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떠오른 패션 스토리텔링

언제부터 모델들의 캣워크와 셀럽이 패션쇼의 전부가 됐나?
그 많던 이야기와 환상적인 순간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사라졌던 스토리텔링이 패션의 수면 위로 다시 떠올랐다.

할리우드 배우들이 총출동한 오프닝 세레모니의 단막극 <100퍼센트 로스트 코튼>. 스파이크 존스와 요나 힐은 패션계의 모습을 신랄하고 풍자적으로 담았다.

2012년 9월, 파리의 어둑한 베르시 체육관에는 축축한 적막이 감돌았다. 힘겹게 깜박이던 형광등이 “윙!” 하는 소리와 함께 간신히 빛을 밝혔다. 그러자 앨빈 스콧 반힐(90년대 남자 모델 출신 배우)의 묵직한 목소리가 넓고 쓸쓸한 공간에 울려 퍼졌다. “언젠가 그가 나타날 거야.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2013 S/S 하이더 아커만 쇼가 보여준 멜랑콜리의 몽상적 퍼포먼스는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릴 정도다. 이렇듯 패션 피플들은 각자의 기억속에 캣워크 스토리텔링을 하나씩 가슴에 품고 있다. 패션 천재들과 전성기를 함께한 축복받은 사람이라면 단연 알렉산더 맥퀸이나 존 갈리아노, 후세인 샬라얀의 SF영화나 예술 공연 같은 쇼를 꼽을 것이다. 이 쇼들은 ‘다음 시즌을 위한 새 옷’ 이상의 의미를 담은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와 분위기로 관객을 압도했다. 그러나 점점 많은 디자이너들이 일상적이고 상업적인 디자인에 초점을 맞추면서, 캣워크가 단순하게 옷을 보여주는 방식에만 머물고 있는 게 요즘 추세. 얼마 전 끝난 2015 봄 여름 패션 위크의 몇몇 디자이너들은 패션이 일상이 아닌 판타지였던 시대로 되돌아가 수많은 패션쇼에 지친 관객들에게 조근조근 이야기를 들려줬다.

시작은 뉴욕 패션 위크의 ‘유일무이’한 이야기꾼인 톰 브라운. 잘 정돈된 녹색 정원에는 일광욕하는 나비 여인과 키다리 꽃 사람, 배드민턴 채와 셔틀콕 마스크를 쓴 소녀가 하얗게 분을 바른 채 석상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지금부터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배경음악 대신 흘러나온 다이앤 키튼의 상냥한 목소리가 톰 브라운이 직접 쓴 이야기를 나직이 풀어놓기 시작했다(옷에 집착하는 여섯 자매에 대한 이야기). 패션쇼는 여섯 자매가 요일별로 함께 옷을 맞춰 입는 내용에 대한 묘사와 함께 진행됐다(어찌나 옷 입는 규칙이 꼼꼼한지 자매들의 유일한 낙인 것처럼 들릴 정도).

그나저나 난데없이 웬 구연동화? “여성복을 처음 시작했던 때의 간결한 형태를 탐미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컬렉션은 꽃과 색으로 시작했고요. 이번 컬렉션에서는 색채가 아주 중요한데, 단순하면서도 컬러풀한 것을 좋아하는 건 바로 아이들이죠.” 여섯 자매들이 월요일에 입는 말쑥한 수트는 요일이 지날수록 알록달록한 꽃 장식과 깃털로 장식됐다. 스티븐 존스의 가방 모양 와이어와 미니어처 튀튀 혹은 치맛단을 활짝 펼친 뉴 룩 헤드피스는 톰 브라운표 동화를 한층 비현실적으로 만들었다. “모델들이 머리에 터번처럼 두른 것도 아동용 재킷이랍니다!” 너무 쿨한 나머지 냉소적이기 쉬운 패션 위크 기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녹인 스토리텔링은 오프닝 세레모니로 이어졌다. 영화감독 스파이크 존즈가 움베르토 레온에게 제안해 요나 힐과 공동 각본을 쓰고 감독한 단막극 <100% 로스트 코튼>은 ‘전-인터넷 소셜 미디어(pre-internet social media)’ 스타일로 진행됐다. 이 패션쇼 극은 9월 7일 저녁 7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연됐을 뿐 아니라, 관객들의 SNS도 금지했기 때문(그럼에도 인스타그램에는 뒷자리에서 몰래 찍은 듯한 사진이 떠돌고 있다). 극은 오프닝 세레모니의 다음 컬렉션 준비 과정으로 시작했다. 실존 인물인 디자이너, 스타일리스트, 모델, 저널리스트 캐릭터는 천박함과 부조리함, 중독 문제, 나이 어린 여자 모델에 대한 부당한 대우 같은 패션계의 고질적 문제들을 조금씩 건드렸다. 레온(존 카메론 미첼)과 림(캐서린 키너)은 캐스팅을 위해 들른 모델들에게 가차 없이 악담을 쏟아붓는다. “저 모델의 다리 때문에 스커트가 끔찍해 보여! 대체 다리가 왜 그 모양이야? 원래 네 다리 맞니?”

스타일리스트 브라이언 몰로이(바비 카나베일)는 레온의 남편 패트릭(이름으로만 등장)과 사랑에 빠진다. ‘엄청 쎈’ 캐릭터로 묘사된 림은 세 남자의 삼각관계에 스트레스를 받다가 <보그> 에디터 리사 러브(라시다 존스) 앞에서 레온과 말다툼까지 벌인다. “그래, 브라이언은 패트릭과 사랑에 빠졌고 넌 패트릭을 무시하지. 너네 전부 나쁜 놈들이야. 그리고 난 그 덕에 돈을 잃었다구!” 한편 잇 걸 벨라(드리 헤밍웨이)는 패션계의 뮤즈가 되고 싶어 하지만 자신의 위치에 불안해하고,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슈퍼 모델 칼리 클로스(본인)는 패션계의 눈꼴사나운 ‘쌍년’ 캐릭터를 실감나게 연기했다. 그런가 하면 이제 막 패션계에 입문한 16세 새내기 모델 줄리(엘르 패닝)는 그저 핑크빛 환상과 기대로 부풀어 있다. 그렇다면 패션계에 대한 블랙코미디, 혹은 휴먼 드라마로 표현되는 극의 결말은? 피폐해진 ‘우리’를 되돌아보고 다시 희망과 믿음(순수한 줄리가 대변하는)을 갖는 것. 그나저나 새 시즌을 위해 가장 중요한 옷들은? 무대에 엑스트라로 등장한 모델들이 입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분위기로 가득한 마크 제이콥스 쇼의 분홍집 무대. 직접 헤드폰을 쓰고 리허설을 점검 중인 마크 제이콥스.

어떤 사람들은 초등학교 학예회가 떠오르는 연극 무대나 코스튬 같은 의상에 쓴웃음을 지을지 모르겠다. 또 억지로 끼워 맞춘 유치한 설정이 난무하던 시절엔 단순한 런웨이쇼가 훨씬 품격 있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프런트 로에 앉고, 누가 가장 먼저 새 컬렉션을 입었느냐를 확인하기 위한 유명인사와 스트리트 스타일 싸움의 배경으로 전락한 게 요즘 패션쇼인 것도 사실이다. 가장 소중하고 마술 같았던 그 시간(그 짧은 시간에 동참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고군분투했던가!)은 어느새 스마트폰 하나면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 됐다.

활기차고 상냥하게 시작했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보다 깊은 성찰로 이끌기도 했다. 마크 제이콥스는 불안과 철학적 사고를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분홍집 주위로 우리를 초대했다. 빗자루 같은 검정 가발을 똑같이 쓴 모델들은 밀리터리풍의 옷을 입고 심상치 않은 기운으로 가득한 분홍집 주위를 줄지어 돌았다. 자리마다 놓인 닥터 드레 헤드폰에선 단조로운 남자의 목소리가 현악기 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이제 나는 큰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부츠를 신은 소녀를 따라가길 원한다.” “늘 손톱을 물어뜯는 소녀를 내보내라.” 타자기 두드리는 소리가 난 다음에 나오는 멘트. “누군가 그 연구에서 타자기를 사용하고 있다.” 눈과 귀의 경험과 일치하는 지시 사항은 우리가 감시 당하는 듯한 아주 불편한 기분과 불안한 의문(우리의 행동은 얼마나 독립적인가? 도처에서 우리를 감시하고 포착하는 권력과 미디어는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가?)마저 들게 했다.

어쩌면 제이콥스는 단순히 지난 시즌(올겨울 컬렉션에 울려 퍼진 제시카 랭의 목소리를 떠올려보라!)부터 매력을 느낀 내레이션의 또 다른 방식으로 이 장치를 고안했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관객들 모두 스마트폰에 저장하는 것을 잠시 잊고 온전히 무대에 눈과 귀를 기울였다는 것. 자신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솔직한 고백 같은 한마디로 쇼는 끝났다. “너무 많은 것들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곳으로 집을 옮길 수 있을까? 그 곳에서 나는 행복할 것이다.” 쇼장을 빠져 나온 사람들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으로 울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돌아갔다. <워싱턴포스트>의 패션 저널리스트 로빈 기브핸처럼 말이다. “미학, 음악, 시적인 주문, 그리고 단순한 분홍집으로 이뤄진 짧은 쇼에서 제이콥스는 끝없이 지속되는 불안감을 포착했다. 불분명하지만 뚜렷한 그 무엇. 그 느낌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창의적인 패션 생태계를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스토리텔링,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