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의 뮤즈, 안나 무글라리스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 아름답지만 자의식 없이 담담하고, 적당히 냉소적인 태도.
칼 라거펠트는 그녀를 에바 가드너와 안나 마냐니가 공존하는 새로운 타입의 클래식 뷰티라고 칭했다.
<보그 코리아>가 샤넬의 뮤즈, 안나 무글라리스를 서울에서 만났다.



아스트리드 베흐제 프리스베는 서울 DDP에서 열릴 문화 샤넬전 <장소의 정신> 오프닝을 며칠 앞두고 방한 계획이 불투명해졌다. 캐롤린 드 메그레, 미즈하라 키코, 수주에 비견할 만한, 혹은 그보다 더 비중 있는 샤넬의 뮤즈는 또 누가 있을까? 엘리사 세드나위? 바네사 파라디? 가장 최근에 합류한 크리스틴 스튜어트? 안나 무글라리스는 프랑스 남부에서 어린 딸과 함께 휴가를 보내던 중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오프닝 행사 당일 아침에 서울 도착, 그다음 날인 토요일 새벽 파리로 돌아갔다가 월요일에 다시 베니스 영화제로 떠나야 하는 스케줄은 상상만으로도 피곤하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1시간 30분 정도의 전시 투어를 마치고, 캐롤린 드 메그레와 함께 DDP에서 마련한 인터뷰 장소에 있다. 온통 하얗고 정갈한 공간에서 무글라리스가 입은 트위드 스커트 수트의 주홍색이 더욱 선명해 보인다.

 

2002년도 알뤼르 향수를 시작으로 주얼리, 가방, 시계 등 꾸준히 샤넬 광고 캠페인에 등장했고, 칼 라거펠트의 소품 영화-샤넬을 입는 우아한 여자들에게 바치는-에도 단골로 출연해온 그녀는 이네스 드 라 프레상주, 캐롤 부케, 바네사 파라디의 뒤를 잇는 샤넬의 상징적인 뮤즈. 유럽에서는 국경과 필드(거대 영화사와 인디 영화를 가리지 않는다)를 넘나들며 쉴새 없이 영화에 출연하는 연기파 배우로 이름 높다. 180cm쯤 되는 껑충한 키에 강한 얼굴 골격, 큼지막한 눈, 코, 입을 상상했지만, 실제로 본 그녀는 174cm의 훤칠한 키를 제외하곤 작고 가녀린 체격. 물론 사진으로 봐온 강렬한 눈빛과 중저음의 허스키한 목소리(파트리샤 카스를 연상케 한다)는 상상하던 그대로다. 그리고 큰 갈색 눈을 굴려 저쪽 끝에서 인터뷰 중인 드 메그레를 호기심에 찬 눈으로 흘끔거리거나, 갑자기 몸을 뒤로 젖힌 채 킬킬거리며 웃는 모습은 여학교 시절 옆자리에 앉은 엉뚱한 친구 같다. 모든 것이 예상 밖인 이 프랑스 여배우는 어떤 사람인가? 테이블 건너편에 의자를 바싹 붙이고 앉아서, 조금 엄숙한 표정으로 질문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에게 칼 라거펠트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냐는 질문부터 던졌다.

VOGUE KOREA(이하 VK) 2000년도에 칼 라거 펠트가 당신의 인터뷰 기사를 위한 포트레이트 사진을 찍으면서 처음 만났다고 들었어요. 당시를 기억하나요?

ANNA MOUGLALIS(이하 AM) 물론 또렷이 기억하죠! 클로드 샤브롤 감독의 <초콜릿 고마워>에 젊은 피아니스트 역할로 출연하자 <인터뷰> 매거진에서 나를 취재했어요. 그때 처음 칼을 만났고 2년 뒤인 2002년에 알뤼르 향수 광고 모델이 되면서 샤넬 하우스와 인연이 시작됐죠. 개인적으로 성숙하게 된 좋은 계기였다고 생각해요. 솔직하게 말하면, 그전까지만 해도 패션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피상적이고 가볍고, 깊이 없는 거라고 생각했죠!

VK 흠, 원래는 패션에 관심이 없었군요?

AM 사실 배우가 되기 전에 2년 동안 모델로 활동한 적이 있었는데, 전 별로였어요. 썩 좋은 모델이 아니었죠. 내가 다른 누군가의 옷을 입고 그런 사람인 척 가장하고 있다고 느꼈거든요. 샤넬 하우스에서 모델 활동을 하면서 아름다운 옷을 통해 나 자신을 발견하는 방법에 대해 배우게 됐죠. 샤넬이나 칼이 아닌 다른 브랜드, 다른 사람을 만났다면 영원히 패션을 즐기는 법에 대해 배우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칼과 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지면서 패션이 역사, 문화와 관련이 깊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그는 모든 것들에 호기심을 가질 뿐 아니라 패션과 예술의 역사에 대해 완벽하게 꿰고 있거든요. 내게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해줬어요. <장소의 정신>전도 코코 샤넬이 거쳐간 장소를 주제로 어떻게 그녀가 시대와 교감했는지를 보여주는 전시죠.

VK 가장 인상 깊었던 섹션이나 작품이 있었나요?

AM 특별히 어떤 한 가지를 꼽기보다는 동선이 마음에 들었어요. 샤넬의 역사, 작품, 오브제, 상징 등 예전부터 잘 알고 있던 것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만들더군요. 아, 그래요. 60년대 밀 이삭 자수가 들어간 드레스는 특히 아름다웠어요!

 

VK 오늘 당신이 입은 샤넬 수트도 예쁜걸요. 평소엔 어떤 차림인가요?
AM 청바지, 재킷, 블라우스… 평범해요. 그렇지만 샤넬만 입는 건 사실이에요.

 

VK 샤넬만 입는다고요? 설마!

AM 하하, 알아요, 행운이라고 할 수 있죠.

VK 그럼 당신의 옷장 속에 있는 샤넬 컬렉션 중 가장 좋아하는 걸 한 가지만 꼽는다면요?

AM 음, 포멀한 스커트 수트. 짧은 스커트요.





VK 가장 오랫동안 애용하고 있는 패션 아이템은요?

AM 처음으로 입어본 오뜨 꾸뛰르 스커트 수트! 샤넬과 계약하기 전이니 10년도 더 됐네요. LA 영화제에 참석할 때 샤넬에서 빌려 입었는데 나중에 선물로 받았어요. 참, 그 옷이 샤넬이라는 건 순전히 우연이에요.

VK 그럼 이제 여배우로서 당신의 커리어에 대해 물어볼게요. 어릴 적에 영화 <서편제>를 감명 깊게 봤다는 기사를 보고 굉장히 놀랐어요(그녀는 영화 제목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AM 판소리하는 여주인공이 나오는 그 영화! 나중에 눈이 멀게 되잖아요, 그렇죠? 정~말 멋있었어요. 내가 아주 어릴 때였으니 90년대(정확하게 1993년)일 거예요, 낭트 3대륙 영화제에서 아시아 영화로 상영됐는데, 여주인공이 고독하게 자신의 운명을 걸어가면서 고난 속에서도 판소리를 계속해나가는 이야기에 감동을 받았죠. 어찌나 판소리에 심취했던지, 아버지가 한국 음악 음반을 구해주기도 했어요.

VK 프랑스 여배우가 우리 영화, 우리의 판소리를 좋아한다니 기분 좋은
데요. 또 어떤 영화를 좋아하나요?

AM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의 <자전거 도둑> 같은 이탈리아 신사실주의 영화를 좋아해요. 그래서 이탈리아 영화에도 종종 출연하는데, 최근에 여배우로서 품고 있던 작은 꿈 하나를 실현했답니다. 바로 로마의 유명한 치네치타 스튜디오에서 한밤에 가짜 비를 흠뻑 맞으며 영화의 한 장면을 찍는 것! 자코모 레오파르디(Giacomo Leopardi)라는 이탈리아 시인에 대한 영화인데, 월요일에 참석할 베니스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될 예정이에요.

VK 그전에도 꽤 많은 전기 영화에 출연한 걸로 알고 있어요. <사르트르와 드 보부아르>의 시몬 드 보부아르, <세르주 갱스부르>의 줄리엣 그레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의 코코 샤넬 등.

AM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셋 다 제 삶에 영향을 미쳐온 인물이에요. 코코 샤넬은 말할 필요도 없고, 어릴 때부터 문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드 보부아르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죠. 샹송 가수인 줄리엣 그레코는 누구보다도 강한 자유와 도전 정신의 소유자고요. 자유를 상징하는 자유로운 영혼들! 그거 아세요? 시몬느 드 보부아르와 연인 사이였던 장 폴 사르트르는 줄리엣 그레코를 위해 작사를 하기도 했답니다. 그녀를 가수로 만든 것도 바로 사르트르죠.

VK 오, 철학자가 쓴 노래 가사라니, 줄리엣 그레코의 노래를 찾아봐야겠어요.

AM 네, 꼭!

VK 영화 속에서 맡아온 강한 배역도 그렇지만, 당신의 심각하면서도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사람들은 당신의 진짜 모습이 어떨지 궁금해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안나 무글라리스는 어떤 사람인가요?

AM 어려운 질문이네요… 나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어떤 사람이다’라고 분명하게 단정 지어 말하는 건 불가능해요. 사람은 누구나 평생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개인적으로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최근에야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됐다는 거예요. ‘나는 나’라는 걸 인식하게 됐달까요. 자크 프레베르(Jacques Prévert)의 예쁜 시도 있잖아요, Je suis comme je suis. 나는 나일 뿐.

 

VK 2007년에 태어난 딸 사울도 당신이 출연한 영화를 보나요?

AM직 내 영화를 못 봤어요. 자식 입장에서 영화를 통해 부모를 본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사실은, 저도 잘 안 보거든요! 제가 출연한 영화가 집에 없으니 볼 수가 없죠, 하하. 아 참, 2주 후에 딸과 함께 영화에 출연하게 되는데, 그러면 좀 관심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시릴 드 가스페리(Cyril de Gasperis)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인데 그 영화에서 제 딸로 출

연할 거예요.

VK 일곱 살인 사울이 당신의 옷을 갖고 싶어 하진 않나요?

AM (고개를 저으며)내 딸은 운동화에 찢어지고 구멍 난 청바지를 입고 다닌답니다. 지금은 엄마의 패션에 대해 비웃는 입장이죠. 더 어릴 때는 저녁 외출을 할 때 화려한 옷을 차려입는 걸 보고 왜 엄마는 되고 나는 안 되냐며 떼를 쓰기도 했지만, 이제 그럴 나이는 지난 것 같아요.
 

VK 그럴 나이가 지났다는 건 무슨 뜻이죠?

AM 더 이상 드레스나 치마 같은 건 안 입으려고 한다는 거죠. 사내아이처럼 너저분하게 입고, 이렇게(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덮으며)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닌답니다! 일곱 살인데 벌써 사춘기에 접어든 것 같아요.

 

VK 귀여워요! 보고 싶어요!

AM 오, 글쎄요. 영화 개봉하면 한번 보세요. 정말로 귀여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