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힘 1

제주도엔 분명 삶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여행의 섬 제주도에 정착한 이들과 함께 제주도는 더욱더 흥미진진한 공간이 돼가고 있다.
나른한 로망에서 꿈을 이뤄가는 터전이 된 신도시 제주, 그리고 새로운 제주 사람들.

제주는 로망의 섬이었다. 월정리 해변에 서정적으로 놓인 낡은 의자로 요약되는 고즈넉한 삶. 최남단의 온화한 기후, 갖가지 아름다움을 보존한 천혜의 자연환경, 한반도에서 손꼽는 명산과 맑은 바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는 풍부한 식재료. 그곳 사람들은 한국 본토를 육지라 부르고, 육지에서 제주도로 이주하는 것을 ‘이민’이라고 불렀다. 누군가는 제주도를 “섬나라”라고 말하기도 했다. 식당마다 ‘제주산’과 ‘국내산’이 따로 표기되고 있는 그곳은 여전한 탐라국, 분명한 섬나라다. 육지 사람들은 바다 건너 솟은 로망의 섬 제주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그렇게 육지 사람들이 제주도를 채워갔다.

본격적인 이민 러시가 시작된 건 2010년부터였다. 서울 사람들은 나른한 희망을 품고 제주도에 내려와 어정버정 삶을 풀었다. 저가 항공이 수시로 들락거려 서울이 멀지 않았고, 그때만 해도 연세 200만~300만원짜리 농가 주택도 흔했다. 집을 지어 올릴 땅도 평당 10만원 아래로 살 수 있었다. 이후, 개축과 신축 수요가 폭발하며 제주도엔 건축 붐이 일었고 여전히 전국 최고치다. 청담동 미용실 원장님이 아니면 헤어 스타일링을 맡길 수 없다고 믿으며 살던 사람들이 이제 머리를 질끈 묶고 ‘몸빼’ 차림에 선블록도 바르지 않은 채 “당근밭에 새순이 돋는 경이가 더 가치 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제주도 여행 붐과 함께 광풍이 시작된 게스트하우스나 해변 카페를 차리고 별일 없이 살아가는 느린 삶을 칭송했다. 24시간 편의점 없이도 삶은 충분히 근사하다고 말했다. ‘왜 제주도인가’라는 질문에 이민자들은 ‘자연 속 단순하고 느린 삶의 근사함’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낭만적인 정착 여행은 곧 일상이라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나른한 삶의 유효기간은 통장 잔고의 바닥까지이고 단순한 삶일수록 채산성이 떨어진다. 적당히 카페나 게스트하우스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무방비 상태의 낙관으로 이민 간 이주자들은 철새 떼처럼 유턴해 올라오기도 했다. 인생의 다운시프트는 그것을 꿈꿀 때와 현실로 맞닥뜨렸을 때의 모양이 다르다. 오래된 농가 주택에는 다리 많은 온갖 벌레가 기어 다녔고, 바다가 보고 싶다고 해서 문을 열어둘 수도 없었다. 제주도엔 모기도 많고 파리는 더 많다. 만만해 보이던 카페나 게스트하우스도 손에 익지 않은 그것이 생계와 결부돼 있는 한 결국 회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스트레스의 원천이라는 득오의 순간이 온다. 이제 수많은 이민자들에게 던져진 질문은 ‘제주도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되었다. 지금 제주도는 치열하게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풀고 있다.

제주도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문제 풀이 과정은 점차 형체를 갖춰가고 있다. 그 결과 요즘 제주도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무척 흥미롭다. 갤러리가 들어서고 가치 있는 재즈 공연이 열린다. 낯선 손길로 무엇이든 만들어내어 그것을 지역 커뮤니티마다 자생적으로 생겨나고 있는 플리마켓에서 판매한다. 세련된 농부가 등장했으며 식사 빵과 파인다이닝 문화가 뿌리내리고 있다. 작은 서점이 생기는가 하면, 제주도만을 다루는 잡지가 창간되기도 했다. 마치 문화적 창세기의 한가운데인 것처럼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공간을 찾았다.

철새 도래지 하도리 마을 안에 있는 이영주의 집 겸 직장, 카페 하도. 디자인 회사를 정리하고 제주도에 내려와 살 집으로 인테리어를 했지만 카페를 하게 되면서 가정집 거실 같은 독특한 분위기가 됐다.

세이렌이 된 음악가들
‘소길댁’이라는 닉네임의 블로거가 등장하자, 모든 연예 매체와 SNS는 갓 생겨난 그 블로그의 주소를 황급히 퍼다 날랐다. 소길댁의 정체는 이효리. 그녀와 이상순이 제주도에 차린 신혼집이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에 있다. 이 대단한 여인(그녀가 데뷔한 이래 모든 것이 대단했지만, 이번엔 소길리를 ‘이효리 별장지’로 불리게 만들었고, 덕분에 주변 땅값은 네 배까지 올랐다)은 소길리에서의 ‘인생 시즌2’를 여과 없이 담담하게 블로그에 풀어내고 있다. 이상순은 제주도 집에 작업실을 차렸다. 절친한 음악가 김동률은 제주도에 내려가 작업실에서 올해 발매를 목표로 준비 중인 새 앨범을 위해 이상순의 기타 연주를 녹음해갔다.

그 자리에는 루시드 폴도 있었는데, 그는 이상순과는 좀 다른 행보를 걷고 있는 음악계 이민자다. 키우는 강아지를 데리고 훌쩍 제주도로 내려온 그는 밤에는 음악을 하고, 낮에는 농사를 짓는다. 깻잎과 쑥갓을 키워 먹는 이효리의 텃밭 농사와 달리, 귀농 교육을 병행한 본격적인 농사다. 농부 친구들과 1,000평도 넘는 밭을 빌리기도 하고, 남의 밭 수확을 돕고 일당을 받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 ‘물고기마음’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음악적으로도 게을러지지 말아야 지금 이렇게 사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으니 부지런히 기타도 잡고 이런저런 스케치도 하고 있어요.” 루시드 폴의 제주도 집에도 작업실이 차려져 있다.

제주도는 몇 가지 장비만 있으면 혼자서도 결과물을 낼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이에겐 정착이 쉬운 곳이다. 이를테면 PC와 인터넷만 있으면 되는 소설가와 번역가, 만화가, 캔버스와 물감으로 충분한 화가 같은 직업 말이다. 물론 음악가도 글쟁이나 그림쟁이 못지않게 고립과 고독을 좋아하는 직업이라, 제주도에 작업실만 뚝딱 차리면 얼마든지 정착할 수 있다. 집 앞의 바당(제주도에선 바다를 ‘바당’이라 부른다)과 곶(역시 제주어로 ‘숲’이다)이 매일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되어주는 것은 기분 좋은 덤이다. 그래서 이효리와 이상순 이전에도 오래전부터 조동익과 장필순, 윤영배가 제주도에 내려가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하나음악 출신 뮤지션들의 음악기획사 ‘푸른곰팡이’ 패밀리다.

‘쫄깃쎈타’의 ’부침개 콘서트’ 역시 강력한 패밀리십으로 운영되는 공연이다. 이제까지 언니네 이발관, 3호선 버터플라이, 김마스타, 우쿨렐레 피크닉, 허클베리핀, 좋아서 하는 밴드, 가을방학, 백현진, 방준석, 씨 없는 수박 김대중, 짙은 등이 음악 칼럼니스트 김작가와 메가쑈킹 고필헌의 꼬임(?)에 넘어가 ‘노플러그드’로 무료 공연을 했다. 홍대 앞을 그대로 제주도로 옮겨온 듯한 라인업의 이 공연은 어디까지나 인디 음악가들과의 각별한 친분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거기에 2009년 제주도로 내려간 NXC의 활약도 빠지지 않는다. 모리 동동 문화카페를 통해 제주도 지역사회에 환원하고 있는 넥슨은 부침개 콘서트를 후원하며, 카페 하도의 공연도 돕고 있다.

카페 하도를 위시해 제주도에선 요즘 동서남북으로 작은 음악 공연들이 열리고 있다. 서쪽에는 제주시 한림읍 금능리의 카페 그 곶, 동쪽에는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카페 하도,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카페 세바가 활약 중이다. 엄청난 LP 컬렉션을 보유 중인 카페 하도에서는 재즈 피아니스트 임인건의 공연이 정기적으로 열리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대단한 재즈 연주자들이 제주도에 모여들었다. 그는 ‘하도리 가는 길’이라는 곡을 지어 카페 하도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코러스는 급히 결성된 ‘하도리 합창단’이 불렀다. ‘하도리 가는 길’ 말고도 제주를 노래하는 곡 여럿을 작곡했다. 잡지와 단행본 업계에서 이름을 알린 편집 디자이너 출신의 카페 하도 사장 이영주는 이렇게 말한다. “공연은 쭉 해나갈 거예요. 공연장으로 만들어지지도 않았고, 사실은 집으로 꾸며진 공간에 차린 카페지만 공연에서 얻는 기쁨이 많아요. 항상 적자를 두려워하지만요.”

제주도 사람들은 배타적이고 시샘이 많다는 선입견도 있다. 무뚝뚝하고 정 없어 보이는 첫인상까지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정을 트고 보면 제주도는 한량없이 사람을 품는 천성을 가졌다. 앞에서는 매정하다가도 남몰래 집 마당에 먹거리를 두고 가곤 하는, 알고 보면 포근한 이들이다. 카페 하도에도 이웃들이 남몰래 가져다준 선물이 많이 도착했다. 영주 씨는 이제 본업이었던 출판 디자인보다는 옆집 할머니와의 친분 쌓기에 더 관심이 많아졌다. “어느 날 마당을 보니 갓 뽑은 무 네 개가 쪼르르 누워 있는 거예요. 그게 기분 좋아서 한나절 그대로 두고 창 너머로 힐끗 보며 좋아하고, 또 힐끗 보고 씨익 웃고 그랬어요.”

농가 주택을 최소한으로 고친 작곡가 방승철의 집. 간소하게 꾸민 작업실이지만 작업하기에 부족함은 없다. 작업 중 쉬고 싶어질 때면 뒷마당에서 노는 닭을 바라보는 한가한 삶이다.

이웃과 친분 쌓기에 열중인 것은 작곡가이자 프로듀서 방승철 역시 마찬가지다. 카페 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제주시 구좌읍 상도리에 살고 있는 그는 뒷마당에서 알을 잘 낳는 닭을 키운다. 그 닭들은 뒷집 텃밭에 날아가 놀기도 해 이웃 할머니의 원성을 듣기도 하는데, 그는 변죽 좋게 허허 웃으면서 닭을 불러들이며 마을에 적응하고 있다. 개방적인 성격의 그는 이웃뿐 아니라 우연히 옷깃이 스친 그 누구라도 집으로 초대하곤 한다. 이른바 ‘코딱지 게스트하우스’다. 코딱지 게스트하우스의 대표 메뉴인 닭곰탕(물론 사온 닭고기)은 제법 평이 좋다.

“제주도는 무료하게 지내면 얼마든지 무료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에요. 이민자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한정 없이 세월이 가기도 하고요. 하지만 제주도에서 잘 살자는 생각이 들고 보면 스스로 그 시간을 잘 채우기 위해 무엇이든 하게 되죠. 요리를 해서 손님을 대접하는 것, 물과 전기를 아껴 쓰는 생활을 몸에 익히는 것, 붕 떠 있던 서울 생활을 잠잠하게 가라앉히는 것, 동요 작곡가의 맑음으로 늙기 위해 노력하는 것… 지금은 몇 군데 수강생들을 찾아가며 기타 레슨을 하고 있어요. 강산에 형의 프로듀싱도 맡고 있고요.” 방승철을 만난 그날 오후에도 강산에가 제주공항에 내려 그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방승철과 강산에는 낚시도 하고, 여기저기 걸어서 돌아다니기도 하며 제주도의 모든 것이 선사하는 영감을 얻는 특별한 앨범 작업을 하고 있다. 방승철이 손님을 위해 남겨둔 쪽방에선 그날 밤에도 강산에가 잠을 청했을 것이다. 다른 모든 손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디자이너 김영진 부부의 세컨드 하우스와 차이킴 유랑매장, 그리고 카페 서광춘희는 서로 연결돼 있으면서, 동시에 분리돼 있다. 김영진 부부와 송창훈은 마치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바다로 간 패션 피플
차이 김영진의 유랑매장이 제주도에 놀러 왔다. 신사동 카페 무이무이, 한남동 비채나, 평창동 가나아트센터를 유랑하던 유랑매장은 이제 서귀포시 안덕면에 자리를 잡고 있다. 컨테이너 유랑매장을 가운데 두고 앞으로는 카페 서광춘희가, 뒤로는 한복 디자이너 차이 김영진 부부의 두 번째 집이 있다. 디자이너 김영진은 연극 연출을 공부한 연극 배우에서 체루티1881과 루이 비통의 슈퍼바이저로, 거기에서 가나아트센터의 아트 컨설턴트로, 다음으로는 한복 디자이너로 또 변신해 차이 김영진 브랜드를 론칭하는가 싶더니 금세 레디투웨어 차이킴을 론칭해 한복의 뉘앙스를 살린 단아한 기성복으로 세상을 계속해서 놀라게 했다. “어디까지나 세컨드 하우스죠.” 하지만 그녀의 두 번째 집은 단지 세컨드 하우스에 불과한 건물이 아니라 사람을 품기 위한 공간이다. “아무나 와서 주무세요”라는 편안한 태도를 곳곳에 장착한 채 다소곳한 얼굴로 제주도의 풍성한 녹음을 지켜보고 있었다. 손님 초대를 즐겁게 여기는 부부는 작은 집이지만 손님을 먹이고 재울 주방과 침실만큼은 정말 쾌적하고 안락하게 꾸며놨다.

김영진 부부는 농가를 소박하게 개조한 이 집을 마련하기 전에도 제주도를 10여 년 들락거렸다. 여러 가지 주거를 경험하며 정말 제주도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시험한 셈이다. 그 모색의 결론이 마당 앞으로 하얗게 나부끼는 메밀밭이 펼쳐진 작은 집이다. 서광춘희의 송창훈 사장은 김영진의 두 번째 집이 있게 한 공로자이자 공모자다. 서광춘희는 그들의 두 번째 집이 자리한 서광리의 지명을 땄고, 춘희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서 땄다. 쥐들이 살던 버려진 창고를 공들여 개비한 이 공간은 카페가 되었다. 그는 포도호텔 지배인 출신답게 호텔리어 특유의 도회적인 단정함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지만 실은 3대가 모두 제주에 사는 토박이 제주도민이다. 해녀인 할머님이 물질해 따주시는 성게, 부모님의 밭에서 난 유기농 채소를 서광춘희의 메뉴에 감사한 마음으로 쓰고 있다. 제주도에 살던 도시인인 그도 김영진의 공모자가 되면서부터 흙의 감촉을 처음 느껴봤다. “저 메밀밭도, 별별 채소가 다 자라는 조그만 텃밭도 손수 일군 거예요. 손끝에 흙빛이 거칠게 들었어요.”

매일 제주시에서 40분 거리인 서광춘희까지 출퇴근하는 송창훈에게도, 서울의 첫 번째 삶과 제주도의 두 번째 삶을 오가는 김영진에게도, 제주도는 ‘아직’ 본격적인 삶의 터전이 아니다. 언제까지고 제주도가 이런 절충의 영역에 있을 수도 있다. 사실 제주도 이민이라는 문제에 있어 정답은 이런 절충에 있다. 서울에서의 현실과 제주에서의 현실 사이 간극이 스위치 내리듯이 단숨에 단절시키고 다른 쪽을 택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김정한은 어제는 신사동 스튜디오에서 셀러브리티의 헤어를 매만지고, 오늘은 제주도의돌담 위에 걸터앉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삶을 산다.

국내에서 최고라 손꼽히는 헤어 아티스트 김정한은 2013년 9월, 패션 피플을 불러 모은 작별 파티를 열고 서울을 떠나 제주도에 내려왔다. 계획은 조카가 빵을 굽고, 자신은 카페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서귀포 출신인 그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제주도에 내려가 살고 싶다는 얘기를 하곤 했었다. ‘박수 칠 때 떠나자’는 마음으로 제주행을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은 결정적으로 패션 사진가 보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경험하면서였다. “제가 먼저 소문을 냈죠. 일 접고 제주도에 내려가 산다고. 그러지 않고서는 계속 서울에 눌러앉아 있을 것 같았거든요. 부동산 경기가 침체돼 있을 때였으니까 집을 내놓고 팔릴 때까지 핑계 삼아 느긋하게 준비하면 될 것 같았어요. 아니, 근데 무슨 집이 두 달 만에 나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르게 내려오긴 했죠.” 그의 두 번째 삶은 아직 온전히 시작되지 않았다. 마음은 제주도에 가 있지만, 몸은 자주 서울에 상경한다. 그는 여전히 화보나 광고 촬영을 위해 서울에 올라와 일을 하고 있다. 마음같이 되지 않는 카페 신축 공사는 아직 첫 삽도 뜨지 못했지만, 제주도에서 보내는 시간은 자연이 가깝다는 것이 만족스럽다. “해봐야 아는 거죠. 좀 해보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가뿐하게 서울로 돌아올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까 그만큼 열심히 고민하는 거고요.”

집 공사를 도와준 친구들의 손길이 곳곳에서 느껴지는 최미애의 집. 낮은 산에 둘러싸인최미애의 집에서는 새소리가 많이 들려온다. 그 새들이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 아들 이구름이 어릴 적 갖고 놀던 망원경을 꺼내 버드 워칭을 시작했다.

<보그>와 오랜 우정을 유지하고 있는 모델 출신의 메이크업 아티스트 최미애는 세상의 많은 곳을 여행했지만, 결국 제주도에 정착했다. 제주시 구좌읍 덕천리에 최미애의 호젓한 집이 놓여 있다. 게스트하우스 겸 카페로 운영하기도 했지만 백제예술대학교 모델과 학과장으로 서울을 오가야 해서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결론을 냈다. 아침이면 버드 워칭을 하고, 텃밭을 고르고, 점심때면 음악을 틀어놓고 커피를 마시는 고요한 삶도 필요했다. 가족들과 함께 강아지까지 데리고 버스를 개조한 캠핑카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한 그녀에게 너무 고적한 삶이 아니냐고? 사진가 조선희, 모델 장윤주 등 그녀가 서울에서 연을 맺은 다정한 친구들이 그녀를 자주 찾아오고, 혼자 있는 시간을 쪼개 제주시의 동물보호소에 봉사활동을 다니기도 한다. 게다가 봄비, 가루, 노아 세 마리 고양이와 함께하는 삶이기에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충만하다. 최미애는 제주도에 뿌리를 박고서 꿈을 이뤘다. “제주도가 제일 좋아요. 어딜 가도 이만한 데가 없어요. 50세가 되면 대안학교를 여는 것이 오랜 꿈이었어요. 올해로 딱 50세가 되었고, 성산고등학교의 아이들을 방과 후에 가르치면서 꿈을 이뤘죠.” 아버지는 어부, 어머니는 해녀인 제주도의 아이들은 좀더 많은 보살핌이 필요해 보였다.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어떤 사람이 되면 좋을지를 다양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최미애는 아이들과 함께 바닷가에 나가 파도에 쓸려온 쓰레기를 모아 재활용 예술품을 만들고, 거창하지 않은 미술을 가르친다. 메이크업, 기초적인 영어, 삶의 태도…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모두 나눠주는 삶이다. 친구들과 함께 손수 꾸몄다는 그녀의 집 곳곳에는 아이들과 함께 만든 공예품들이 수줍게 놓여 있었다.

해녀작가 장미라는 앞마당에서 성산일출봉이 곧바로 보이는 멋진 집에 작은 게스트하우스를 차렸다. 게스트하우스 곳곳에는 그녀의 해녀 사랑이 묻어난다.

일상이 된 그림 같은 삶
한때 제주도 이주를 꿈꾸는 여행자들 사이에선 허무맹랑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해녀가 부족해서, 젊은 여자가 해녀를 하겠다고 하면 마을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물질도 가르쳐준대!” 근거도 없고 현실적이지도 않은 이 소문은 해녀학교가 생기고 졸업생들이 배출되면서 거짓임이 확인되었다. ‘해녀작가’로 불리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장미라는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에서 게스트하우스 ‘숨비공작소’를 운영하면서 해녀를 주제로 사진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 그녀는 해녀가 되는 문턱이 소문만큼 낮지는 않더라도,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을 줄로 믿고 해녀를 꿈꾸었다. 한수풀해녀학교에 6기로 입학해 1년 과정을 마쳤지만 실제로 해녀가 되기는 쉽지 않다.

제주도에서는 해녀(와 해남) 인구의 노령화를 염려해 온갖 지원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해녀 커뮤니티는 새로운 해녀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배타적인 구조다. 어촌계에 가입하기 위한 가입비, 수협에 조합원으로 등록하기 위한 출자금까지 내야 바다에 들어가 전복이며 성게, 문어를 잡는 해녀가 될 수 있지만 그것도 기존 어촌계 해녀들이 모두 동의해야 가능한 일이다. 바다의 것들이 바다의 것이 아니라 마을의 공동 재산이기 때문이다. 해녀 육성 정책의 일환인 해녀학교에서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장미라는 언젠가 ‘해녀 삼춘(제주도에서는 손윗사람을 삼춘이라고 부른다)’들이 자신을 받아주길 기다리며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해녀 사진을 찍고 있다. 당장 해녀가 될 수 없는 대신 스쿠버다이빙을 배워 해녀들이 물질할 때마다 수중 촬영을 하려는 열정적인 계획도 갖고 있다.

카페 도모는 여섯 명이 들어가면 꽉 차버리는 작은 카페다. 여여는 딱 이 정도가 ‘엄두 낼 수 있는’ 최대치였다고 말한다. 여여는 이 작은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천천히 잼을 만든다.

잡지 기자 출신인 여여는 서울을 떠나 제주도에 오기 전 괴산에서 1년가량 농사를 배우기도 했다. 처음엔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에 연세 집을 구해놓고 1년 동안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면서 놀았다. 누군가 “아, 한 달이라도 좋으니 제주도에 살고 싶다!”고 할 때의 생활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한 삶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산책하고, 개를 산책시키고, 더우면 월정리 바다에 들어가 수영을 즐겼다. 연세 계약이 끝난 후에는 옆 마을인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로 이사했고, “개 사료값은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모’라는 이름의 아주 작은 카페를 차렸다. 그림 같은 생활을 하던 중에도 떠나지 않는 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생각이었다. 제주도에서만 할 수 있을 뭔가를 도모하고 싶어서 카페에 도모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 카페에서 조용히 유기농 잼을 만들어 판다. 유기농 재료로 정성껏 만든 그녀의 잼은 먹어본 사람들 사이에서 평판이 무척 좋아 택배 주문도 꽤 들어온다.

“제주도는 시골이 아니에요. 차라리 신도시죠. 생활 수준이나 물가가 신도시에 맞춰져 있어요.” 생활 패턴 역시 광역버스나 지하철을 타지 않을 뿐, 도시에서와 다를 바가 없다. 아침이면 카페 문을 열어야 하고, 유기농 당근이나 한라봉을 잼으로 만들고, 손님에게 커피와 샌드위치를 팔아야 한다. “앉아 있으면 많은 생각을 해요. 매일 아주 많은 생각을 하며 살죠.” 이렇게 살까, 저렇게 살까, 어디로 갈까, 혹은 이대로 여기에 있을까 하는 고민은 아주 요망해서 서울을 떠난다고 버려지지 않는다. 제주도까지 기어이 물을 건너 따라온다. 많은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여여는 오늘도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 얼굴이 불행해 보이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