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나고 찢어진 청바지

청바지의 어여쁜 아가씨가 처음 보는 날보고 윙크한다고?
그 바지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거나 여기저기 해졌더라도 놀라지 마시라!
그녀는 예쁜데다 유행에도 민감하다는 증거니까.



원로 가수 쟈니 리가 60년대 대한민국 최초로 찢어진 청바지를 입게 된 사연은 이렇다.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그는 동대문에서 팔던 구호물자를 뒤져 찢어진 청바지를 샀는데, 해진 부분을 수선하는 대신 바닥에 깔고 자서 한층 꼬질꼬질해진 청바지를 입고 방송에 출연했던 것. 섹스 피스톨즈나 커트 코베인보다도 앞섰으니, 한국 ‘찢청’의 조상으로 모실 만하다. 이렇게 앞선 패션 감각의 쟈니 리도 요즘 청바지를 보면 놀라 자빠질 것이다. ‘저렇게 너덜너덜한 청바지를 어떻게 입고 다니지?’

염색되지 않은 가로 실 조직이 창문 블라인드처럼 드러나고, 그 사이로 드문드문 속살이 비치는 정도는 가벼운 장식 수준에 불과하다. 요즘 청바지는 무릎이나 허벅지에 네모난 창문 하나쯤은 뻥 뚫어줘야 된다. 최근 킴 카다시안과 리한나가 입은 너덜거리는 데님 팬츠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면, 그게 바로 최신 유행인 강도 높은 찢청. 한 손에 스타벅스티를 들고 연한 분홍빛 발맹 재킷을 입은 킴의 리바이스 501은 허벅지부터 무릎 위쪽이 큼지막하게 잘려나가 그녀의 속살을 드러냈다. 리한나가 몇 년째 애용 중인(패션쇼 갈 때도 입고, 파티 갈 때도 입고, 심지어 길거리에서도 입는!) 보이프렌드 핏의 아크네 스튜디오 진은 마치 못에 걸려 찢어진 것처럼 여기저기 구멍 나고 실이 너덜거린다.

우연한 사고로 바지가 찢어졌고 어쩔 수 없이 입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과격한 훼손은 다분히 의도된 것이다. 하이패션에 찢청의 신세계가 다시 도래한 데는 런던 신인 디자이너 듀오 마르케스 알메이다의 데뷔 컬렉션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90년대 데님에서 영감을 얻었죠. 우리는 며칠 동안 <더 페이스> 매거진의 90년대 에디션을 훑어봤고, 오래 입어 낡고 해진 데님이 스트리트 스타일로 유행하게 된 시기에 집중하게 됐습니다.” 마르타 마르케스와 파울로 알메이다는 데뷔 무대였던 2011년 세인트 마틴 졸업 컬렉션 때부터 오버 사이즈의 찢어진 데님 룩에 집착했다. 포대자루처럼 벙벙한 데님 의상은 하나같이 단 처리를 하지 않아 올이 풀려 있고, 데님 팬츠들은 무릎이 ‘찢어 발겨져’ 앞에서 보면 반바지와 레그워머로 분리된 듯 보인다(혹은 실제로 분리돼 있다). “우리만의 젊은 코드를 확립하고 싶었는데, 데님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어요.” 그들과 함께 졸업 컬렉션을 준비했던 디자이너 계한희는 당시 부정적 평가 때문에 그 데님 의상들이 무대에 오르지 못할 뻔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컬렉션이 발표되자마자 에디터와 블로거들의 취재 요청이 빗발쳤어요. 그 친구들은 꾸준히 그 룩을 발전시키더군요.” 계한희 역시 국내 데님 전문 브랜드와의 협업으로 내년 봄 선보일 캡슐 컬렉션을 준비 중이다. “데님 소재 회사들은 찢어진 데님의 등장이야말로 데님이 유행할 징조라고 잔뜩 기대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여자들은 이 거칠고 제멋대로인 청바지에서 어떤 매력을 느낄까? 어떤 사람들은 말썽꾸러기처럼 보이는 이 청바지에 ‘브라더 진’이라고 이름 붙였다(대드 진, 맘 진, 보이프렌드 진에 이은 센스 있는 작명).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오빠나 남동생의 바지라는 뜻. 실제로 여자들이 입고 다니는 구멍 난 청바지를 보면 남동생의 해진 청바지를 갖다 입은 건지, 의도적으로 허름하게 만든 값비싼 디자이너 데님인지 구분하는 게 불가능하다. 다만 브라더 진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은 남자애들 특유의 껄렁한 태도와 반항의 기운이 가득하다는 것. 똘끼로 충만한 아웃사이더의 자유로움을 갈구할 때, 깔끔하고 세련된 차림이 지겨워졌을 때, 일종의 탈출구 같은 패션인 셈이다.



얼마 전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갈기갈기 찢긴 데님 팬츠를 색깔별로 구입한 계한희는 찢청 유행에 대해 이렇게 부연 설명했다. “중성적이고 반항적인 스타일도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인식이 확산됐기 때문이죠.” 미국 ‘보그닷컴’의 마켓 에디터 첼시 잘로페니도 자연스러움을 찢청의 장점으로 꼽는다. “억지로 짜맞춘 듯 보이지 않는, 현실적인 면이 있습니다. 2013년 봄 드리스 반 노튼 컬렉션의 체크무늬 셔츠와 함께 입으면 클린 그런지 룩을 연출할 수 있죠.” 한마디로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여자’ 이미지는 지나치게 꾸민 듯 보이지 않고 신선하면서도 분방한 느낌을 준다는 것!

지금 데님 소재 회사와 데님 전문 브랜드들은 좀더 자연스럽고 독특한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을 연구 중이다. 프리미엄 데님 브랜드에 원단을 제공하는 이스코(Isko)는 코팅된 실을 긁어내고, 일본의 데님 가공업체 캐피탈(Kapital)은 일일이 손으로 천에 변형을 가하며, MiH 진은 진짜 해진 것처럼 보이도록 해진 실을 찢어진 부위에 바느질한다. 리바이스는 최신 디스트레스드 진에 보다 과격하게 ‘망가진’ 효과를 내기 위해 칼로 자르고 누비는 방식을 추가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DIY를 통해 세상에 둘도 없는 나만의 데님을 만드는 것! “무릎에 구멍을 내는 건 가장 순수한 형태의 데님 맞춤 제작이다. 요즘 진짜 멋쟁이들은 걸을 때마다 찢어진 부위가 팔락거리는 바지를 자랑스럽게 입고 다닌다.” ‘nowfashion.com’ 편집장 제시카 미쇼의 얘기다. 그녀가 묘사한 ‘진짜 멋쟁이’가 되고 싶지만, 대체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막막한 이들을 위해 전문적으로 리폼하는 곳도 생겼다. 킴 카다시안이 입은 리바이스 501 역시 리바이스의 LA 쇼룸 ‘Levi’s Haus’에서 주문 제작한 제품이다. LA의 데님 전문 매장 ‘데님 리파이너리’의 자넷 성은 데님 제품 판매뿐 아니라 다양한 커스터마이징(금박을 입히거나 와펜을 장식하는 등) 리폼 주문도 받는다.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의뢰는 낡아 보이게 만드는 겁니다. 리폼할 땐 가능한 주인의 흔적은 그대로 남겨두죠.”

크게 거슬리지 않을 만큼 적당히 닳은 모양을 만들거나 계속해서 구멍이 커지지 않길 바란다면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안전하다. 그러나 요즘처럼 손바닥, 혹은 그보다 더 큰 구멍이나 생채기로 가득한 찢청을 시도해 잘나가는 ‘찢청녀’가 되고 싶다면, 집에서 직접 시도해봐도 좋다. 보기 좋은 애교 수준은 이미 넘어선 지 오래, 지금은 브루스 배너가 헐크로 변신할 때처럼 무지막지한 과격함이 포인트니까. 과연 이걸 바지라 부를 수 있나 의구심이 들 정도로 망가지면 망가질수록 패셔너블해지는 상황. 아프니까 패션이 아니라, 망가지니까 패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