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빵집

빵 맛 때문에 동네가 부러워질 지경에 이르는 이 놀라운 경험! 청담동과 홍대 앞에 즐비한 르 꼬르동 블루 출신 파티시에의 특급 베이커리 얘기가 아니다. 가까운 이웃 동네에도 끝내주는 빵집들이 있다.

성북동에 지난 4월 문을 연 ‘오보록(Oborok)’, 통인동의 작은 빵집 ‘밀’은 말캉말캉한 브리오슈와 무화과캄파뉴가 일품이다

성북동에 지난 4월 문을 연 ‘오보록(Oborok)’, 통인동의 작은 빵집 ‘밀’은 말캉말캉한 브리오슈와 무화과캄파뉴가 일품이다

성북동에 작업실을 낸 동창을 만나러 갔다가 ‘오보록(Oborok)’이라는 빵집이 눈에 띄었다. 후미진 위치와 소박한 인테리어와 상관없이 ‘고급진’ 빵들의 도열을 확인하곤 결코 지나칠 수 없었다. 선물용이라는 핑계로 구입한 빵 라인업은 서리태식빵과 올리브치아바타, ‘지고지순’이라는 애칭을 가진 우유바게트. 직접 배양한 천연 효모종으로 만든 발효 빵만 내놓는 이곳에 살갑게 모양낸 생크림케이크 따위는 없다. “다른 곳에서 많이들 접할 수 있는 빵 대신 제가 정말 좋아하는 식사용 빵을 만들고 싶었어요.” 지난 4월, 20여 년간 살아온 동네 길가에 빵집을 연 왕명주 파티시에는 입소문을 타고 주변에 사는 연예인들까지 단골이 됐다며 은근한 자랑을 얹었다. 밀가루와 팥, 견과류 등 거의 모든 재료를 국산으로 고집한 이유는 곁에서 직접 팥을 삶고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 아버지의 깐깐한 미각과도 연결된다. 오보록은 수제 잼을 만드는 어머니와 카운터를 점령한 여동생까지 합세한 ‘패밀리 비즈니스’다. 원재료에 비해 너무 착한 가격에 의문을 품자 오보록한(다복하다는 의미의 순우리말) 사장님은 “재료 값을 냉정하게 고려 못한 사업 초보자의 설정 실수!”라면서도 당분간 값을 올릴 계획이 없다는 호쾌한 답변을 덧붙였다.

서촌 골목의 신상 빵집 ‘빵과 생강 상회’. 미슐랭 가이드에도 소개된 군산 빵집 이성당의 주인집 딸이 만든 서초동 ‘햇쌀마루’

서촌 골목의 신상 빵집 ‘빵과 생강 상회’. 미슐랭 가이드에도 소개된 군산 빵집 이성당의 주인집 딸이 만든 서초동 ‘햇쌀마루’

지난 3월 통인동에 문을 연 ‘밀(Mill)’ 역시 10종 남짓한 빵을 내놓는 작은 빵집이지만, 그새 이 동네 남녀노소에게 압도적으로 ‘입도장’을 찍어뒀다. 20여 년 미국에서 살며 빵 맛을 알아버린 이모와 열혈 파티시에 조카가 함께 운영하는 밀의 대표 상품은 말캉말캉한 브리오슈와 씹는 맛이 일품인 무화과캄파뉴. “오늘도 일하세요?” 토요일 오전 11시 크랜베리캄파뉴가 나오는 시각에 맞춰 빵집 안에 들어선 손님과 눈을 맞추는 파티시에 조카의 낭창낭창한 목소리가 동네 빵집만의 정겨운 전형을 그려내고 있었다.

서촌 골목의 또 다른 빵 가게 ‘빵과 생강 상회(Bread&Ginger)’는 장인의 품격마저 느껴지는 신상 빵집이다. 수상쩍을 만큼 빈티지한 간판과 기묘한 내부 인테리어를 목격한다면(조선시대 기생 사진과 프랑스산 고급 식재료의 배치라니!) 누구라도 이곳의 범상치 않은 빵 맛이 궁금해질 것이다. 인기 메뉴인 생강식빵은 그리 저렴하진 않지만(100g당 1만원, 저울에 달아서 판매한다) 반드시 맛봐야 한다. 한 조각 입에 넣었을 때의 충격적 풍미를 절대 잊을 수 없을 테니까. 사르르 녹는 생강머랭쿠키와 납작한 생강마카롱 역시 ‘쎈’ 감동을 전달하기에 충분한 이곳만의 시그니처 아이템. “호불호가 갈리는 맛이죠. 겉보기엔 센베 가게처럼 생겼는데 빵 가격이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불평하는 동네 어르신도 있어요. 하지만 건강을 생각해 재료를 아끼지 않고 만든 빵이라는 걸 입에 넣어본 분들은 당연히 알게 됩니다.” 까칠한 쇼트커트가 잘 어울리는 파티시에 에스더 배는 프랑스 르 꼬르동 블루 출신이다.

서래마을 사이길의 명물로 자리 잡은 ‘리블랑제’

서래마을 사이길의 명물로 자리 잡은 ‘리블랑제’

서초동 ‘햇쌀마루(Haessalmaroo)’의 조윤경 대표는 45년부터 빵집을 운영해온 할아버지와 부모 세대 어깨너머로 반죽과 발효를 배웠다. 그녀의 어머니는 미슐랭 가이드에도 소개된 군산 빵집 이성당의 오랜 주인이다. 최근에 잠실점을 낸 이성당의 베스트셀러 앙금빵과 야채빵 등 유명 레시피를 그대로 전수받으면서도 어머니와 달리 모든 빵을 우리 몸에 익숙한 쌀가루로 만들고자 한 딸의 용기와 운영에 동네 주민들도 화답한 걸까? 직원 12명과 함께 월 매출 1억원을 기록하고 있다니, 동네 빵집의 흐뭇한 비상이 아닐 수 없다. “누구나 문 열기 쉬운 빵집을 만들고 싶었어요. 맛과 가격, 분위기도 만만하고 조용한 동네 빵집만의 매력이 있는 거잖아요.”

빵 좀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 번씩 찾아봤다는 일본인 파티시에 도미가와 마사오미의 연남동 골목 ‘토미즈베이커리(Tomi’s Bakery)’는 물론이고, 합성첨가물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담백한 빵으로 일찌감치 합정역의 트렌드 스폿이 된 ‘오븐과 주전자’, 라우겐 크루아상 같은 독일식 빵으로 예약하지 않으면 사지 못할 만큼 인기 드높은 논현동 ‘레트로오븐(Retro Oven, 9월 이사 예정)’ , 프랑스 가정식 빵으로 빵집 앞에 손님 줄 세우기를 거듭하는 이태원 ‘오월의 종(May Bell)’ , 다른 동네로 이사하고 빵집 때문에 가장 아쉬웠다는 지인이 있을 만큼 좋은 평가를 받는 여의도 ‘브레드 피트(Bread Fit)’, 서래마을 근처 사이길의 ‘리블랑제(프랑스제 밀가루로 만든 이 집 빵은 오후 3시쯤 솔드 아웃)’ 등 둘러보면 동네마다 소문난 빵집이 한두 곳 꼭 있다.

사실 우리는 골목마다 즐비한 파리에서 온 바게트에 어느 정도 물린 상태였다. 퀄리티만큼이나 높은 가격을 들이미는 고품격 베이커리를 찾아다니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이런 와중에 합리적인 가격대와 더없이 훌륭한 맛을 제공하는 동네 빵집의 출현이 그저 반갑다. 르 꼬르동 블루 제과를 비롯해 일본의 유명 제빵 학교까지 앞다퉈 서울 분점을 내며 젊은 파티시에들이 한꺼번에 쏟아진 탓도 있다. 덕분에 동네마다 썩 맛 좋은 빵들과 만날 수 있게 됐으니 대한민국의 빵돌이 빵순이 손님들에겐 마냥 행복에 겨운 일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