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즌의 블랙

천지창조 이후, 이 색깔에 대한 수많은 해석과 품평이 존재했다.
하지만 아무리 말해도 입 아프지 않은 색깔이야말로 바로 블랙.
상복 전시는 물론 블랙 향수와 메이크업 덕분에 더 풍부한 표정을 지니게 된 이번 시즌의 블랙!



시끌벅적하게 되돌아온 60년대 분위기와 팝아트 유행의 등쌀에 총천연색이 유행이다. 게다가 자연에 대한 본능적 갈구와 지구온난화로 인해 겨울에도 연두색부터 짙은 풀색까지 온갖 초록을 만끽할 수 있는 요즘. 그래서인지 우리가 입에 달고 사는 색깔 하나, 그 단호하며 세련된 발음이 이번만큼은 어딘지 구태의연하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그 색깔은 패션에 있어선 쉽게 우릴 실망시키지 않았다. 동양인 신체조건과도 맞아떨어져 옷장 앞에 설 땐 배신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심지어 겨울이라면? 이 색깔을 빼놓고 어찌 매일 스타일링을 완성할 수 있었겠나? 지난달 우리가 소개한 프랑스 패션 유명인사, 캐롤린 드 매그레 역시 자신이 발간한 책에 ‘실수하지 않는 컬러’라고 전한 색이다. 또 <뉴욕 타임스>는 10월이 시작되자마자 ‘이 색 없인 외출하지 말라’는 기사를 쓰며 투자 가치가 있는 물건들을 소개했다. 어딘지 인상이 어두운데다 우울과 비통, 상실과 참회의 상징, 바로 ‘블랙’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무실에 출근하든 친구들과 물 좋은 곳에서 만나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올 블랙으로 빼입고 가면, 그중 누군가 꼭 이렇게 태클을 거는 사람이 있다. “장례식 가니?” 아닌 게 아니라 블랙은 상복과 깊고 진한 인연이 있다. 옛날 옛적부터 죽음의 색이었으니까. 블랙의 이 지점을 건드린 전시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10월 21일부터 내년 2월 1일까지 열리고 있다. 메트 박물관 코스튬 인스티튜트가 기획한 전시로,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여성들의 상복이 어떤 식으로 심미적으로 발전해왔는지, 이 슬픈 옷이 어떤 문화적 요소를 드러내는지 조명하고 있다. “상복을 물들인 블랙은 시대에 따른 실루엣의 진화를 가능케 했습니다”라고 전시를 기획한 헤럴드 코다는 설명했다. “베일을 쓴 미망인은 다른 이들의 동정심뿐 아니라 약탈을 노리는 남자들의 접근을 유발하기도 했죠. 성 경험은 있으나 지어미로서의 제약이 부재한 상태니까요. 때로 사회적 위계질서에 대한 잠재적 위협으로 여겨지기도 했죠.”

헤럴드 코다의 해석대로, 블랙만큼 패션 실루엣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다(‘실루엣’이라는 낱말의 뜻도 ‘윤곽의 안을 검게 칠한 사람의 얼굴 그림’을 의미하지 않나).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 블랙이 아니었다면 꼼데가르쏭과 요지 야마모토의 전위적 실험은 훨씬 힘이 덜했을 것이다(내년 봄을 위해 레이 카와쿠보는 자신의 아방가르드적 성향을 죄다 빨강으로 표현하긴 했지만). 사실 일본 디자이너들의 80년대 파리 첫 원정에 필요한 ‘무기’는 도쿄 시내 여기저기서 까악까악 우는 까마귀의 컬러, 블랙이었다. 당시 레이, 요지, 이세이의 블랙 캣워크를 두고 <맥베스>의 무서운 세 자매가 떠올랐다는 패션 전문가들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들의 과장되고 왜곡된 블랙 실루엣은 이번 시즌 알렉산더 맥퀸의 사라 버튼, 랑방의 알버 엘바즈, 더 로의 올슨 자매, 그리고 릭 오웬스, 알렉산더 왕 등이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연말 분위기를 감안해 금속성 터치를 곁들여 빛과 색이 전무한 블랙에 풍부한 표정을 더한 디자이너들도 꽤 많다. 창립자의 위대한 유산인 은빛 철조망을 늘씬한 블랙 팬츠와 짝지은 파코 라반의 줄리앙 도세나부터, 금빛 기하학 조각들을 블랙 튜닉 위에 촘촘히 붙인 클로에의 클레어 웨이트 켈러까지. 그러나 에밀리오 푸치의 피터 던다스나 돌체앤가바나의 도미니코와 스테파노는 뭐니 뭐니 해도 블랙이 여인의 살갗과 맞닿았을 때 관능미가 폭발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곱게 가꾼 피부 위에 그들의 검정 레이스 드레스 한 벌이라면? 온갖 금은보화 장신구가 도리어 초라해 보일 정도다.

 

이렇듯 블랙의 형태를 비틀면 전에 볼 수 없었던 형상이 완성된다(가령 레이의 그 육중한 형상이 블랙이 아니었다면 패션을 통해 소름 끼칠 일은 드물었을 것이다). 여기에 빛의 조각을 첨가한다면 무채무광의 속성은 사라진 채 새로운 지위와 권력 비슷한 것들이 더해진다. 또 살갗이 교묘히 비치기라도 한다면 엄격한 금욕주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패션이 그토록 원하는 섹스어필까지 가능하다(베르사체는 이 두 가지 기법을 동시에 사용해 옷을 만든다). 그런가 하면, 블랙만큼 옷감에 따라 천차만별의 결과물을 내는 것도 없다. 특히 가죽과 새틴이 그렇다. 루이 비통, 샤넬, 발맹, 프라다, 휴고 보스 등의 윤기가 좔좔 흐르는 최고급 가죽 코트, 매끈한 새틴 드레스와 팬츠 수트를 보라!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컬러가 블랙이 아니었나 싶을 만큼 눈부시다(매장에 들러 조명 아래 진열된 옷들을 보면 충분히 공감할 듯).

패션과 늘 어깨동무하며 동시대 트렌드를 이끄는 뷰티 역시 이번 시즌 은근슬쩍 블랙을 지지했다. 슈퍼모델 마리아칼라가 모델로 등장한 지방시 코스메틱의 누아르 꾸뛰르 볼륨 마스카라 광고는 물론, 숯검정이나 목탄으로 눈꺼풀에 쓱쓱 그어 지문으로 몇 번 문지른 랑방 쇼의 아이 메이크업, 흑조 깃털을 뽑아 튀튀처럼 속눈썹으로 장식한 듯한 알렉산더 맥퀸 등등. 이런 경향 속에 메이크업 아티스트 손대식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불가리 맨 인 블랙’ 향수를 소개하며 이런 문구를 남겼다. “정말 깜짝 놀랬다. 나의 향기를 정확히 ‘똭’ 불가리에서 찾아낼 줄은. 꼼데가르쏭 우드 계열 향을 좋아하는 여성이 쓰면 좋을 듯! 가을향기.” 불가리가 발표한 향수 신작이 남성용인데도 그의 품평과 추천에 따르면 여자에게도 적절한 향이 블랙이라는 것이다.





이세이 미야케 역시 칠흑 같은 밤을 향으로 표현하며 ‘Nuit’(프랑스어로 밤을 뜻하는 단어)를 새까만 패키지의 향수와 광고로 준비했다. 계절을 색깔로 구분할 때, 봄과 여름이 그린과 블루라면 가을과 겨울은 브라운 혹은 블랙. 그러니 향수 마켓에서 블랙을 컨셉으로 한 신작 발표 시리즈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심지어 레이디 가가의 새 향수 ‘오 드 가가’ 패키지도 온통 블랙.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올해 출현한 검은 향의 압권은 단연 YSL 뷰티의 오피움이다. 영화 <클루트>의 멋쟁이 주인공 제인 폰다처럼 꾸민 슈퍼모델 에디 캠벨의 룩은 패피들에게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평범한 금발 머리 소녀가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 것 역시 블랙 커트 머리 덕분이다. 여기에 시커먼 아이섀도, 검정 코트, 검정 네일 케어, 그리고 어두침침한 밤거리로 포장한 오피움 광고 이미지까지. 야릇하고 농밀한 겨울 밤을 상상하기에 딱이다.

지난 10월 첫 주말,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블랙은 레드 카펫의 새로운 권력처럼 떠올랐다. 김희애 · 고아성 · 클라라 · 신세경 등이 화이트와 아이보리의 미묘한 뉘앙스를 오갈 때, 블랙을 고른 엄정화 · 문소리 · 정유미 · 이솜 · 김새론 등은 좀더 압도적으로 팬들과 인터넷 취재진의 눈에 들어왔다(심지어 조연급이나 신인 배우들조차 블랙 드레스를 입자 갑자기 존재감이 생길 정도). 솔직히 여배우라면, 그곳이 레드 카펫이라면, 게다가 파티가 기다리는 밤이라면? 순수함이나 백치미 보다는 나쁜 여자와 성적 매력을 사향처럼 뿜어내는 블랙 드레스만한 게 또 있을까!

바야흐로 초겨울.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레드 카펫 사진이나 감상하던 여자들도 여배우들처럼 낮보다 밤을 위해 갖춰 입어야 할 시간이다. 레드, 화이트, 그린 등 여러 색채 가운데 절대색상을 고를 게 골치 아프다면, 고민하지 말고 이 한 가지만 기억하자. 새로운 시즌이 돌아올 때마다 패션 브랜드와 매체들이 반복해서 주장하는 그것! 유행 컬러를 전할 때 그들이 가장 흔히 쓰는 표현인 “OOO is New Black!” 결국 세상의 모든 색깔들이 패션에서만큼은 블랙처럼 되고픈 욕망을 품었다는 얘기다. 그러니 올겨울 주목받지 않은 듯 주목받고 싶다면 ‘블랙’을 선택하자. 그건 너무 노골적이지도 않으면서도 충분히, 혹은 가장 자극적인 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