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젠틀 우먼의 아이콘 로렌 바콜

2016.03.17

by VOGUE

    젠틀 우먼의 아이콘 로렌 바콜

    놈코어와 함께 평범함의 매력을 깨닫게 한 ‘젠틀우먼’ 스타일.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여배우 로렌 바콜이야말로 젠틀우먼의 상징이자 아이콘이다.

    단정한 블라우스와 똑 떨어지는 팬츠, 웨이브 진 단발머리는 모두 로렌 바콜이 직접 스타일링하고 다듬은 것. 모델 이력은 물론 평소 이브 생 로랑을 비롯한 여러 디자이너들과의 인연을 통해 터득한 그녀의 시그니처 룩이 이번 시즌 젠틀우먼 스타일에 영향을 주고 있다.

    “휘파람 부는 법 알죠?” 1944년, 카리브 해의 어느 바. 어느 매력적인 여인이 눈빛에 힘을 보태 험프리 보가트에게 건네는 나지막한 한 마디로 세상이 후끈 달아올랐다. 데뷔작 <소유와 무소유>에서 로렌 바콜(Lauren Bacall)은 이 대사로 스타덤에 올랐다. 특히 대사 전후의 짧은 침묵이야말로 영화사 가운데 가장 강렬한 여운을 남긴 명장면이라는 게 미국 언론의 품평. 역사적인 동시에 인상적인 장면의 여주인공이 지난 8월 12일,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실 그녀는 2012년 제작된 애니메이션 영화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에서 그레이 원 목소리를 연기하기 전까지 패션 피플들에겐 또 다른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패션 영화 <프레타 포르테>는 물론, 46년작 <빅 슬립>과 53년작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 등의 히트작에서 보여준 일관적인 스타일 말이다. 이런 대표적 옷차림은 시대가 변하는 동안 유행과 상관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시대에 맞지 않거나 유행에 뒤처지는 룩이 아닌, 시대 초월성의 존재감이 있었다고 팬들은 기억한다. “로렌 바콜은 진정한 미국적인 미인이었어요. 미국 스타일의 최고의 모습을 대변했죠”라고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는 'WWD'에 실린 추모 기사를 통해 전했다.

    바콜은 옷에 너무 많은 것을 더하지 않고 ‘그냥’ 입는 것을 패션 철칙으로 여겼다. 소소한 장식이나 축축 늘어지는 디자인도 싫어했다. 골격이 가느다란데다 키가 커서 짧은 재킷도 잘 입지 않았다. 대신 늘 하늘거리는 헐렁한 팬츠를 원했다. 또 큰 칼라와 큼지막한 외투, 단정한 케이프, 캐시미어 스웨터, 스웨이드 셔츠, 오트밀 색상의 플란넬이나 트위드 수트, 여기에 베레 혹은 가르보 슬라우치(챙이 처진 소프트 모자)를 썼다. 그런 뒤 굽이 낮은 구두로 마무리. 스타일리스트의 도움 없이 ‘조화를 이루는 듯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일관된 패션 센스’는 도나 카란, 마이클 코어스, 타미 힐피거 등에게 꾸준히 영향을 줬다. “저음, 귀티나는 외모, 감탄할 정도의 세련미로 우리를 유혹했어요”라고 도나 카란은 추억한다.

    그녀의 잘 빠진 팬츠와 블라우스만큼 팬들이 입꼬리를 올리며 기억하는 건 헤어스타일이다. 그거야말로 낮과 밤, 도시와 시골 등 언제 어디에든 가장 적절한 미국적 헤어스타일이었다고 뷰티 전문가들은 말한다. 특히 옆가르마를 타 한 쪽으로 쓸어 내린 독특한 웨이브 단발머리 역시 헤어스타일리스트의 도움 없이 직접 손질한 것. 게다가 눈썹 족집게도 거부한 채 늘 위로 올라간 숱 많은 아치형 눈썹이란! 페리 앨리스에서 일하던 열아홉 살짜리 신출내기 디자이너 역시 그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화장을 두껍게 하거나 머리를 높이 올린 적이 없어요.” 아이작 미즈라히의 추억이다.

    아울러 “뉴욕적 패션 관점으로 요란하거나 천박한 것에 저항했죠”라고 덧붙인다. 여배우로서 탁월한 패션 감각과 독특한 관점은 패션 모델로 일할 때부터 훈련된 듯 보인다. 루마니아와 폴란드인의 유전자 조합으로 탄생한 그녀는 고등학교 때인 1941년 패션 모델이 됐다. 뉴욕 패션 상업지구인 가먼트 디스트릭트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마르고 겁에 질린 표정이 늘 못마땅한 그녀였다. 자신감이 부족한 그녀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알아챈 패션지 편집장 다이애나 브릴랜드는 모델로 그녀를 섭외했고, 1년 후인 1943년 3월호 표지 모델로 등극! 이후 여배우로 전환해 유명세를 타면서 그녀의 패션 여정이 시작됐다. 그녀는 특정 디자이너의 옷만 편식하지 않았다. 이브생로랑, 노만 로렐, 장 루이, 살바토레 페라가모, 아돌포, 할스턴, 아르마니 등을 골고루 입었다.

    이런 패션 기본기는 영화 <디자이닝 우먼>에서 패션 디자이너를 연기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레이스 켈리를 제치고 따낸 배역이 어찌나 감격스러웠는지 “켈리는 왕자를, 나는 이 역을 얻었다”라고 고백할 정도였다. 그런가 하면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구찌 디너 파티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톰 포드를 전혀 모르지만, 오늘 밤 그의 절친이 될 작정이에요!” 이토록 적극적인 태도는 72세의 그녀를 1997년 <피플>지 선정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물 명단에 포함되게 만들었다. 또 2000년 <베니티 페어>는 세상에서 가장 옷을 잘 입는 인물 목록에 그녀의 이름을 올렸다. 2003년에는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회의 만장일치로 아이코닉 스타일상까지 수상!

    이렇듯 평범한 듯 세련됐고, 유행 초월의 묵직한 이미지로 요즘 대세가 된 ‘젠틀우먼’ 스타일의 근원이 로렌 바콜의 시그니처 룩이다(이번 시즌 디올, 셀린, 프라다, 에르메스, 보테가 베네타, 지방시, 랑방, 하이더 아커만, 랄프 로렌, 메종 마르탱 마르지엘라에서 바콜 스타일을 볼 수 있다). 그건 그녀를 선망의 대상으로 여긴 미국 여인들의 평판에서도 알 수 있다. “과장하고 꾸미기 보다 자연스러움을 선호했다.” 이게 성숙한 가을 여인의 매력이 솔솔 풍기는 로렌 바콜 스타일! 패스트 푸드나 디지털 콘텐츠처럼 쉽게, 재빨리 소비되는 요즘 젊은 스타들의 외모 가꾸기 작전 앞에 그녀의 시그니처 룩을 모범 교본으로 선물하고 싶은 이유다. 자신의 스타일에 대한 순수한 애착과 자신감, 허세와 순간적 자극에 대한 거부야말로 요즘 스타들에게 필요한 덕목이니까.

    에디터
    패션 에디터 / 신광호
    사진
    James Cochrane, Indig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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