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플랫 전성시대

글리터 메리제인은 생로랑(Saint Laurent), 분홍과 골드가 조화를 이룬 운동화는 샤넬(Chanel), 태슬 장식 로퍼는 닥터마틴(Dr.Martens), 와인색 숄더백은 생로랑, 체인 스트랩 백은 샤넬, 데님 팬츠는 캘빈 클라인 진(Calvin Klein Jean), 주얼리는 캘빈 클라인 주얼리(Calvin Klein Jewelry).

뭐든 극단으로 치닫고 나면 반대쪽을 향해 돌진하게 되는 걸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킬힐 시대가 한풀 꺾이더니 기다렸다는 듯 플랫 시대가 도래했다.

하이힐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유난히 언덕이 많고 넓은 캠퍼스를 뛰어다니던 여대생 때도 나는 늘 하이힐에 올라탔었다. 또 하루에도 수십 번씩 회사 로비와 사무실을 오르내리던 어시스턴트 시절에도 하이힐에 발을 맡긴 채 뒤뚱뒤뚱 뛰어다녔다. 하이힐을 꺼내 신는 순간만큼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인어공주가 가시밭길을 걷는 듯한 고통이 엄습할 거란 사실을 망각했다. 이처럼 하이힐을 혹독하게 사랑한 대가로 발은 망가져버렸지만 여전히 하이힐을 포기하긴 힘들었다.

 

스스로 변화를 인지한 건 지난 9월 파리 패션 위크 출장을 떠나기 전날 짐을 챙길 때였다. 하이힐 중독자인 내가 여행 트렁크에 닥터마틴 로퍼, 아크네 메리제인, 반스 슬립온, 젬마양의 펌프스를 넣고 있는 게 아닌가! 가장 멋지게 차려입고 싶은 순간 신겠다고 생각한 네 켤레 중 세 가지가 플랫. 불과 6개월 전, 오로지 하이힐만 챙겼던 것을 떠올려보니 엄청난 변화였다. 이런 심경의 변화는 다른 패피들에게도 찾아온 듯했다. 파리의 울퉁불퉁한 돌바닥에서도 하이힐을 신고 능숙한 척 워킹하던 패피들이 다들 입맛에 맞는 플랫으로 갈아 신은 것. 그레이스 코딩턴의 슬립온(그녀는 나이가 들고 몸무게가 늘면서 줄곧 슬립온만 신는 중), 프랑카 소짜니의 로퍼(미디힐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그녀가 로퍼에 도전하다니!), 가랑스 도레의 발레리나 플랫까지(30cm 힐을 신고 스트리트 사진을 찍던 그녀의 묘기 같은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늘어난 티셔츠, 스키니진, 가죽 재킷, 스틸레토힐을 유니폼처럼 입고 다니던 엠마누엘 알트조차 지난 시즌부터는 굽이 보일 듯 말듯한 키튼힐이나 에스파드류 플랫을 신고 있다. 또 피비 파일로의 아디다스 스탠스미스, 안나 델로 루쏘의 디올 꾸뛰르 운동화 등 스니커즈들이 고개만 돌리면 눈에 띄었다.

 

하이힐은 멋쟁이 여성의 필요충분조건이었다. 하이힐을 신으면 평범한 옷차림도 갑자기 차려입은 것처럼 변신하는 반면, 하이힐을 신지 않으면 잘 차려입었어도 성장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그래서 하이힐을 신지 않으면 입장이 불가한 클럽도 있다!). “늘 하이힐을 신도록!” 카린 로이펠트는 단호하게 조언하기도 했다. “하이힐이 당신에게 힘을 줄 것이다. 다르게 움직이고, 다르게 앉아 있고, 심지어 다르게 말하게 된다.” 도대체 언제부터 하이힐과 플랫 슈즈의 배틀은 시작됐을까? 20세기 중반만 해도 작업용이든 파티용이든, 모든 여성용 신발은 2~3cm 굽의 키튼힐이었고, 소재와 장식으로 TPO가 나뉘었다. 50년대 말, 오드리 헵번이 페라가모, 브리짓 바르도가 레페토를 신었을 때는 납작한 발레 슈즈야말로 숙녀들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었다. 내가 보기에 여자들이 하이힐에 중독된 건 90년대 <섹스앤더시티>에서 캐리가 마놀로 블라닉 마니아로 부르짖던 때와 맞물린다. 엄청나게 높은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레이스업 플랫폼힐을 신은 나오미 캠벨이 런웨이에서 넘어져 일어나지 못한 ‘역사적’ 사건도 그 무렵이다.

뭐든 한쪽 극단에 다다르면 다시 반대쪽을 향한다. 맥시멀리즘이 절정을 지나고 나면, 자연스럽게 미니멀리즘이 찾아오고, 치렁치렁한 롱스커트의 유행이 끝나면 마이크로 미니스커트가 찾아온다. 디자이너들이 치명적으로 높은 하이힐을 만들고, 런웨이에서 모델들이 심심찮게 자빠지며, 레이디 가가와 다프네 기네스가 자신들의 키 1/3쯤 되는 플랫폼힐 위에 올라탄 채 아슬아슬하게 걸어 다니던 모습을 기억하는지! 바로 그 순간이 하이힐의 한계점인 셈. 딱 그즈음부터 패션계가 한마음으로 플랫을 찬미했으니까. 시작은 셀린. 2013 S/S 컬렉션에 모피 소재 버켄스탁이 깜짝 등장하더니 여름 내내 버켄스탁, 테바, 각종 스포츠 샌들(프라다, 지방시, 아크네 등에서 나온)들이 인기를 끌었다. 뒤를 이어 꾸뛰르 시즌엔 반짝이는 샤넬과 디올 운동화까지! 올가을에는 프로엔자 스쿨러, 마르니, 꼼데가르쏭, 돌체앤가바나 등이 로퍼를, 알렉산더 맥퀸은 워커 부츠, 생로랑은 메리제인 슈즈를 선보였다. 물론 내년 봄엔 하이힐을 찾는 일이 더 힘들어졌다. 발렌시아가, 버버리 프로섬, 셀린 등이 모델들에게 플랫을 신겨 편하게 워킹하게 했으니까.

하지만 디자이너, 패션 매거진, 패션 피플들이 아무리 플랫을 신으라고 등 떠밀어도 여전히 하이힐을 선택하는 여자들이 있을 것이다. 신었을 때 신체 비율이 좋아지고, 각선미가 살아나며, 자세가 꼿꼿하게 세워지면서 자신감까지 상승하는 신발은 역시 하이힐이기 때문. 그렇다면 플랫을 신으면서 자신감을 잃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미국 <보그> 스타일리스트이자 슈즈 디자이너인 타비타 시몬스는 두 가지를 조언했다. 우선, 앞코가 뾰족한 것을 선택할 것! 앞코가 뾰족하면 다리가 길어 보이니까. 둘째는 몸매를 드러내는 옷을 입을 것! 치렁치렁한 롱스커트(키가 그면 가능하다)보다 산뜻한 미니스커트, 와이드 팬츠보다 발목을 드러내는 스키니진이 유리하다. 최근 하이힐에서 플랫 슈즈로 갈아탄 <보그 코리아> 스타일 에디터 역시 이 점을 강조한다. “하이힐을 즐겨 신었을 땐 늘 와이드 팬츠나 하이웨이스트 팬츠를 입었어요. 그런데 요즘 운동화만 신다 보니 날씬한 진을 주로 입게 되더군요.” 몇 가지 덧붙인다면, 피부색이나 팬츠와 같은 색상의 플랫을 신으면 다리가 더 길어 보인다. 앞코가 깊게 파여 발가락이 살짝 보일 때도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이와 함께 기존의 TPO 법칙은 기억에서 지울 것! 로퍼, 발레리나 슈즈, 운동화 등 이브닝 파티에 어울리지 않는 신발은 이제 아무것도 없다.

이처럼 플랫에게 새로운 지위가 주어지면서 생긴 가장 큰 변화는 가방 속, 자동차 트렁크 안, 사무실 책상 아래 쟁여둔 플랫들이 신발장 제자리로 돌아가게 됐다는 사실이다. 아침에 하이힐을 신고 나왔다 오후엔 플랫을 갈아 신고는 옷차림과 어울리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이야기. 나 역시 매일 아침 옷차림에 딱 어울리는 플랫을 신고 나와 하루 종일 편안하게 어디든 돌아다닌다. 가끔 너무 가볍게 빨리 달리는 나를 발견하곤 깜짝 놀랄 정도다. 그럼 정신없이 사 모은 하이힐들은 어찌 하냐고? 트렌드는 돌고 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 그때까지는 이 쾌적한 유행에 감사하며 이렇게 묵상하며 걷고 싶을 뿐이다. “유행이여, 제발 낮은 데로 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