팅커벨을 위한 노래

패션계에서 산다는 건 피터팬과 팅커벨이 매일의 모험을 떠나는 네버랜드에서 사는 것과 같다.
그런데 만약 피터팬과 팅커벨이 늙는다면?
영원히 젊을 수 없는, 늙어가는 패션 피플을 위해선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까?



그러니까 모든 건 미용실 헤어 디자이너가 내 손에 하늘색 작은 ‘구르프’ 하나를 쥐어주었을 때 시작됐다. “집에 이런 것도 없지? 내가 아무리 파마로 용을 써도 이제 앞머리는 어떻게 안 돼. 머리 말리고 이거 감고 있어. 어쩔 수 없어, 늙으면 할 게 많아!” 작년까지만 해도 수영장 탈의실에서 머리에 한 다발씩 꽃이 핀 것처럼 구르프를 말고 삼삼오오 모여 장아찌 담그는 법과 어느 집 며느리 살림 솜씨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어르신들과 나 사이엔 어떤 선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한 손에 헤어 구르프를 들고 엉거주춤 그 선을 넘는 중이다.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사람들의 이름이 가물가물해지고, 새로 등장한 디자이너 이름은 영원히 외울 수 없을 것 같을 때, 클리비지가 드러나는 블라우스는 가슴팍이 시려 못 입겠고, 허벅지가 드러나는 치마는 그냥 입지 못할 때, 몇 달 전에 산 클러치백은 어디에 뒀는지 기억나지 않아 못 들고(이삿짐 쌀 때 나오겠지), 하이힐은 무릎이 아파 못 신을 때, 특히 여름 햇살 아래 반백으로 펄럭이는 내 동료, 남편의 뒤통수를 볼 때마다 매일의 후렴구가 들려온다. 아, 오늘도 늙는구나!

LVMH 어워드 수상자가 발표된 지난 5월, 심사위원단 사진은 패션계의 현재 시각을 보여주는 듯했다. 지금 가장 핫한 빅 3, 라프 시몬스와 피비 파일로,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있고, 누군가에게 영혼을 팔아 영생을 얻은 것 같은 칼 라거펠트가 있고, 그리고 마크 제이콥스가 앉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위대한 디자이너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사진은 패트릭 드마쉴리에가 찍었다)에 환호했지만, 나는 아련하게 웃고 있는 마크 제이콥스만 계속 눈에 들어왔다. 오래전 그가 ‘왕중왕’이던 시절, 뉴욕 마크 제이콥스 쇼 시작 전 백스테이지에서 좁은 간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던 그의 모습과 반백의 현재가 오버랩되며 마음이 짠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후 6월 2일에는 지랄맞은 CFDA가 쉰두 살밖에 안 된 톰 포드에게 평생공로상을 줬다. <보그> 에디터는 늙는 것에 대한 원고 얘기를 하며 “톰 포드가 'WWD'와의 인터뷰에서 글쎄, 이제 자신은 늙기로 결정했대요!”라는 말도 전해줬다. 그 말에 박장대소했지만, 톰 포드가 붉은 턱시도 재킷을 입고 마지막 이브 생 로랑(그때는 생로랑 아니고 이브 생 로랑) 쇼 피날레 워킹을 하던 모습을 지켜봤던 나는 마음이 아렸다. 나도, 나의 슈퍼스타들도 죄다 늙고 있는 중이다. 맥퀸과 갈리아노, 마르지엘라처럼 사라지거나 떠난 슈퍼스타들까지 생각하면 정말이지 마음에 삭풍이 분다.

사실 머리카락이 좀 빠지거나 기억력이 흐릿해지는 건 마흔 살의 내게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늙는 일이 정말 묵직하게 다가올 때는 어느 날 아침이거나 밤, 또는 신호대기에 걸려 고요히 앉아 있게 되는 몇 초의 순간에 온다. 매일의 삶은 눈앞에 닥치는 거대한 파도를 타고 넘어야하는 파도타기처럼 숨이 차는데, 정작 가고자 했던 길의 푸른 지도는 빛이 바랜 채 마음속 뒷주머니에 꽂혀 영영 펼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이 엄습할 때, 잉게보르크 바하만이 <삼십세>에서 말했듯 유예 가능하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사실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을 때, 혹은 인생의 화양연화는 이미 지난 것 같은데, 그런데도 삶은 여전히 계속되어야 할 때다.

사람은 시간이 흐르는 속도에 비례해 늙지는 않는다. 일정한 속도로 흐르는 시간의 사이사이에 복병처럼 숨어 있는 어떤 사건들에 의해 늙는 속도가 빨라지기도 하고 늦춰지기도 한다. 나는 30대 중반까지는 나이에 비해 젊게 살았고, 패션지 기자를 그만두고 결혼한 이후엔 갑자기 한꺼번에 나이가 들었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스물다섯 살에서 갑자기 서른다섯 살이 된 셈이랄까. 뒤통수에 도끼 자루를 꽂고 있는 것 같은 마감의 압박도 없고, 잠도 하루에 12시간씩 잤는데 왜 그랬을까? 그건 물정 모르는 된장남녀들이 모여 밤마다 파티나 한다고 질타받는 패션계가 피터팬과 팅커벨이 사는 네버랜드이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수십 년 동안의 치마 길이 변화에 대해 깊이 사색하고, 새로운 형태의 바지 등장에 환호하고, 10분짜리 쇼가 주는 감동들을 켜켜이 쌓아두었다가 엄청난 에너지로 폭발시키는 사람들, 노동의 대가 대신 완성도 높은 결과가 주는 카타르시스에 목숨 거는 산치(算癡)들, 세상을 구하지도, 큰돈이나 명예를 가져다주지도 않을 쓸데없는 작당을 하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누구에게나 서글픈, 늙는다는 사실이 패피에게 와서 좀더 각별한 건 바로 피터팬과 팅커벨의 노화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80세 칼 라거펠트는 자신의 잠언집 'The World According to Karl' 에서 “나는 젊고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요. 아름답지 못한 걸 보는 건 딱 질색이에요”라고 말했다. 젊음과 아름다움은 패션이 사랑하고 지키고 싶어 하는 덕목이다. 아마 패션은 영원히 젊고 아름답겠지만, 그걸 만드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디자이너들의 이직과 퇴직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우리는 패션의 거대한 흐름을 만드는 이 대단한 사람들이 사실은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월급쟁이라는 사실을 환기하게 된다. 최근 미국 <보그>에 실린 치토세 아베 인터뷰에 의하면, 그녀가 꼼데가르쏭에서 나와 독립했을 때 레이 카와쿠보는 카페에서 아베를 만나 단 하나 강력한 조언을 했다고 한다. “디자이너가 돼. 그리고 경영자가 돼. 그러면 아무도 너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못할 거야.”

어쩌다 보니 모두 힘을 합쳐 패션의 시곗바늘을 빠르게 돌리기 시작한 뒤 패션계는 1년에 네 번에서 여덟 번(버버리 프로섬과 버버리 컬렉션의 남성복과 여성복 라인을 모두 맡고 있는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대체 몇 번?)의 쇼를 하고, 그걸 리뷰하고 스타일 업하고 전파하느라 예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늙어빠지고 있다. 옷은 넘쳐나는데 매출은 떨어지고, 옷의 수명은 3개월로 반토막 났고, 젊은 디자이너들이 대가가 될 가능성은 패션계의 시스템 덕에 더욱 요원하다.

CFDA 평생공로상을 받은 후 톰 포드는 스타일닷컴의 팀 블랭스에게 구찌 그룹을 떠난 후 지난 10년 동안이 직업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얼마나 대단한 고군분투의 시간이었는지 털어놓았다. 그리고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가 자신의 귀에 대고 ‘평생공로상’이라고 속삭였을 때 ‘그게 뭐야, 그럼 나는 이제 아무것도 할 게 없다고?’라는 생각부터 들었지만 결국엔 이 상 덕분에 자신의 지난 10년을 돌아보게 됐고,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에 실망하는 대신, 자신이 이룬 것들이 보였다고 했다. 그런데 아들 잭을 키우느라 보톡스와 필러 맞을 시간도 없다며 자신은 이제 늙기로 결정했다는 왕년 슈퍼스타의 너스레가 나는 좋아 보였다. 분명 어느 날 밤 잠자리에 누워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속이 볶이겠지만, 결국 그 밤도 지나갈 테고 삶은 계속될 테니 말이다. 사랑하는 슈퍼스타의 날짜가 정해지지 않은 미래의 공연 티켓을 손에 쥐고 있는 건 즐겁고 신나는 일이다.

도정일 교수의 그간의 글들을 모은 산문집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마흔 이후 사람들이 훨씬 중후해 보이는 것은 입지의 중량보다는 잃어버린 것들의 무게 때문이다. 그 무게와 함께 사람들은 어떤 기술을 터득하기 시작한다. 가슴이 어떻게 상실의 시간과 화해하는가라는 기술이 그것이다. 이 화해를 가리켜 ‘성장’이라고도 하고 ‘성숙’이라 부르기도 한다.” 나는 아직도 철이 덜 들어서인지 성장과 성숙에 완전히 나를 내던지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상실과 화해하는 기술을 터득하는 것이 탈모가 진행 중인 팅커벨이 되는 데는 도움이 될 것 같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