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과 페미니즘의 조합

패션과 페미니즘.
60년대와 80년대 이후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이 조합이 지금 다시 화제다.
2014년 현재 패션 속에 존재하는 페미니즘, 그리고 페미니즘 속에 살아 숨 쉬는 패션 이야기.



9월 마지막 날, 파리의 그랑 팔레가 들썩였다. 파리 거리를 그대로 재현한 런웨이로 톱모델들이 시위대처럼 밀려나온 것. 파업과 시위의 도시로 악명 높은 파리에게 당할 만큼 당한 관객들(이번 패션 위크 기간엔 에어프랑스와 약사들 파업으로 어려움을 겪었다)은 그 순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I Am Every Woman’의 멜로디에 맞춰 나온, 카라 델레바인을 비롯한 수많은 모델들이 높이 든 피켓 문구를 보는 순간 미소가 떠올랐다. ‘HeforShe’ ‘History is Her Story’ ‘Feministe mais Feminine’ 등등. 보시다시피 샤넬의 칼 라거펠트는 새 시대의 페미니즘을 호소하고 있었다.

“제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주제를 시위라는 방식으로 선보이는 게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라거펠트는 이번 컬렉션의 주제에 대해 직접 설명했다. “제 어머니는 페미니스트셨어요. 덕분에 저는 페미니스트의 역사와 함께 성장했습니다.” 사회적 이슈를 패션으로 변모시키는 데 탁월한 라거펠트(지난 시즌의 슈퍼마켓 컬렉션은 ‘놈코어’의 유행에 대한 코멘트!)는 이렇게 덧붙였다. “왜 모든 인간이 같은 위치에 설 수 없는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특히 패션계에서 말이죠!” 20대를 능가하는 예민한 촉을 지닌 70대 라거펠트는 새로운 세대의 페미니즘을 재빨리 감지한 것이다. 비욘세는 VMA 공연 도중 ‘FEMINIST’란 문구를 큼지막하게 배경으로 사용했고, 미국 최고 쇼핑몰로 떠오른 ‘Nasty Gal’의 CEO 소피아 아모루소(Sophia Amoruso)의 저서 <#GIRLBOSS>는 해시태그로 유명해졌다. 얼마 전 미국 <보그> 표지에 등장했던 배우 레나 던햄이 쓴 자서전 역시 20대 여성의 솔직함을 가장한 페미니즘을 다루고 있다. 말하자면, 지금 전 세계 여성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크게 내고 있다.

이런 현상은 페이스북 최고 운영 책임자 셰릴 샌드버그(Sheryl Sandberg)의 저서 으로 시작됐다. ‘여성, 일, 그리고 주도하려는 의지’라는 부제를 달고 출간된 이 책은 21세기 페미니즘으로 추앙받고 있다(화제가 된 만큼 논란과 비난에 시달려야만 했지만). 샌드버그는 책 발간에 그치지 않았다. 책과 같은 이름의 재단(LeanIn.org)을 만들어 게티이미지를 비롯, 이미지 판매 사이트에서 통용되는 커리어우먼 이미지들을 바꾸는 운동을 전개한 것. 최근엔 소녀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Bossy’라는 반페미니즘 단어 금지 캠페인도 벌였다. 비욘세, 제니퍼 가너 등의 셀러브리티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샌드버그의 의견에 동참했고, ‘Lean In’은 현재 가장 대표적인 여성 운동 문구로 떠올랐다.





셰릴 샌드버그의 부상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동시에 패셔너블한 여성들의 존재를 함께 부각시키는 중이다. 야후 CEO 마리사 메이어는 오스카 드 라 렌타의 시프트 드레스 차림으로 실리콘 밸리를 지배한다. IMF 최초의 여성 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는 어떤가! 에르메스 실크 스카프를 걸치고 다보스 회의에 참석한 이 백발의 패셔니스타는 샤넬 꾸뛰르 드레스를 입고 프랑스 국회에 참석해 또 한번 화제가 됐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 역시 차기 대권을 노리며 패션계의 지지를 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디자이너들과 만나는 모습이 목격되고 있다(그녀를 지지하는 대표적 인물이 미국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 한편 이번 디올 쇼에서도 LVMH 아르노 회장 곁에 앉은 인물은 마리옹 꼬띠아르와 나탈리아 보디아노바가 아니었다. 한국계 입양인 출신의 플뢰르 펠르랭 프랑스 문화장관이 최고 상석에 앉아 라프 시몬스의 컬렉션을 감상했다.

저메인 그리어(<여성 거세당하다> 등을 쓴 20세기를 대표하는 페미니스트)나 마릴린 프렌치(<여자의 방>을 쓴 여류 소설가)의 책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젊은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이란 단어는 낯설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들에게 ‘브라를 불태우라!’ ‘여성에게 평등을!’ 등 지난 시대의 여권 운동 구호들은 케케묵은 과거사로 다가올 법도 하다. 게다가 ‘남성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예쁜 옷’을 거부한 과거 운동가들을 생각하면 패션과 페미니즘의 거리는 더더욱 멀기만 하다. 하지만 여성들에게 힘과 권력을 선사한 점에서 페미니즘과 패션 사이엔 일맥상통하는 점이 없는 건 아니다. 올가을 컬렉션을 준비한 디자이너들에게 뒷이야기를 들어보자. 많은 디자이너들이 여성들의 힘을 표현했다고 설명한다. “아름다움은 여성들에게 힘(Strength)과 파워를 선사합니다. 여성들에게 아름다움을 주고 싶은 건 바로 그것 때문이죠.” 당대 여성과 동맹 체제를 구축한 랑방의 알버 엘바즈는 자신이 또 다른 페미니스트임을 강조하며 이렇게 전했다.

여성들에게 패션으로 힘을 부여하는 디자이너로 셀린의 피비 파일로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자신의 의지로 클로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를 그만두고,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패션계로 돌아와 당당하게 재능을 과시하는 모습은 21세기 현대 여성의 표본이다. 그녀가 선보이는 현실적이고 여성을 배려하는 옷 역시 ‘페미니스트 패션’ 그 자체다. “피비와 제가 공유하는 건 우리가 디자인하는 옷들이 담고 있는 현실성입니다.” 스텔라 맥카트니도 이렇게 얘기한 적 있다. 사실 일하는 여성들에게 실용적인 동시에 패셔너블한 옷만큼 페미니즘적인 배려가 또 있을까. 그런 면에서 플랫 슈즈의 대유행 역시 ‘페미니스트 구두’로 지칭해도 적절하다.





그러나 맥카트니는 이번 파리 컬렉션에서 던진 말 한마디로 인해 구설에 올랐다. “여성에게 힘이란 공격적으로 보이며 늘 매력적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이 말이 실시간 뉴스를 통해 일파만파 퍼진 것. 게다가 “여성들의 연약함과 부드러움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말까지 더해지자 강력한 여성상을 바라는 사람들 사이에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는 ‘공격적(Aggressive)’이 아닌, ‘거친(Abrasive)’이었으며, 그녀가 전하는 연약함이란 초여름 햇살 속에서 느껴지는 아스라한 느낌이었다고 공식 해명할 정도였다. 정신없는 백스테이지에서 잘못 던진 단어 하나 때문에 영국 여성 운동가들의 표적이 된 이번 사건은 현재 강력한 기세로 불고 있는 패션 페미니즘의 바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CuntToday.com’이란 자극적인 제목의 페미니스트 블로그를 운영하는 영국 아티스트 피비 콜링스-제임스(Phoebe Collings-James)는 모델 생활을 거쳐 페미니스트로 거듭났다. “패션계와 예술계는 어떤 면에서 볼 때 아직도 ‘보이즈 클럽’입니다. ‘남성적 시선(Male-Gaze)’으로 볼 때 뭔가 바람직하지 못해 보이면 진지하지 못한 아티스트가 되기 마련이죠. 그렇기에 제 작업을 통해 그 사실이 틀렸음을 증명해 보이려 합니다.” 지금 패션계를 쥐락펴락하는 여성 디자이너들 역시 자신의 작업과 성공을 통해 스스로 여성 운동가임을 증명하고 있다. 자신의 힘으로 성공한 여성들만큼 이상적인 페미니스트는 없기 때문이다. 랩 드레스로 막강한 패션 제국을 건설한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 가정주부에서 벗어나 지난해 가장 성공적인 억만장자로 기록된 토리 버치, 스타킹으로 시작해 커리어 우먼의 우상이 된 도나 카란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지난 9월 22일 새로운 페미니스트 아이콘이 탄생했다. UN 여성 인권 회담에서 연설한 여배우 엠마 왓슨이 그 주인공. ‘HeForShe’라는 주제를 통해 그녀는 여성들이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갖기 위해서는 남성들의 편견이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 후 ‘디올을 입은 이 새로운 페미니스트 아이콘은 얼마나 반가운 존재인가!’란 기사들이 인터넷 패션 사이트를 도배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60년대 이브생로랑을 입고 페미니스트 운동에 참여한 미우치아 프라다는 스스로의 경험을 이렇게 전했다. “페미니스트들에게 패션은 물리쳐야 할 적이었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죠.” 하지만 꽃무늬 드레스를 입고 높은 구두를 신는다고 여성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프라다도 깨달았다. “하지만 현명한 사람들은 패션을 인정하고 존중했습니다.” 여성들이 자신들이 선택한 옷을 맘껏 입고 즐길 자유! 그거야말로 ‘패셔너블한 페미니즘’임에 틀림없다. “말하자면 그들은 제 작업을 통해 저를 인정해줬습니다. 또 제가 어떤 옷을 입어도 상관하지 않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