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그>의 잊을 수 없는 패션 모멘트 2

1996년 8월호부터 빛의 속도로 18년을 달려온 <보그 코리아>.
200여 권이 넘게 쌓인 책 속에는 잊을 수 없는 패션 모멘트가 저장돼 있다.
<보그>가 기억하는 18년간의 주요 패션 사건과 순간들이
아티스트 8명에 의해 개성 넘치는 콜라주 이미지로 재탄생됐다.

아트워크 / 일러스트레이터 김시훈


2000


밀레니엄 패션! 구찌 더블 G를 비롯, 펜디 주카, 버버리 노바 체크, 셀린 블라종, 디올의 자도르 등 과시적인 로고 플레이가 대유행했다. 모두가 스티븐 스프라우스의 그래피티 모노그램 가방을 갖고 싶어 안달했고, 명실상부 가장 핫한 패션 아이콘으로 떠오른 건 패션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끌어올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섹스 앤 더 시티>의 사라 제시카 파커.

패션 전문가들이 눈여겨본 준야 와타나베의 ‘Mutilate’ 컬렉션(색색의 오간자 덩어리 의상들!)이 패션지를 아름답게 수놓은 한편, 뱀이나 악어가죽 같은 이그조틱 레더 의상은 여자들에게 강한 자아를 가지라고 속삭였다. 갈리아노가 파리의 홈리스에게 영감을 얻어 완성한 꾸뛰르 컬렉션은 패션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 SBR

아트워크 / 일러스트레이터 김시훈


2001


패션계는 밀리터리, 스트리트, 섹스에 대한 것이었다. 루이 비통, 셀린, 구찌는 일제히 군복에서 영감을 얻은 카키색 의상을 선보였고, 디올은 힙합 뮤지션의 옷차림에서 영감을 얻은 스트리트 룩을 내세웠다. 톰 포드의 승승장구에 고무된 브랜드들(엠마뉴엘 웅가로, 베르사체, YSL 등)은 패션뿐 아니라 뷰티에 이르기까지 광고를 온통 끈적하고 관능적인 분위기로 채웠다. 에디 슬리먼은 디올 옴므 데뷔 컬렉션 ‘솔리테르’를 발표했고, 깡마른 모델들의 옷은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 사이에서도 순식간에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한편 스텔라 맥카트니도 자신의 첫 시그니처 컬렉션을 발표하며 기대를 모았고, 갈리아노는 대영제국 훈장을 받는 영광을 누리며 화려한 나날을 보냈다. 9월의 MTV 어워즈에서는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이국적인 댄서 차림으로 2m 길이의 뱀을 목에 두른 채 깜짝 퍼포먼스를 펼쳤다. 그리고 2001년 전 세계 패션 피플들에게 영감을 준 영화는 단연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 SBR

아트워크 / 콜라주 아티스트 에바 은실 한(EVA EUNSIL HAN)


2002


2002년은 이브 생로랑의 은퇴로 시작됐다. 40주년 회고전 겸 마지막 컬렉션이었던 봄 꾸뛰르 컬렉션 피날레에서 그는 르 스모킹 차림의 카트린느 드뇌브, 레티시아 카스타를 비롯한 뮤즈와 친구들에 둘러싸인 채 영원한 안녕을 고했다. 발렌시아가의 스타로 주가를 높이던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봄 컬렉션의 패치워크 의상이 90년대에 사망한 샌프란시스코 디자이너 케이식 웡의 디자인을 카피한 것임을 순순히 인정, 패션계는 한동안 표절에 대한 화두로 들끓었다.

‘21세기의 첫 번째 슈퍼모델’ 나탈리아 보디아노바는 영국 귀족 저스틴 포트만과의 결혼으로 러시아 노점상 과일 파는 아가씨에서 패션 요정으로 등극하는 현대판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이 됐다. 출산 후 결혼한 그녀의 영향 때문인지, 모델 엄마와 아기는 광고와 패션지 커버의 단골 주제. 비욘세와 제니퍼 로페즈가 팀버랜드 옐로 워커의 하이힐 버전인 마놀로 블라닉의 팀 부츠를 뮤직비디오에 연이어 신고 나오면서, 당시 유행한 힙합 패션의 필수 아이템으로 ‘짝퉁’을 양산했다.

가장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대칭형 얼굴로 꼽히는 크리스티 털링턴은 요가의 활 자세로 2002년 미국 <보그> 10월호 커버로 컴백, 요가를 가장 핫한 운동으로 만들었고, 칼 라거펠트는 에디 슬리먼의 디올 옴므 수트를 입기 위해 13개월 만에 42kg을 감량한 슬림한 몸매로 나타났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2>와 뮤지컬 영화 <시카고>의 흥행으로 영화 의상 디자이너 트리샤 비거의 파드메 아미달라 의상, 콜린 앳우드의 20년대 복식사에 충실한 플래퍼 룩이 회자됐다. SBR

아트워크 / 콜라주 아티스트 에바 은실 한(EVA EUNSIL HAN)


2003


최고의 패션 아이템을 꼽자면, 단연 루이 비통의 무라카미 백! 마크 제이콥스는 무라카미 다카시와의 협업으로 한물간 듯 보이던 모노그램을 동시대적으로 업데이트하는 데 성공. 또 제이콥스의 뮤즈 소피아 코폴라의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가 아카데미 각본상을 비롯, 여러 상을 수상하며 패션 아이콘이자 감독의 입지를 다지는 계기가 됐다.

한편 톰 포드, 카린 로이펠트, 마리오 테스티노 트리오가 만든 전설적인 ‘G 왁싱’ 구찌 광고, 힐튼가 상속녀 패리스 힐튼의 섹스 동영상, 골반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로라이즈 데님 덕분에 더없이 섹스어필한 해가 2003년. 패션과 뮤지션의 관계가 급격히 가까워지기 시작해 당시 최고 인기였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베르사체 광고 모델), 노 다웃의 그웬 스테파니(펑크 패션 아이콘), 카일리 미노그 등의 무대의상 또한 볼만했다. 2003년 상반기는 이국적인 에스닉 패션, 하반기에는 60년대 모즈 룩과 퓨처리즘이 유행의 키워드. SBR

아트워크 / 패션 디자이너 디나 리닉(DINA LYNNYK)


2004


당대 최고의 패션 아이콘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2004년. 첫 번째는 구찌와 이브 생로랑에서 마지막 컬렉션을 선보인 톰 포드. 심폐 소생 직전의 패션 하우스를 환생시키며 스타 디자이너로 떠오른 그가 빨간 벨벳 턱시도 차림으로 런웨이를 떠났다. 떠나간 또 한 명의 연인은 바로 캐리 브래드쇼. 동시대 여성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이끈 <섹스 앤 더 시티>가 2004년 시즌 6으로 종영한 것. 사라 제시카 파커가 모피 코트를 입고 맨해튼을 거니는 마지막 장면을 지켜보며, 오랜 친구를 떠나보내는 아쉬움에 가슴 아파한 패션 팬들이 많았다. 10년 후인 지금은 둘 다 돌아왔지만, 당시엔 한 시대가 저무는 기분(톰 포드는 영화와 자신의 브랜드로, 캐리는 영화 시리즈로 복귀).

반면 반가운 마음으로 첫인사를 건넨 인물들도 있다. 젬마 워드를 필두로 했던 베이비 페이스 모델들! 젬마, 릴리, 캐롤라인, 제시카 등의 천사 같은 얼굴들이 단번에 패션계를 장악했다. 그 밖에도 패션 아이콘이 된 카린 로이펠트, 마크 제이콥스와 클로에와 프라다 등이 이끈 레이디라이크 룩 역시 2004년을 떠들썩하게 했다. KH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