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오보 상태의 패션계

한여름 더위가 절정인 7월. 패션 매장 옷걸이에는 이미 두툼한 가을 옷들로 빼곡하다.
또 폭설로 인해 쇼윈도 앞에 눈이 쌓인 지난 1월엔 봄옷이 한가득. 지금 패션계는 심각한 날씨 오보 상태다.



도나 카란은 <보그 코리아> 인터뷰에서 패션계의 가장 큰 문제로 계절보다 한참 앞선 패션쇼 일정을 꼽았다. 날씨를 피부로 느끼며 입고 싶은 옷에 대해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모든 것을 미리 정해져 버리기 때문. 그녀는 이렇게 내뱉었다. “이 모든 게 헬무트 랭 때문이다!” 1998년 3월, 랭은 자신의 컬렉션을 런웨이가 아닌 온라인으로 공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해 9월에는 유럽(런던, 밀란, 파리)패션위크보다 앞서 뉴욕에서 쇼를 선보이겠다고 알렸다(당시엔 뉴욕이 패션위크의 마지막 도시였다). “우리 회사 입장에서 11월이 너무 늦다고 판단한 것뿐, 시스템을 바꾸려는 게 아니다.” 그러나 다른 뉴욕 디자이너들이 동참함에 따라 랭은 결과적으로 시스템을 바꾼 장본인이 됐다.

기자와 바이어를 비롯한 패션 관계자들만 컬렉션을 볼 수 있었던 과거에는 제 시기에 맞는 옷이 매장에 걸리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모두가 실시간으로 패션쇼를 볼 수 있게 된 지금은 이야기가 달라졌다. 쇼 직후부터 주문을 받고, 사람들의 구매욕이 사그라지기 전에 한 달이라도 빨리 매장에 제품을 진열하느라 매장 내부는 바깥 날씨와 점점 멀어지는 추세. 과거 지미 추를 이끌었던 타마라 멜론은 올봄 자신의 레이블을 준비하며 엇나가는 패션 주기와 타협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고객들은 패션쇼가 발표된 직후부터 매장에 진열되는 6개월 내내 같은 옷을 보게 된다. 정작 매장에 들어왔을 땐 이미 너무 많이 퍼졌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그때쯤이면 다음 컬렉션이 공개되니, 또 새로운 것을 원할 테고.” 멜론은 패션위크 주기와 상관 없이 1년을 총 네 번의 컬렉션으로 구성하고 있다. 각 컬렉션은 세 번에 걸쳐 매장에 배송되므로 결과적으로는 매달 신제품을 선보이는 셈. “고객들은 매장에서 낯선 옷을 발견했을 때의 희열을 다시 느끼게 될 거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구입한 옷을 그 자리에서 갈아입고 나가도 바깥 날씨와 딱 맞는다는 사실!”

스테파노 필라티는 아뇨나를 S/S나 F/W 대신 번호로 구분하는 시즌리스 브랜드로 재정의하면서 또 다른 의미의 ‘buy now wear now’ 컨셉을 지향하고 있다. 패션위크 스케줄에 따라 새 컬렉션을 선보이지만, 시즌에 상관없이 입을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밀라노 매장에 한해서 프레젠테이션 진행과 동시에 판매를 시작한다. 해외 매장에는 타 브랜드와 마찬가지로 7월 중순경부터 입고되는데, 다양한 아이템들(실크 블라우스부터 도톰한 외투까지)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나라별로 입고 시기가 조금씩 달라도 얼마든지 바깥 날씨에 맞는 옷을 구입할 수 있다는 것.

이 낯선 시도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지금처럼 프리 컬렉션 발표 시기가 앞당겨지기 전까지는, 간절기 컬렉션이 발표와 동시에 판매를 시작하곤 했으니까. 대표적 예가 버버리의 2011년 ‘에이프릴 샤워’ 컬렉션이지만, 그 역시 다음 해부터 메인 컬렉션 제품 일부의 판매 시기가 앞당겨지면서 단발성으로 사라졌다. 이 예는 매장 내부(판매하는 제품)와 매장 외부(바깥 날씨)가 맞지 않는 지금의 패턴이 불가피한 시스템상의 문제 때문이 아님을 보여준다. 타마라 멜론의 봄 컬렉션과 여름 컬렉션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 또한 그 증거. “지금의 신발과 가방 역시 지미 추 시절 18년간 함께 작업한 공장에서 만들고 있다. 그들은 오히려 새로운 생산 방식을 맘에 들어 한다.” 전문가들은 유통 스케줄을 원인으로 지적한다. 백화점과 부티크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1~2월에 봄, 7~8월에 가을, 11~12월에 리조트 제품 배송을 요구해왔다. 오랫동안 고착된 생산 스케줄을 바꾸는 것은 많은 회사들이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 해결책이 아예 시즌을 무시하는 것이든, 매달 신제품을 공수하는 방식이든, 근본적 문제는 옷과 백과 구두를 제대로 감상할 시간과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패션은 오직 빨리 보여주고 빨리 소비되는 패턴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 모든 게 제자리를 잡기 위해선 사계절에 맞춰 네 번의 패션위크를 열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높아만 가는 패션에 대한 관심과 새로움에 대한 열망은 무시한 채 느긋한 슬로 패션을 고집해야 하나? 아이러니하게도, 원인 제공자로 지목된 헬무트 랭은 해결책의 실마리를 일찌감치 언급했다. “만약 무언가 정말 좋은 게 있다면, 매년 6개월마다 사라지지 않을 거다.” 모든 것은 근본에 충실한 데서 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