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계 시선이 향하는 독일

그동안 독일과 패션은 썩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전 세계 패션계 시선이 독일, 그중에서도 근대 문화와 예술, 그리고 베를린을 향하고 있다.
도대체 왜 ‘메이드 인 저머니’인가.



“파리는 아름다운 박물관 정도로 느껴지고, 로마는 무너져 내리고 있으며, 런던은 지나치게 비싸고 복잡하다. 여기에 비해 베를린은 넘쳐나는 아트 갤러리와 클럽, 그리고 현대적인 건축물로 가득한 쿨한 도시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곳은 여전히 젊은이들이 즐길 수 있는 도시로 남아 있다.” 지난 7월 독일이 월드컵 트로피를 거머쥐는 순간 <파이낸셜 타임스>는 독일의 힘에 대한 다양한 특집 기사를 다뤘다. 독일을 주목한 건 전 세계 주요 매체들도 마찬가지였다. BBC는 지난해 전 세계 2만6,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독일이 가장 인기 있는 유럽 국가로 꼽혔다고 강조했고, <뉴욕 타임스>는 월드컵의 승리가 독일의 진보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영국 방송에서는 월드컵까지 우승한 독일이 과연 못하는 건 무엇인가를 두고 TV 토론까지 벌어졌다.

과연 독일이 열등한 건 무엇인가? 그 질문에 지극히 <보그>적인 시선으로 답하자면 ‘패션’이다. 비록 휴고 보스, 에스까다, MCM 등의 고향이며, 칼 라거펠트, 질 샌더, 토마스 마이어(보테가 베네타)가 탄생한 나라이긴 하지만, 독일의 패션 지수는 이웃 프랑스나 이탈리아, 영국에 비해 떨어져도 한참 떨어진다. 그나마 최근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 버켄스탁을 독일산 최고 패션 아이템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비록 꾸뛰르 하우스나 쿨한 디자이너는 없지만, 독일은 풍부한 문화자산을 지닌 나라다. 그리고 그 유산들은 지금 패션계 디자이너들이 손꼽는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저머노필(Germanophile)’을 자처하는 인물 중 한 명은 바로 미우치아 프라다. “무용가 피나 바우시, 아티스트 요셉 보이스, 영화 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를 비롯한 전후 독일의 아방가르드 문화를 이끈 이들이 제 영감의 대상입니다.” 가을 컬렉션을 선보인 지난 2월 20일 밀라노 본사에서 미우치아 프라다가 최근 자신을 사로잡은 독일이라는 나라에 대해 말했다. “컬렉션을 준비하기 전 파스빈더의 모든 영화를 찾아봤죠.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과 <로라>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피나 바우시의 공연 역시 빼놓을 수 없죠.” 독일 작곡가 쿠르트 바일(Kurt Weill)의 음악을 라이브로 연주하고, 파스빈더 영화에 등장했던 독일 여배우 바바라 수코바(Barbara Sukowa)가 선율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등 프라다가 독일을 향한 찬양 메시지를 보냈음은 분명했다.

전 세계 패션의 방향을 좌지우지하는 이 여장부가 70~80년대 독일 문화에 푹 빠지게 된 이유는 뭘까? “문화는 과거의 산물이에요. 역사는 이유가 있게 마련이고요.” 알쏭달쏭한 말을 남긴 그녀가 가리킨 건 과거 독일 문화의 연대기. 컬렉션에선 파스빈더의 ‘뉴저먼 시네마’와 피나 바우시의 아방가르드 무용이 탄생할 수 있었던 뿌리를 마련해준, 20년대와 30년대 독일을 주름잡았던 구성주의자들의 작품과 바우하우스 아티스트들의 작품들이 그래픽한 패턴과 음울한 분위기를 통해 표현됐다.

 

독일 태생 예술과 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건 비단 프라다뿐만은 아니었다. 다다이즘의 선구자였던 독일 여성 아티스트 한나 호크(Hannah HÖch)와 <보그> 모델에서 아티스트로 변신한 리 밀러(Lee Miller)라는 인물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피비 파일로의 셀린 컬렉션 역시 독일에서 이번 시즌 뿌리를 찾았다. 지난해 런던에서 열린 한나 호크 전시회에서 그 실마리를 발견한 파일로가 선보인 가슴 위 코사지 장식과 한쪽 귀를 장식한 샹들리에 귀고리는 아티스트에 대한 오마주. 온몸을 감싸는 롱 코트와 투박한 구두는 리 밀러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2차 대전이 끝나자마자 히틀러가 살던 베를린 아파트에 들어가 알몸으로 욕조에 앉아 사진을 찍었던 이 독특한 아티스트는 웬만해선 영감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 파일로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이 여성들은 당시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을 해낸 아티스트들입니다. 남성복을 입는 것조차 쉽게 용납되지 않던 시절에 남성용 군화를 신었으니까요.”





프라다와 파일로 외에도 독일을 아이디어의 시발점으로 삼은 디자이너들은 꽤 많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탄생해 베를린에서 꽃피웠던 다다이즘(하이더 아커만과 까르벤), 그래픽하고 조형적인 컬러가 돋보이는 바이마르(지방시, 자크무스, 토마스 테이트), 가구부터 건축물, 편집 디자인까지 영향을 끼친 바우하우스(발렌시아가, 펜디, 아크네 스튜디오)까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오토 딕스(Otto Dix),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 파울 클레(Paul Klee), 귄타 슈퇴츨(Gunta StÖlzl), 하네스 마이어(Hannes Meyer).” 호주 <보그>는 올가을 컬렉션에 등장한 독일 모티브의 디자인을 추적하며, 20세기 초반 독일 바우하우스 명장들의 이름을 쭉 나열했다. “밀라노와 파리 쇼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던 20년대, 30년대의 미학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들의 작품을 다시 살펴봐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그리고 지난 8월호 파리 <보그> 커버에 등장한 한 금발 소녀의 이름은 독일 패션의 또 다른 가능성을 점치게 한다. 앞니가 살짝 벌어진 이 소녀의 이름은 안나 이버스(Anna Ewers). 파리 <보그>가 유독 아끼는 브리짓 바르도 스타일의 계보를 잇는 새 얼굴로 독일 태생이다. 클라우디아 시퍼 이후 명맥이 끊겼던 독일산 슈퍼모델이 다시 탄생할지 패션계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이미 안나는 프라다, 알렉산더 왕, 베르사체, 발렌시아가 등의 광고 모델로 발탁됐고, 이탈리아 <보그> 50주년을 기념한 50명의 커버 모델 중 한 명이 됐다. 그동안 영국(카라와 에디), 네덜란드(라라와 사스키아), 미국(칼리와 아리조나)이 주도하던 슈퍼모델의 흐름이 이번엔 독일로 흘러갈지, 혹 누가 알겠나.

덩달아 힘을 얻은 건 독일 패션이다. 비록 패션 황제(칼 라거펠트)를 배출한 나라지만, 이렇다 할 패션 브랜드가 없었던 독일. 지금 당장 가능성이 큰 건 최근 제이슨 우를 아티스틱 디렉터로 임명한 후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 휴고 보스다. 뉴욕에서 패션쇼를 선보이고, 이네즈&비누드 커플과 함께 세련된 광고 영상을 만드는 등 독일 패션 알리기에 앞장 서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독일 남서부에 자리한 휴고 보스 본사로 향하는 제이슨 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곳의 개발 센터는 놀라울 정도입니다.” 독일 특유의 실용주의를 강조한 본사 건물은 뉴욕이나 파리에서 찾을 수 없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메르세데스 벤츠 공장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아요. 거대하죠. 우주선처럼 보여요. 기술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제겐 장점이 많습니다.” 그곳에서 독일 특유의 실용주의 유산을 살펴본 그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모던한 구내 식당이요! 그리고 직원들 모두 키가 크고 아주 멋진 외모를 가졌습니다.”





“베를린에 사는 건 아주 신선한 자극으로 가득한 경험입니다.” 에르메네질도 제냐로 옮겨 간 스테파노 필라티는 아예 파리를 떠나 베를린에 정착했다. 제냐로부터 베를린에 디자인 스튜디오를 차려도 된다는 허락을 구한 그는 오래된 빌딩 위에 펜트하우스를 짓고 1층 사무실을 오가며 일한다. “그곳은 사회적인 구조가 없는 도시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것에도, 어떤 사람에게도, 어떤 무리에도 속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이 없습니다. 패션 디자이너도, 팔라펠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도 별다를 바 없습니다. 사회적인 계층과 구조가 철저하게 나뉜 파리에서 이곳으로 오니 처음으로 신선한 공기를 쐬는 기분이었습니다.”

지극히 실용적이고 이성적인 나라에서 느끼는 뜻밖의 자유! 이것은 지금 독일 문화를 이끄는 힘이자,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무한한 영감을 주는 독일 근대 문화의 근원이다. “네덜란드 아이트호벤 대학 재학 중 베를린에 잠시 들른 적이 있어요.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크리에이티브한 에너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더군요.” 현재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구 디자이너 이상혁은 도시를 감싸는 공기부터가 다르다고 추억했다. “곧 무너질 듯한 건물에서 그림을 그리는 작가, 번잡한 도심 속에서 벌어지는 퍼포먼스, 끊이지 않고 열리는 훌륭한 전시들까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기능성은 물론, 빈틈없는 일 처리를 바탕으로 하는 독일 디자인은 그를 비롯한 전 세계 예술가들에게 힘을 불어넣는다. 11년 가까이 런던에 머물던 패션 디자이너 이승준 역시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겼다. “사실 패션 디자이너들이 작업하고 활동하기에 좋은 도시는 아닙니다. 하지만 4만 개에 달하는 베를린의 갤러리와 뮤지엄은 상상 이상의 소스를 제공해줍니다.” 그곳에서 얻은 영감으로 니트를 활용한 개인 컬렉션을 베를린에서 준비 중인 그다.





패션계와 예술계에서 주목을 끌고 있는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독일 출신이거나 베를린을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다. 루이 비통으로 옮긴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가장 먼저 선택한 사진가 유르겐 텔러(Juergen Teller), 셀린의 피비 파일로가 첫 번째로 후원한 전시 작가, 이사 겐즈켄(Isa Genzken), 패션계와 예술계 모두가 사랑하는 볼프강 틸먼스(Wolfgang Tillmans) 모두 독일 출신. 프로엔자 스쿨러의 듀오가 매 시즌 빼놓지 않고 언급하는 아티스트,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프라다 슈즈를 바탕으로 작품을 완성했던 안드레아스 거스키(Andreas Gursky), 디올과 함께 컬렉션을 선보였던 안젤름 라일리(Anselm Reyle) 역시 패션계와 깊은 연관을 가진 독일 아티스트다. 여기에다 수많은 젊은 작가들의 에너지가 독일을 더욱 뜨겁게 만들고 있다.

베를린은 영감을 선사하는 공간으로 차고 넘친다. 한 달 전에 예약을 해야만 관람이 가능한 벙커 뮤지엄인 ‘보로스 컬렉션’은 전 세계 예술 애호가들의 성지로 손꼽히고, 셀린의 러기지백과 플로스(Flos)의 조명을 동시에 구입할 수 있는 멀티숍 안드레아스 머커디스(Andreas Murkudis)는 새로운 쇼핑 공간을 정의하고 있다. 동이 틀 때까지 춤출 수 있는 클럽 베르그하인(Berghain)은 베를린이 지닌 자유가 폭발하는 공간이다. 이곳들을 탐색하기 위해 모이는 이들 덕분에 ‘베를린 바이러스’는 점점 더 강력해지고 있다.

독일에서 20년을 보낸 후 최근 서울로 돌아온 아티스트 양해규는 와의 인터뷰에서 좀더 냉정한 시선을 지닌 채 말했다. “전 독일에서 20년을, 베를린에서 9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전 베를린 사람이라고, 혹은 베를린을 기반으로 하는 아티스트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전 ‘베를린 하이프’에 속하지도 않습니다. 전 더 이상 그곳 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지적대로, 무엇인지 규정할 수 없는 폭발적인 에너지로 가득한 도시 베를린. 과연 미래엔 또 어떤 식으로 패션계와 예술계에 영향을 끼칠지 궁금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