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하고 실용적인 아메리칸 캐주얼

놈코어가 슬슬 지겨워질 때쯤 또 하나 추억의 스타일이 돌아왔다.
미국적인 편안함과 실용성이 돋보이는 ‘아메리칸 캐주얼’이 그 주인공.
한때 대한민국 대학생들의 유니폼이기도 했던 그 캐주얼 아이템들 말이다.



지난봄 패션 위크 기간 중 목격했던 풍경 하나. “She’s so American!” 파리 패션 위크가 한창이던 지난 2월 28일 밤, 파리 샤이 요 궁 근처 한 카페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지 야마모토 쇼가 시작되길 기다리던 패션 피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그곳에서 자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피력하던 주인공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중년의 캐스팅 디렉터. 사진가와 스타일리스트, 모델에이전트 등이 모여 패션계 뒷이야기를 나누던 중 칼리 클로스가 주제로 떠오른 것이다. “너무 미국적이야. 자기가 치어리더인 줄 아는 것 같아. 전혀 하이패션답지 않아!” 그 캐스팅 디렉터가 시니컬하게 내뱉자,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스타일리스트가 점잖게 대꾸했다. “뭐가 어때서? 지금 미국적인 것만큼 쿨한 건 없잖아?”

패션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유럽 하이패션 종족들에게 미국이라는 나라는 애증의 대상이다. 가장 큰 파이를 차지하는 패션 시장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패션은 진짜가 아니라는 식의 비아냥 섞인 발언을 일삼는다. 하지만 그 스타일리스트가 지적한 대로 지금은 ‘아메리카나’가 쿨하게 여겨지는 시대다. 라프 시몬스는 LA 아티스트 스털링 루비에게 무한 영감을 받고 있고, 생로랑의 에디 슬리먼은 파리지엔 시크보다 ‘LA 쿨’을 외친다. 또 디자이너 이자벨 마랑과 파리 <보그> 편집장 엠마뉴엘 알트가 고집하는 ‘캘리포니아 스타일’은 전 세계 여성들에게 어필하고 있다. 덕분에 지극히 미국적인 캐주얼 스타일이 2014년 하이패션의 지지를 얻고 있다.

풍경 둘. 파리의 까르노 고교에 종이 울리자 갑자기 강당 계단 위에서 학생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관객들 맞은편에 일자로 길게 놓인 벤치 위에 학생들이 시끌벅적하게 자리를 잡은 뒤에야 쇼가 시작됐다. 이어진 순서는 90년대 미국 고교생들이 입었을 법한 아메리칸 캐주얼의 행진! AMI 디자이너 알렉산드르 마티우시는 미국 드라마 속에서 내년 봄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베이사이드 얄개들>과 <베벌리힐즈의 아이들> 등 90년대 미국 틴에이저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스타일이 갑자기 쿨해 보였죠.”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당시 TV 드라마 스타일로 편집한 예고편을 올리기도 한 재치 넘치는 디자이너가 말했다. “바람막이, 물 빠진 청바지에 운동화, 각양각색의 티셔츠들! 모두 추억속의 아메리칸 캐주얼 아이템들이죠.”





미국 역시 이번 가을 패션을 집대성하는 9월호를 준비하면서, 90년대 아메리칸 캐주얼을 특집으로 다뤘다. 다리아, 라라, 케이트, 라켈 등 당대 최고 슈퍼모델들이 한데 모인 이 화보의 제목은 “Super Normal, Super Models.” 화보 속 다리아와 라라는 <클루리스> 주인공들이 입었을 법한 타탄 체크 미니스커트에 체크 셔츠를 겹쳐 입고, 후드티에 워커를 매치했다. 존 휴즈의 영화들(<조찬 클럽> <아직은 사랑을 몰라요> <핑크빛 연인> 등), 혹은 <엠파이어 레코드> 주인공을 떠올리게 하는 옷차림 그 자체였다. <빌보드>가 올여름 노래로 꼽은 이기 아즐레아의 ‘Fancy’ 뮤직 비디오 속 패션과도 비슷했는데, <클루리스>를 패러디한 이 뮤직비디오 주인공들은  화보 모델들과 꼭 닮아 있었다.

“쿨하고 스포티한 감성과 로맨틱함을 동시에 지닌 여성!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아메리칸 스타일에 다운타운의 터프한 감성을 믹스할 수 있는 여성! 2014년 현재 가장 현대적인 여성 스타일이죠.” 올가을 ‘폴로’ 라벨을 정비해 ‘폴로 포 위민’를 론칭한 랄프 로렌은 지금이야말로 ‘아메리칸 캐주얼’을 새롭게 정의할 때라 여겼다.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대한민국 여대생들을 매료시켰던 폴로 라인이 업그레이드된 채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이런 흐름에 힘을 보탠 건 프레피 룩의 대명사 격인 타미 힐피거. 그간 뉴욕 패션 위크에서나 볼 수 있었던 ‘힐피거 컬렉션’을 한국 시장에 선보이기로 한 것. 덕분에 하운드 투스 체크 패턴의 코트, 카우보이 담요를 닮은 드레스, 양털 장식 코트 등을 이젠 가로수길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됐다.

이번 시즌 아메리칸 스타일에 대해 심사숙고한 디자이너는 또 있다. 멀버리, 로에베 등 유럽 브랜드에서 활동하던 스튜어트 베버스는 미국 ‘국민 브랜드’인 코치로 적을 옮기면서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아메리칸 스타일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이를 위해 베버스는 가상의 소녀를 떠올렸다. “한 소녀가 뉴욕에서 여행을 시작해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옷과 액세서리들을 구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죠.” 뉴욕에서는 소방관 남자 친구의 코트를 빌려 입고, 뉴올리언스에서는 하운드 투스 미니스커트를 구입하고, 카우보이에게선 시어링 부츠를 선물 받는 소녀!

파리의 카페에서 결정적 한 마디를 던진 그 스타일리스트 말대로, 지금 아메리칸 스타일은 가장 핫하고 쿨한 스타일 중 하나가 됐다. 물론 되돌아온 ‘아메리칸 캐주얼 시크’는 도나 카란 식의 커리어우먼 룩, 마이클 코어스 식의 부유한 여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타탄 체크 미니스커트 위에 미식 축구 선수 남자 친구의 스타디움 재킷을 걸쳐 입고 오픈카 드라이브를 즐기는 발랄한 미국 아가씨쯤? 그런지 밴드 보컬 남자 친구의 셔츠를 허리에 걸치고 투박한 워커 부츠를 신은 아가씨 정도? 이번 가을 스타일링에 대한 좀더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필요하다면, 80~90년대 미국 청춘 영화를 오랜만에 감상해 보자. 지금 가장 쿨한 스타일 해법이 가득 담겨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