팻 힐 전성시대

날씬한 굽은 한물가고 뚱뚱한 굽들이 왔다. 코끼리 엉덩이를 가진 여자도 발목 언저리쯤에서
‘아, 가늘구나’라며 숨통을 트여주던 마법 같은 스틸레토를 몰아낸 거대한 굽에 정이 가지 않는 건?



몇 해 전, 나는 정체불명의 플랫폼 슬리퍼(높이가 족히 12cm는 되고 넓은 X자형 스트랩이 발등 전체를 덮는 누드 톤)를 신고 모하비 사막을 질주하는 언니의 옆자리에 앉아 생명의 위협과 못생긴 신발에 대한 불편함에 시달리다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고 말았다. 유행을 쫓는 나를 속물 취급하는 언니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아름다움’이란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아무 말도 안 하길 잘했다. 요즘은 매일 아침 아이 유치원에서 만나는 선생님들조차 죄다 그와 비슷한 신발을 신고 있으니!

21세기의 첫 10년 동안 여자들은 마놀로 블라닉이나 지미 추의 스틸레토 힐을 신고 일도 파티처럼, 파티는 파티처럼 살았다. 이제 파티는 끝난 것일까? 하이힐은 여자의 자존심이라고 외치던 여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지난 1년 사이 여자들의 신발 풍경은 확연히 달라졌다. 발레리나 플랫은 슬리퍼로, 킬힐이 달린 롱부츠는 록스타 같은 워커나 멋쟁이 첼시 부츠로, 펌프스와 하이힐 샌들은 웻지힐이나 플랫폼 신발로 교체되었다.

가장 핫한 건 운동화(칼 라거펠트와 피에르 하디, 발렌티노까지 운동화를 만든다)고, 이 세대 교체의 틈바구니에서 나이키와 아디다스, 버켄스탁이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리고 중요한 한 가지, 이 모든 새 신발들은 스틸레토 힐을 구닥다리로 보이게 한다는 것! 여전히 길고 가느다란 굽이 나오지만 새롭고 쿨한 건 역시 육중한 기둥 같은 블록 힐이나 넓적한 사각형의 로퍼 힐들이다. 하지만 발꿈치에 대못을 꽂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또각또각 우아하게 걷는 여자의 뒷모습을 사랑하는 나 같은 옛날 사람에게 이 뚱뚱한 굽을 가진 신발들의 유행은 아우, 불편하다.

신발 장인들이 오랜 시간 공들여 찾아 낸, 여자의 다리와 발목을 가늘고 섹시해 보이게 하는 황금비율의 스틸레토 힐(마놀로 블라닉은 자신이 펌프스를 잘 만들 수 있게 되기까지 38년이 걸렸다고 했다. 그 펌프스가 웻지힐이나 블록 힐은 아니다)을 몰아 낸 이 뚱뚱한 굽의 미덕은 대체 무엇일까?

스타일리스트 김윤미는 “섹시하지는 않지만 그만의 투박한 매력이 있지요. 억지로 멋내지 않은 자연스러움이랄까, 쿨함!”이라고 답한다. 그건 프랑스의 유서 깊은 남자 구두 공방 J.M. Weston과 함께 로퍼 컬렉션(그 중에는 두툼한 6cm 로퍼 굽이 달린 것들도 있다)을 선보인 리드 크라코프가 미국 <보그>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섹시함과 쿨함의 차이죠!”와 일맥상통한다.




<보그 코리아>의 스타일 에디터 손은영은 “웻지힐과 플랫폼 슈즈는 확실히 편안함이라는 장점이 있어요. 발등을 아치형으로 꺾지 않아도 되니까요”라고 말한다. 신발에 관한 한 디자이너들은 여자들에게 불편함을 감수하고 얻는 아름다움 대신 편안함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선사하기로 한 것 같다. 스틸레토 하이힐의 유행이 절정에 달했을 때 여자들은 재능 있는 신발 장인들이 편한 신발을 만들 줄 알면서도 오로지 높고 예쁜 신발들만 만들어 댄다고 불평했다. 이에 대해 피에르 하디는 인체공학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굽의 최대 높이는 12cm인데 여자들은 매 해 더 높은 굽을 요구한다며 항변했다. 그리고 이제 그 갈등은 여자들이 스틸레토 힐을 버리고, 피에르 하디는 운동화나 낮은 사각 굽이 달린 로만 스타일 샌들을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된 것 같다.

JW 앤더슨은 영국 ‘보그닷컴’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여성복을 시작한 후로 줄곧 플랫 슈즈를 지지했다면서 여성들이 좀더 나은 방법으로 자신의 발목을 강조하기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매우 여자 입장이라는 셀린, 클로에, 스텔라 매카트니, 마르니 같은 여성 디자이너들이 팻 힐을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을 봐도 구두 굽에 대한 디자이너들과 여자들 사이의 합의는 행복해 보인다.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 구두 굽에 대한 견해가 바뀌게 되었을까? 알랭 드 보통은 ‘왜 아름다운 것을 향한 마음이 바뀔까?’라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20세기 초 미술사가인 빌헬름 보링거의 이론을 참조했다. ‘한 사회가 한 가지 미학적 스타일에서 다른 스타일로 옮겨가는 결정적인 요인이 그 사회에 결여된 가치에 있다’ 즉, 사회는(여자들은) 자기 내부에 충분하지 않은 것을 예술에서(혹은 패션에서) 찾고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팻 힐을 선보인 셀린의 2014년 가을겨울 컬렉션의 말도 안되게 높은 플랫폼 샌들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셀린은 최근 가장 쿨하고 영향력 있는 형태의 신발들을 내놓고 있다. 2014년 리조트 컬렉션의 슬리퍼, 지난 봄여름 컬렉션의 플랫폼 스니커). 쇼 직후 백스테이지 인터뷰에서 디자이너가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는 여자를 생각했다며 던진 세 개의 단어 ‘wild’ ‘tender’ ‘strong’을 힌트로 컬렉션을 보자. 거칠고 투박해 보이는 소재와 형태를 선택한 셀린의 가을겨울 컬렉션은 느끼한 샴페인과 캐비어 파티가 지겨워진 여자들에게 선사하는 ‘터프한 시대를 강하고 우아하게 사는 법’에 관한 한 편의 아름다운 시처럼 읽힌다. 그리고 그 마무리에는 실용성을 극단적 이미지로 보여주는 무뚝뚝한 플랫폼 신발(실제로 이 신발을 신고 들판을 달리는 데는 무리가 좀 있겠다)이 있다.

스틸레토 힐을 버리고 팻 힐을 선택한 최근의 신발들은 편안함, 쿨한 태도, 무자비하게 실용적인 것에 대한 판타지처럼 터프한 시대를 사는 요즘 여자들이 필요로 하는 욕구를 담고 있다. 사는 건 파티가 아니니 정신 좀 차리라고 내몰지 않고, 멋진 구두와 손가락마다 끼우는 싸구려 반지를 슬쩍 들이미는 패션은 얼마나 다정하고 속물적인, 그리고 사랑스러운 친구인지!

황진선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뒤 <마리 끌레르>와 <보그>에서 패션 에디터로 일했다. 웬만한 문장가 뺨치는 어휘력과 우아한 비유, 세련된 상상력과 약간의 괴짜 기질을 지닌 A형 여자. <보그>에서 패션 에디터로 이름 날릴 땐,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누비며 스테파노 필라티, 크리스토퍼 베일리, 프리다 지아니니 등 패션 슈퍼스타들과 독대해 그들의 속사정을 들었다. 현재 아내와 엄마를 겸하며 ‘보그닷컴’을 위해 전성기 시절의 필력을 다시 발휘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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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노 필라티 www.vogue.co.kr/StefanoPilati
크리스토퍼 베일리 www.vogue.co.kr/ChristopherBailey
프리다 지아니니 www.vogue.co.kr/FridaGianni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