보호했던 이 숲은 엄청난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생태적으로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단, 국립수목원이라 정해진 인원만 들어갈 수 있으니 예약하는 것을 잊지 말 것!

단언컨대 숲의 매혹은 생각보다 크다. 숲을 거닐다 보면 운명적 상대를 만나듯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이 찾아올 것이고, 꽃과 나무의 이름을 알고 싶어 안달이 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법당 앞 후박나무 한 그루를 사랑한 나머지 ‘가끔씩 두 팔 벌려 꼬옥 안아주었다’던 법정 스님의 검박한 사랑 이야기도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뿐인가. 틈만 나면 숲으로 달려갈 핑계를 찾게 될 것이다. 가을에는 폭신폭신한 낙엽을 밟고 싶어서, 겨울에는 하얗게 내린 눈꽃을 눈에 담고 싶어서, 다시 봄이 찾아오면 그저 봄이 반가워서. 이토록 푸른 열정을 가르쳐주는 존재가 또 있었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