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렌, 애냐, 조안, 릴리, 캔디스. 18주년을 위해 모인 슈퍼 모델 5

<보그 코리아> 18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당대 슈퍼모델 5명이 커버 슈팅을 펼쳤다.
카렌, 애냐, 조안, 릴리, 캔디스가 선보이는 올가을 가장 핫한 스타일.

Portrait of a Lady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의 소유자, 슈퍼모델 카렌 엘슨. 여전히 반항아 같은 이미지를 간직한 이 우아한 모델에겐 트위드 체크 재킷과 가죽 레깅스 팬츠가 잘 어울린다. 포인트는? 머리 컬러와 매치되는 붉은 톤의 블라우스!

“위기, 충돌, 전쟁 같은 상황을 모두 이겨낸 진정한 패션 생존자들이야말로 강력한 개성의 소유자들일 겁니다.” 몇 년 전,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는 <보그 코리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재능에 대한 의혹과 비판적 시각을 이겨낸 뒤 패션계를 호령하는 디자이너가 된 그의 선언은 패션 디자이너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모델들도 티시가 언급했던 혹독한 검증 과정을 거친다. <보그> 18주년 기념호 커버에 등장한 다섯 명의 슈퍼모델들 역시 냉혹한 무명 시절과 걷잡을 수 없는 슬럼프를 빛나는 개성 하나로 이겨낸 진정한 생존자들이다.

다섯 명의 ‘서바이버’들을 만나기 위해 잠시 3월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스타일링을 맡은 스티브앤요니의 서울 컬렉션을 위해 서울에 온 스타일리스트 김예영은 <보그 코리아> 사무실에 들르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8월호 커버는 어떻게 진행하죠?” 매달 슈퍼모델 촬영을 거침없이 해치우는 그녀지만, 창간 기념호인 8월호만큼은 쉽지 않은 숙제다. “거장 사진가 A가 <보그>를 찍고 싶어 하는데 어때요?” “지금 제일 핫한 모델 B를 캐스팅하려고 하니 에이전시에서 신인 모델들 촬영을 함께 요구하는데 어쩌죠?” 머리를 맞대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해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의외로 쉬운 곳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지난해 3월, 200호 특집을 위해 촬영한 사스키아, 조안, 다우친, 다리아, 카티라는 당대 톱 모델들의 커버가 <보그> 오디언스 사이에 반향을 일으킨 데서 착안, 슈퍼모델 5명과 릴레이 슈팅을 감행하기로 결정한 것!

첫 번째 순서는 사진가 선정. 패션계의 거장부터 신예 사진가들까지 여러 이름이 언급됐지만, <보그 코리아>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유연한 태도다. 다양한 요구에 너그럽게 대처해야 하고, 돌발 상황에도 유연하게 대처할 성정의 사진가. 그렇게 해서 선택된 인물은 지난 5월호 <보그> 칼리 클로스 커버 촬영 때 만난 세바스찬 킴이다. 스티븐 마이젤의 오랜 어시스턴트 출신으로, 다양한 사진 연출이 가능한 데다 여러 수정 사항도 신속히 해결하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다음은 전쟁 같은 모델 캐스팅. 여러 에이전시와의 까다로운 협상을 매끄럽게 진행할 노하우와 파워를 갖춘 베테랑 캐스팅 디렉터, 잰 러들럼이 합류했다. <보그>가 원하는 모델들을 구하기 위해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준비하고, 모델 스케줄이 불가능할 땐 재빨리 대안을 제시하는 등 그녀의 완벽한 일 처리는 프로페셔널 그 자체. 담당 기자와 스타일리스트, 사진가, 그리고 캐스팅 디렉터 사이에 무려 100통 이상의 이메일이 오간 후, 비로소 8월호 <보그> 커버 걸들이 확정됐다. 빨강머리 뮤지션 겸 모델 카렌 엘슨, 멀티플레이어의 재능을 갖춘 애냐 루빅, 모델 랭킹 1위를 지키고 있는 흑진주 조안 스몰스, 베이비 페이스 모델에서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한 릴리 도날슨, 그리고 완벽한 보디라인의 소유자 캔디스 스와네포엘.

In her heart영롱한 눈빛이 아름다운 카렌 엘슨. 가슴 라인이 시원하게 드러나는 가죽 드레스엔 심플한 목걸이 하나면 충분하다.

촬영일이었던 6월 12일, 맨 먼저 스튜디오에 도착한 모델은 카렌 엘슨이었다. 뉴욕이 아닌 테네시 주의 내슈빌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는 그녀가 <보그> 촬영을 위해 뉴욕으로 날아와 공항에 내리자마자 브루클린 스튜디오로 달려왔다. 최근 <보그>와 세 차례 만났던 그녀는 이제 스태프들을 ‘달링’이라고 불러가며 친근함을 드러냈다. 뒤로 질끈 묶은 머리에 보랏빛 꽃무늬 시폰 엠파이어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슈퍼모델이라기보다 편안한 옆집 언니에 가까웠다. 포트레이트 촬영을 위해 간단히 헤어와 메이크업을 준비하던 그녀가 휴가 계획을 들려줬다. “이번 촬영이 끝나면 아이들(딸 스칼렛과 아들 헨리)과 함께 코츠월드(Cotswolds)에 갈 거예요. 끝없이 이어지는 들판과 얕은 언덕이 아름답죠. 거기서 가족과 오붓하게 휴가를 보낼 거예요.” 꿈꾸듯 이야기하던 그녀가 스태프들에게도 여름 휴가 계획을 물으며 촬영을 준비했다.

사실 우리가 알던 카렌 엘슨은 이토록 편안하고 여유로운 모델이 아니었다. 97년 스티븐 마이젤에 의해 빨강머리로 변신하고 눈썹을 싹 민 뒤 이탈리아 <보그> 화보에 등장한 순간은 패션 모멘트 그 자체. 단박에 슈퍼모델로 떠오른 그녀는 샤넬, 아르마니 등의 톱 브랜드 광고는 물론, 전 세계 <보그> 커버와 화보에 차례로 등장하며 97년 ‘올해의 모델상’까지 수상했다. 하지만 곧 찾아온 슬럼프로 그녀는 우울증에 걸렸고 새로운 후배들의 등장에도 불안해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자신만의 스트레스 탈출법을 발견했다. 바로 음악이었다. ‘시티즌 밴드’ 보컬로 활동했던 카렌은 2010년 <The Ghost Who Walks>라는 제목의 앨범도 발표했다. “저는 매지 스타, 에밀루 해리스, 네코 케이스, 롤링스톤스를 좋아해요. 올 가을과 겨울에는 새 음반을 녹음할 거예요.” 뮤지션으로서 그녀가 추천하는 올여름 음악은? “돌리 파튼의 ‘Jolene’과 ‘9 to 5’는 언제 들어도 좋아요!”

Home Goddess여신 같은 몸매로 새롭게 슈퍼모델 자리에 오른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다크호스, 캔디스 스와네포엘. 늘씬한 다리 라인을 자랑할 수 있는 그래픽 패턴의 미니 드레스를 선택했다.

Piercing Eyes심플한 터틀넥을 입은 캔디스에게선 장난꾸러기 10대 소녀의 표정이 엿보인다.

촬영이 시작되자 약속이라도 한 듯 두 번째 모델이 스튜디오에 들어섰다. 카렌처럼 스티븐 마이젤에 의해 운명이 바뀐 행운의 모델 캔디스 스와니포엘. 마이젤은 수영복과 란제리 모델로 알려진 그녀를 하이패션 세계로 끌어들였다. 2011년 2월 이탈리아 <보그> 커버에서 완벽한 몸매를 자랑했던 그녀는 이제 지방시 런웨이(촬영을 마친 뒤 2주 후 파리의 지방시 남성복 컬렉션에 깜짝 등장했다)에 서는 하이패션 모델로 성장했다. ‘빅토리아 시크릿’의 천사 중 한 명이기도 한 그녀는 특유의 볼륨 넘치는 몸매가 잘 드러나도록 스키니 진과 ‘뉴욕’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티셔츠 차림으로 인사를 건넸다. ‘왕언니’ 카렌의 촬영에 방해될까 봐 조용하게 인사하던 그녀는 월드컵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안색이 밝아지며 목소리가 커졌다. “혹시 브라질 가는 사람 없어요? 저는 이 촬영이 끝나는 대로 브라질로 갈 거예요. 거기서 다우친, 아드리아나와 함께 축구를 보기로 했거든요!”

모델들의 촬영 컨셉은 두 가지였다. 커버를 위한 정적인 포트레이트 촬영과 완벽하게 꾸민 세트에서의 화보 촬영. “60년대식 복고풍 컨셉의 촬영이죠. 낡은 호텔 방 같은 실내에서 옷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여인들을 떠올렸습니다.” 적극적으로 세트 촬영을 주도한 사진가 세바스찬 킴이 설명했다. 다섯 명의 모델들과 이틀간의 촬영을 위해 세트 디자이너 앤 코크는 일주일 전부터 도면을 준비하고 일정에 맞춰 완벽한 세트를 마련했다. “60년대 말 첼시 호텔 같은 분위기인걸요?” 촬영을 위해 침대 위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카렌이 세트를 둘러보며 말했다. 당대 뮤지션들과 아티스트들의 아지트였던 이 전설적인 호텔은 <보그>가 꿈꾸던 공간이었다. 완벽하게 촬영 컨셉을 이해한 모델들 덕분에 첫날 촬영은 후다닥 마무리됐다.


London Cool베이비 페이스의 신인 모델에서 우아한 이미지의 슈퍼모델로 성장한 릴리 도날슨. 아일릿 레이스로 장식한 블라우스와 니트 베스트, 그리고 가죽 레깅스 팬츠가 런던 쿨 걸 이미지 그 자체다.

Regal Beauty올가을 니트 터틀넥은 재킷의 이너웨어로 빼놓을 수 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화보 속 의상과 액세서리, 주얼리는 모두 루이 비통(Louis Vuitton).

이틀 뒤인 토요일 아침 7시. 스태프들이 일사불란하게 준비하는 동안 두 번째 날의 첫 모델인 릴리 도날슨이 스튜디오에 들어섰다. 주말 아침 일찍 촬영장에 오는 것이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렇게 답했다. “이건 제 직업인걸요. 전혀 힘들지 않아요.” 얼핏 차갑게 느껴질 만큼 쿨한 릴리의 태도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했다. 바비 인형 같은 외모로 2003년 데뷔한 릴리는 젬마 워드, 릴리 콜 등과 함께 베이비 페이스 모델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다른 모델들과 달랐던 건 그녀에게서 풍기는 무심한 듯 쿨한 태도. 사진가 아버지와 유명 화가였던 할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그녀는 그림 그리는 것이 취미였고, 파티장보다 갤러리 가는 것을 더 즐겼다. 한마디로 런던의 쿨함을 온몸에 지닌 아름다운 소녀 모델.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도자기 인형처럼 아름다운 외모는 여전하지만, 이제 성숙한 매력이 더 추가됐다. “제 첫 번째 <보그 코리아> 커버 촬영은 2006년이었어요. 맞죠?” 수많은 커버와 화보 촬영 기억 속에서 <보그 코리아> 촬영을 끄집어낸 그녀가 그때는 정말 어렸다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One and Only모델닷컴 부동의 랭킹 1위를 고수하고 있는 흑인 모델 조안 스몰스. 팔색조 같은 매력을 지닌 그녀가 이번에는 캐주얼한 톰보이로 변신했다. 스포츠 트랙수트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니트 재킷과 플라워 프린트 스키니 팬츠가 60년대 레트로 무드를 완성한다.

Easy Spirit새로운 세대의 흑진주 조안. 그녀의 매력적인 마스크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심플한 슬립 드레스를 입었다.

릴리가 패션과 예술의 기운으로 가득한 집안에서 운명처럼 모델로 성장했다면, 뒤이어 스튜디오에 나타난 조안 스몰스는 패션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푸에르토리코 작은 마을의 농장에서 태어난 말괄량이 소녀. 모델 콘테스트에 나간 건 운명을 바꾸기 위한 스스로의 선택이요, 새로운 인생에 대한 갈증이었다. “하지만 너무 키가 큰 데다 너무 말랐고, 게다가 피부색이 어둡다고 떨어지고 말았어요.” 우여곡절 끝에 뉴욕에 도착했지만, 패션계는 유색인들에게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녀에게 들어온 일은 통신판매 카탈로그 촬영뿐. 하지만 운명이 바뀌는 사건이 그녀에게 일어났다.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가 그녀를 2010년 꾸뛰르쇼에 ‘익스클루시브’ 모델로 점찍은 것! 이후 샤넬, 구찌, 스텔라 맥카트니, 로베르토 카발리 등의 광고와 미국 <보그> 화보 촬영이 연이어 따라왔다. 게다가 모든 모델들이 꿈꾸는 에스티 로더 광고 계약까지!

1년 전 <보그> 200호 특집 촬영장에서도 만난 적 있는 조안은 2년 가까이 ‘모델스닷컴’ 랭킹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슈퍼 중의 슈퍼모델. 하지만 그녀에게서는 교만함이나 건방진 태도가 전혀 없다. 오히려 스튜디오의 모든 스태프들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네고, 치아 교정을 위해 교정기를 낀 모습까지 스스럼없이 보여줬다. 그녀는 촬영 다음 날 친구들과 오랜만에 파티를 즐길 거라고 귀띔했다. “리카르도가 뉴욕에 왔어요. 에드워드(미국 <W> 패션 디렉터 에드워드 에닌풀)와 함께 가족 파티를 열기로 했답니다.” 자타 공인 세계 1위 모델답게 능숙하고 완벽하게 재빨리 촬영을 마친 그녀에겐 또 어떤 꿈이 있을까. “전 세계를 정복하고 싶어요. 모든 사람들이 저를 보면서 ‘진짜 슈퍼모델이다!’라고 환호 했으면 좋겠어요!”

Shine On와 무려 다섯 번째 커버 촬영! 애냐 루빅은 이 특별한 촬영을 위해 강렬한 프린트의 드레스를 선택했다. 여기에 반짝이는 가죽 소재 레깅스와 부츠를 더하자 애냐 특유의 쿨한 스타일이 완성됐다.

True Icon슈퍼모델 그 이상의 패션 아이콘이 된 애냐의 포즈와 시선 처리는 여전히 강렬하다.

슈퍼모델 이상의 패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애냐 루빅이 릴레이 슈팅의 마지막 주인공이었다. 오후 3시쯤 스튜디오에 온 그녀는 구찌 프리다 지아니니에게 선물 받은 반짝이는 기모노 스타일 코트에 데님 쇼츠를 입은 캐주얼한 모습! 다섯 번째로 <보그>와 인연을 맺은 그녀에게 지난 1월 커버 촬영 직전 입양했던 유기견 ‘찰리’의 안부를 묻자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찰리는 이제 거의 귀족 같은 삶을 누리고 있어요. 칼(라거펠트)의 슈페트 못지않죠.” 그녀에게서 풍기는 매혹적인 향기가 궁금해 어떤 향수를 뿌렸느냐고 물었더니, 그녀의 얼굴이 한층 더 밝아졌다. “사실 제 이름을 딴 향수를 제작 중이에요. 지금 만들고 있는 향수를 시험 삼아 뿌려봤죠.” 그녀는 곧 가방에서 두 개의 향수병을 꺼내 모든 스태프들을 상대로 즉석 시향에 나섰다.

향수는 애냐의 수많은 프로젝트 중 하나일 뿐이다. 패션지 <25> 편집장, 고국 폴란드에서 TV 활동, BLK DNM과 함께 완성한 데님 등등. “제 스케줄은 정말 꽉 차 있어요. 하지만 전 이런 바쁜 일상에 익숙해요. <25>는 저의 창조적 능력을 활용할 플랫폼이에요. 네 번째 이슈를 준비 중이니 기대하세요!” 잡지 편집장답게 이번 촬영에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제안하던 그녀와의 촬영은 속전속결. 짐을 챙기며 굿바이 인사를 건네는 그녀에게 이토록 오랫동안 패션계 정상에 머물 수 있는 비결을 물었다. “패션계는 터프한 곳이에요. 스스로를 놓치는 순간, 모든 건 사라지고 말아요. 생존을 위해선 개성을 지켜야만 해요.” ‘서바이버’라 불러도 손색없을 슈퍼모델들과의 촬영은 애냐의 달콤한 키스와 함께 끝났다. “최근에 마요르카에 별장을 장만했어요. 여름휴가는 그곳에서 보낼 거예요. 패션계에서 살아남으려면 휴식이 필요하니까요!”

보그 TV ‘5 Superstar’ >> www.vogue.co.kr/5Supersta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