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셀피를 모함했나?

디지털 시대, 온라인 세상에선 나 자신이 리비도의 대상이 된 나르시시스트들이 차고 넘친다. 사랑스러운 개인주의를 넘어 맹목적인 자기애에 빠진 사람들은 오늘도 부지런히 셀피를 찍어 올린다.

셀피 찍기에 몰두한 카페의 아가씨들. 흰색 미니 드레스, 앵클 부츠, 파란색과 연두색 리키 백은 랄프 로렌, 빨간 드레스는 조나단 선더스(at 지스트리트 494), 새틴 하이힐과 왼쪽 모델의 진주 목걸이, 오른쪽 모델의 귀고리는 미우미우, 왼쪽 모델의 귀고리와 오른쪽 모델의 목걸이, 팔찌는 모두 빈티지 헐리우드. 장소는 카페 노르딕.

이미 ‘selfie’는 옥스포드 사전에 등재된 공식 단어다. 온라인상에 실시간 올라오는 엄청난 양의 셀피는 거의 모두 같은 포즈와 동일한 각도, 유사한 느낌과 비슷한 표정이다. 사람들은 하루도 쉬지 않고 자신의 사진을 찍어 올린다.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매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 온라인에 올려 공유하는 일은 이제 일상이다. 자신의 사진을 불특정 다수에 노출된 공간에 올려 공유하는 행위가 부끄럽거나 어색한 사람들에겐 여전히 낯선 문화다.

물론 타인에 의한 미디어 노출이 질색인 스타들에게도 행복한 일상인 동시에 중요한 홍보 수단이다. 미국의 코미디언 엘런 드제네러스는 지난 아카데미 시상식 때 슈퍼스타들과 현장에서 셀피를 찍었다. 고도로 기획된 PPL이라는 논란에도 불구, 하루 만에 300만 번이 넘게 리트윗 됐다. 그러니 이제 카페에서 누군가 나를 향해 카메라를 들고 있어도 과민 반응할 필요 없다. 그는 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찍고 있는 중이니까.

이미지와 외모는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한 키워드다. 범죄자, 탈주범도 잘생기면 주목 받고, 방송에 나온 일반인의 뛰어난 외모는 화제가 된다. 온라인 기술의 발전으로 대중과 미디어는 쌍방향 소통한다. 또 뉴스와 문화는 미디어에서 대중이 아닌, 더 복잡하고 복합적인 경로를 오가며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전통적인 대형 언론사의 역할도 여전히 중요하다. 매일 자신의 사생활을 올리며 소소한 정보를 담는 개인 블로그 역시 당당히 언론의 역할을 하는 시대다. 엄청난 수의 개인 미디어, 소통의 쌍방향성, 그 경로의 복잡함이 자신을 타인에게 인식시켜야 하는 필요성으로 연결되고 부각된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외모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중이다.

이런저런 목적 없이 단순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자신의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주려는 욕구는 자연스럽고 흥미롭다. 사실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자의식 과잉과 나르시시즘에 빠져 미친 듯 사진을 찍어 온라인에 올려대기 시작한 건 아니다. 단지 지금 이 시대가 그들이 전시하듯 시시각각 사진을 올려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보여줄 편리한 기술과 플랫폼을 제공하고 있을 뿐. 원래 사람들은 자의식 과잉과 나르시시즘에 빠진 허영심 덩어리에 다 관심을 못 받아 안달 난 족속 아닌가. 누구나 늘 관심을 갈구하고, 무관심보다 악평과 비난을 차라리 달게 받아들인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건 인지상정. 그러니 어찌 보면 세상에 셀피가 넘쳐나는 건 그리 특이한 현상도 아니다.

감독 레오스 카락스는 영화 <홀리 모터스>에서 그의 페르소나 드니 라방을 통해 디지털화, 첨단화되는 영화산업에 대한 우려와 근심을 전했다. 감독의 고민은 그만의 것이나 영화산업만의 것은 아니다. 기술은 언제나 좋은 것, 유익한 것으로 인식돼왔지만, 이면에는 종종 심각한 부작용이 도사린다. 사진 한 장을 위해 필름을 구입하고 카메라에 넣어 촬영해 현상소에 맡긴 뒤 몇 시간, 혹은 며칠간의 기다림 끝에 필름과 사진을 찾는 일. 다시 사진 한 장 한 장을 정성스럽게 앨범에 끼워 넣는 행위와 그 행위에서 오는 즐거움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은 이미지로 소비되고, 이미지는 인화지 위가 아닌 픽셀로만 존재할 뿐이다.

음악에 대해 얘기해보자. 이제 세상에 음악은 없다. 언제 어디서든 클릭 한 번으로 다운받고 저장해 듣다가 언제고 디지털 저장고에 처박아버릴 수 있는 ‘음원’만 있다. 아이팟이 세상에 나왔을 때부터 나는 음악 듣는 일을 멈췄다. 해외 출장 시 유일한 낙이었던 대형 레코드 매장 방문은 이제 추억으로 남았다. 런던 피카딜리 서커스의 타워레코드, 뉴욕 타임스 스퀘어의 버진레코드, 파리 샹젤리제의 프낙… 모두 폐업했거나 디지털 기기 판매로 업종을 변경했다. LP 시대까지는 돌아가지도 말자. CD가 세상에 나왔던 시절까지만 해도 음악은 그냥 ‘음악’이었다. 내가 원하는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레코드 매장에 가서 재킷을 고르고 좋아하는 뮤지션의 CD를 사서 집에 돌아오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런 뒤 포장을 뜯고 크레딧을 차근차근 읽고 설레는 마음으로 플레이어의 트레이에 ‘알판’을 넣어 첫 곡부터 진지한 마음으로 어떤 의식을 치르듯 그 과정을 진행했다. 음악이 아날로그로만 존재하던 시절의 그것과 거의 동일한 절차였다.

하지만 음악이 음원으로 바뀌며 신성한 의식은 더 이상 없다. 내가 원하는 음악을 컴퓨터나 손 안의 마술사 ‘스마트폰’에서 간단히 검색해 다운받아 들을 수 있는 시대다. ‘음원’으로 불리는 그것들은 어떤가. 나는 아이팟 시대 이후 어떤 음악을 듣거나 매력적인 곡을 들어도 채 끝나기도 전에 질려버린다. 기술의 발전을 빨리 받아들이지 못하고, 늘 지나간 것에 향수를 얘기하는 나 같은 사람들의 편견일지 모른다. 그러나 음악이 더는 따뜻하게 들리지 않는 걸 달리 설명할 길은 없다.

많은 예술가들과 사진작가들이 자화상을 그리고 찍어왔다. 하지만 이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찍어 세상과 공유한다. 조금 더 예쁘고 잘생기게 나오는 각도와 빛을 연구하는 그들의 자세는 사뭇 진지하다. 자기 홍보 시대지만 셀피의 홍수는 사람들을 지치게 하고 서로에게 피로감을 느끼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셀피는 ‘좋은 사진인가?’라는 의문에 명확히 답하기는 쉽지 않다. 사실 거의 모든 셀피가 작품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사진을 ‘업’으로 삼지 않더라도 셀피가 작품성이나 주제 의식 같은 것들과 상관없다는 건 쉽게 알 수 있다. 다만 굳이 ‘어떤 사진이 좋은 사진인가?’라고 질문한다면 그 답변에 셀피가 포함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연예인처럼 예쁘게 나온 수많은 셀피 홍수 속에 난 아직도 아버지가 찍어준 아이들의 사진, 아들이 찍어준 어머니의 사진들을 가장 좋아한다. 기술이 범람하고 생활이 편리해질수록 사람들은 더 외로워져 간다.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고 알리기 위해 더 열심히 ‘셀피’를 찍고 더 열심히 온라인에 그 모습을 공유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셀피를 찍어왔다. 오늘도 본능적으로 카메라 렌즈는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다. 이제 카메라를 돌려 렌즈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던 순간의 행복을 기억해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