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의 히말라야

난생처음 해외여행을 떠난 소설가 정유정이 한 권의 여행 에세이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 방황>과
함께 돌아왔다. 내친김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까지 수백킬로미터를 걸었다는 그가
지난 히말라야 여행의 뒷이야기를 들려줬다.

히말라야로 떠난 건 지난해 9월이었다. 사실 나는 그전까지 한 번도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었다. 방 안에서만 혼자 큰소리 치는 사람을 전라도말로 ‘방안퉁수’라고 하는데, 내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해외여행 자율화가 시작되었으니 배낭여행 1세대인 셈이지만, 당시의 나와는 먼 세계의 얘기였다. 내 인생엔 눈부신 청춘이라 할 만한 시기가 없었다. 여행사를 하던 어머니의 투병 생활은 내가 스물두 살이 되던 해부터 시작되었다. 가장 노릇을 하며 간호사 생활을 했다. 신혼여행도 강릉으로 갔다. 작가로 불리게 된 후에도 늘 바빴다. 어느덧 나는 휴식을 모르는 링 위의 싸움꾼이 되어 있었다.

새로운 나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28>을 출간하고 난 후였다. 2년 3개월에 걸쳐 힘들게 소설을 완성하고 난 후, 내 안의 뭔가가 소진되어버린 느낌이었다. <7년의 밤>을 끝냈을 때와는 달랐다. 숱한 세상의 눈과 날 선 비판에 상처를 받기도 했고, 다음 소설을 제대로 완성해낼 수 있을지 두려웠다. 문학적인 고민이야 작가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겠지만, 문제는 다시 나를 그 무서운 벼랑 끝으로 몰아세울 힘이 사라졌다는 데 있었다. 도무지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비행기나 탈 수 있을까?’ 싶던 내가 히말라야 트레킹 코스 중에서도 제일 길고 험난하다는 ‘환상종주’를 택한 건 그 때문이었다. 가장 힘든 것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내 용기는 늘 절박함에서 나왔으니까.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는 <내 심장을 쏴라>의 승민이가 그리워한 신의 땅이기도 했다. 나 역시 그랬다. 평범한 사람은 갈 수 없는 곳. 흔히 말하는 유토피아처럼 인간은 갈 수 없는 영역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7년 전에 썼던 그 소설의 플롯 노트를 찾아 마지막 지문을 가위로 오려냈다. 그리고 파란색 종이로 돌돌 말아 유리병에 넣고 짐을 꾸렸다. 안나푸르나에 묻고 올 캡슐이었다. 거기엔 다음과 같은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전사를 찾아서.”

광주 버스 터미널보다 작은 카트만두 트리부반 공항에 도착해 둘러본 풍경은 70년대 우리나라의 소도시를 연상시켰다. 여행을 하는 동안 종종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전라도 시골과 히말라야 산마을은 물론 꽤 차이가 있겠지만, “나마스테”하고 인사하며 지나는 교복 차림의 소년 소녀들을 만날 때마다 괜히 울컥울컥했다. ‘가난한 저 아이들의 가슴엔 또 어떤 큰 꿈이 있을까?’ 환상종주를 하기 위해서는 여기에서 다시 차를 타고 181km를 들어가야 한다. 출발점인 베시사하르에서 해발 5,416m의 쏘롱라패스를 지나 나야풀까지 이어지는 이 코스를 모두 통과하는 데는 약 18일이 걸린다. 여행 경험이 많은 김혜나 작가가 기꺼이 나의 동행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혜나와 나, 베테랑 가이드 검부, 그리고 짐을 들어주는 포터 버럼, 네 사람이 한 팀이 되어 움직였다. 에베레스트의 산악 민족 라이족의 후손인 검부와 버럼은 몸집은 작지만 흉곽이 항아리처럼 크고 둥글었다. 해발 3,000m가 훌쩍 넘는 곳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피우는 이들은 제일 높은 봉우리인 쏘롱라패스를 오를 땐 콧노래마저 불렀다. 반면에 평범한 우리에겐 하루하루가 새로운 모험이었다.

트레킹 첫날, 티베트 산악 민족이 사는 한 마을의 꼭대기 찻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나왔을 때였다. 오르막길이 시작되며 안나푸르나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처음으로 눈앞에 설산이 나타났다. 햇살이 구름을 걷어내는 순간, 혜나와 나는 대자연 앞에 입을 쩍 벌리고 서서 “설산이다!” 하고 외쳤다. 해발 6,000m가 넘는 그 설산의 이름은 람중히말이라고 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우리 진짜 히말라야 왔나 봐!” 히말라야는 산스크리트어로 ‘눈의 거처’를 뜻했다. 이 경이로운 산은 우리가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한 꺼풀씩 옷을 벗고 상상도 못한 변화무쌍한 풍경을 펼쳐 보였다. 그 누가 히말라야에서 정글을 만나게 될 거란 예상을 했을까? ‘환상종주’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반탄티과 간두룽 사이의 내리막길은 “잘못하면 뱅골만까지 떠내려간다”고 할 만큼 가파르다. 정글은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10일 정도 걸리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나 묵티나트 트레킹을 택하기 때문에 이 정글에 대해서는 아무런 사전 정보가 없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이 고요한 지역엔 나무 밧줄을 타고 날아다니는 하얀 원숭이들과 원시림으로 뒤덮인 숲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은 안나푸르나 트레일에서 최북단에 위치한 마을 묵티나트에서부터 천상의 사과 마을 마르파로 향하는 서부 구간이었다. 거대한 절벽과 강물의 모양새는 우리나라의 강원도 산골짜기와 비슷한데, 규모는 몇십 배 더 크다. 친숙하고도 예쁜 풍경이었다. 시간이 멈춘 중세의 성터 같은 묵티나트에서는 저 멀리 무스탕 왕국도 내려다보였다. 네팔과 티베트가 맞닿은 황무지 산속의 이 요새 도시는 ‘샹그릴라’라고도 불린다.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등장하는 바로 그 지상낙원이다. ‘별들의 바다’도 보았다. <내 심장을 쏴라>에서 승민이 죽음과 맞대면하는 순간, 환상처럼 보았던 그 별들의 바다를 그곳에서 만난 건 행운이었다. 우기였던 터라 밤하늘이 맑은 날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면증에 시달리던 새벽, 무심코 마당에 나와 보름달이 뜬 설산을 보는데, 광활한 하늘에서 유성비가 쏟아져 내렸다. 사실 우리나라 지리산만 가도 뚝뚝 떨어지는 유성우를 쉽게 볼 수 있긴 하나, 히말라야처럼 하늘이 가깝게 느껴지진 않는다. 그야말로 별을 맞는 기분이었다. 그때의 감정은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다. 지금도 가끔 꿈을 꾸면 히말라야의 그 신비로운 풍경들이 펼쳐지곤 한다. 쏘롱라패스도 그중 하나다. 제일 높은 지대인 쏘롱라패스는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란 게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수목한계선을 지난 이 땅에선 풀 한 포기, 새 한 마리조차 찾을 수 없다. 날개 달린 짐승도 닿을 수 없는 이 황량한 고원을 오를 수 있는 건 오직 인간뿐이다. 이곳을 통과하기 위해선 얼음장처럼 찬 공기와 칼바람을 뚫고 미끄러운 자갈길을 나아가는 동시에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볕을 견뎌야만 한다. 나 역시 저체온증과 수시로 쏟아지는 졸음에 맞서 사투를 벌였다.

고산병으로 인해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기도 했다. 쏘롱라패스에 닿기 전날 밤이었다. 며칠째 계속되던 증세가 심해지면서 갑자기 심장 발작이 왔다. 동네 의원님이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고 하면서 지어준 약을 가까스로 찾아 씹어 삼킨 후, 30분을 버텼다. 흔히 골든 타임이라고 하는 이 30분 안에 문제를 해결 짓지 못하면 끝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진작에 헬기를 타고 카트만두로 내려갔어야 했다. 의학 상식이 있기 때문에 기다림의 시간이 더 무서웠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하자 오직 아들 얼굴만이 떠올랐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삶을 사는지, 이 대자연 속에서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작고 초라한 존재인지 명확하게 다가왔다. 다행히 더 이상의 통증은 없었다. 그렇게 마침내 정상에 섰을 때 혜나와 나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리고는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각자의 유리 캡슐을 돌탑 아래 밀어 넣었다.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지금도 모른다. 아마 혜나의 소원은 머지않아 출간될 그녀의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이제 모든 고생이 끝난 줄로만 알았다. 나중에야 고레파니의 계단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쏘롱라패스보다 더 힘들었다. 아파트 계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경사가 심한 바위 계단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곡괭이가 있다면 계단을 다 파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리가 죽자 살자 걷는 그 길을 발가락 슬리퍼를 신은 동네 언니들이 짐을 들고 가뿐히 오르는 걸 보면 기가 막혔다. 이 무시무시한 수직 계단은 무려 2박 3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보다 어떻게든 나아가고 싶다는 바람이 더 컸다. 그 고비를 넘기느냐 못 넘기느냐가 내가 다음 소설을 쓸 수 있느냐 없느냐로 느껴졌다.

히말라야에서 만난 우리의 가이드 검부는 이런 얘길 들려줬다. ‘한국인’ 하면 딱 두 가지가 생각나는데, 하나는 ‘스트롱’이고, 또 하나는 ‘언더스탠드’다.” 목표를 정해서 나아갈 땐 중간에 포기하는 법이 없고, 상황을 설명하면 더 이상의 불평 없이 이해하고 넘어가 준다는 얘기였다. 그는 좋은 의미로 한 얘기였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별일이 다 일어나는 복잡한 나라에서 살다 보니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덕분에 이해 못할 일이란 게 별로 없고, 야단법석을 떨다가도 눈 뜨면 잊어버린다. 그렇게 모든 일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것 같다. 가슴 아픈 인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슬퍼하는 요즘, 이런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발언을 해야 하는 게 기자의 역할이라면, 소설가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내 안의 전사가 깨어났다. 전사라는 건 나 자신과 싸울 수 있는 투지다. 히말라야 종주가 끝나고 포카라로 내려온 후엔 오히려 투지가 너무 넘쳐 베이스캠프까지라도 다시 한 번 걸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리조트 수영장에서 한가롭게 수영하다 주스를 마시고 스파나 하러 가는 그 시간이 너무도 아깝고 지루했다. 그러니까 나는 본시 휴식을 모르는 싸움꾼이었던 것이다. 고상하고 새로운 ‘나’ 같은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그저 똑같은 인간이었다. 나 자신에 대해 새롭게 발견한 점이 있다면, 내 입맛이 그리 글로벌하지 않다는 사실 정도다. 마살라 향에 끝까지 적응하지 못한 나는 포카라의 한국인 식당에서 끈적끈적한 밥과 제육볶음, 김치를 배 터지게 먹은 후에야 비로소 입맛을 되찾았다. 마침 주인이 전라도 사람이었다. 만약 내가 20대 였다면 좀더 용감하게 이국의 음식들을 먹어보고 그 향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음식 솜씨가 워낙 좋았던 탓도 있다. 히말라야에서 맞이한 어머니의 기일에 나는 보라색 들꽃과 함께 비로소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강물에 실어 보냈다. 그리고는 한국에서 가져간 유일한 소설집 조용호의 <떠다니네>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름다운 단편 ‘달과 오벨리스크’의 한 대목을 읊었다. 뒤늦은 작별 인사였다.

히말라야에서 돌아오고 넉 달이 지난 후, 나는 다시 산티아고로 떠났다. 그리고 혼자 900km를 걸었다. 이번엔 다음 소설을 구상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사이코패스를 일인칭 시점으로 다룰 이번 소설은 전작과 달리 좁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로서는 굉장히 큰 도전이다. 입으로는 “2016년까지 끝내겠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무서워 죽겠다. “기대해달라”고 말하기엔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두려움 없이 쓴 글에선 좋은 이야기가 나올 수 없다. 돌이켜보면 안나푸르나가 나를 축복해줬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잘 받아주었다. 히말라야 종주를 마치고 혜나와 나는 약속을 했다. “우리, 다음 소설 끝내고 에베레스트 가자!” 마음은 벌써 그곳을 향하고 있다. 히말라야에서의 경험이 앞으로의 소설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다. 이제 다시 나를 벼랑 끝에 세울 용기가 생겼다는 것. 두려움 속으로 나를 밀어 넣고 그렇게 또 한 걸음씩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