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드로잉 아티스트들의 편지

손으로 직접 쓰고 그리고 색칠한 드로잉 작품엔 컴퓨터 그래픽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아주 특별한 매력이 있다. 패션과의 협업으로 잘 알려진 세 명의 드로잉 아티스트들이
흥미로운 자기소개서와 함께 <보그 코리아>만을 위한 드로잉 작품을 보내왔다.

QUESTIONS
1 드로잉 아티스트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2 당신의 작업을 정의하는 세 단어는?
3 손으로 하는 작업의 매력은?
4 작업 과정에서 가장 힘든 점은?
5 즐겨 사용하는 도구는?
6 이제껏 해온 패션 콜라보레이션 작업은?
7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8 현재 준비 중인 작품은?
9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는?
10 영감의 원천은?
11 필수품으로 여기는 패션 아이템은?
12 당신의 작품으로 타투를 한다면?
13 신인 아티스트들을 위한 조언 한마디!


존 뎀시의 뉴욕 타운하우스에서 열린 ‘드로우버트슨’의 개인 전시.


DONALD ROBERTSON


바비 브라운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아티스트 ‘드로우버트슨(Drawbertson, ‘그리다’라는 단어와 자신의 성을 합친 필명)’, 인스타그램계의 앤디 워홀, 그리고 쌍둥이 형제의 아빠! 항상 자신을 뿔테 안경을 쓴 기린으로 표현하는 도날드 로버트슨은 몇 개의 선으로 쓱싹 스케치하거나, 컬러 테이프를 뚝딱 붙이거나, 각진 붓 터치로 거칠게 흔적을 남긴다. 결과는? 익살스러운 안나 윈투어와 그레이스 코딩턴, 드레스의 입술 프린트, <보그 코리아>를 위한 한글 메시지의 탄생!

한국인 친구의 도움으로 한글을 적어 넣은 작품을 완성시켰다.(위) 수지 멘키스, 카린 로이펠트, 안나 윈투어, 그레이스 코딩턴이 앉아 있는 프런트 로 풍경. 기린은 도날드 로버트슨 자신을 표현한 것.(아래)

1 기억하는 한 어린 시절부터 늘 스케치를 해왔다. 이건 특별한 계기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저 모든 게 운명처럼 흘러갔을 뿐!
2 행복, 세련미, 고급스러움.
3 모든 작업 과정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작업 수단을 결정하는 순간이다. 페인트, 테이프, 물감과 붓 등 여러 도구 중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을 가장 잘 표현할 만한 도구를 그때그때 선택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도구가 스스로 마법을 부린다! 고작 세 개의 선만으로도 아주 인상적인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 단순한 선들이 그토록 놀라운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이 작업에 더 열중할 수밖에 없게 된다.
4 시작하기로 마음먹는 게 가장 힘들다. 일단 에너지를 갖고 시작하면 완성되기까지 멈출 수 없다.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 후에야 마음이 안정된다.
5 가장 많이 쓰는 건 물론 물감과 붓! 단, 반드시 네모반듯한 붓이어야 한다. 둥글거나 뾰족한 붓으로는 그릴 맛이 나지 않는다. 완벽한 붓과 커다란 흰 종이만 있으면 준비 완료다.
6 지난해 자일스 디컨, 케이티 그랜드와 함께 멋진 협업을 진행했다. 자일스 2014 봄 컬렉션을 위한 것이었는데, 내가 그린 케이티의 입술 일러스트를 자일스 드레스 위에 프린트하거나 비즈로 장식했다. 전 세계 <보그>와 작업하고 있고, 카린 로이펠트의 에도 일러스트를 그린다. 이번 기회를 통해 <보그 코리아>에도 내 작업을 소개하게 돼 무척 기쁘다.

스스로를 기린으로 표현하는 도날드 로버트슨. 자일스를 위해 케이티 그랜드의 입술을 다채로운 버전으로 그렸다. 디올 컬렉션 룩을 컬러 테이프로 단순하게 표현하거나, ‘LOVE’를 이용해 루이 비통 로고를 만드는 작업까지!

7 지난 연말, 에스티 로더 그룹의 대표 존 뎀시의 뉴욕 타운하우스에서 ‘살롱 존 뎀시’ 행사가 열렸다. 내 작품들로 집 안 전체를 꾸미는 아주 프라이빗한 전시였다. 바비 브라운에서 일하면서 존을 만났고, 그는 늘 내 작업에 관심이 많다. 영원히 기억에 남을 프로젝트였다.
8 자일스 디콘의 다음 컬렉션도 준비 중이다. 아주 신나는 작업이고, 빨리 결과물을 공개하고 싶다.
9 존 커런트. 어찌나 고전적이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내는지!
10 매일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사진들을 보며 영감을 얻는다. 인스타그램에는 정말 재능 있고 재치 있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11 나만의 유니폼이 있다. 특별한 행사가 있어 수트를 입는 날이 아니면, 리바이스 진과 제이크루 티셔츠, 그리고 워커 부츠 차림!
12 내가 그린 일러스트 중에 딱 하나만 선택해 타투를 해야 한다면? ‘LOVE’라는 단어로 재해석한 루이비통 로고를 온몸에 그려 넣고 싶다.
13 인스타그램에 가입하길! 뉴욕에서 활동하는 내가 <보그 코리아>에 소개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인스타그램 덕분 아닌가. 인스타그램은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그리고 이것은 아티스트들에게 엄청난 기회다.




NICOLAS OUCHENIR


패션쇼 초대장에 정성스럽게 쓰인 이름을 보면 귀한 대접에다 존중받는 기분이다. 패션 피플들의 눈에 익숙한 그 필체의 주인공은 캘리그래퍼 니콜라 우셰니르. 어린 시절, 파리 거리를 그래피티로 뒤덮고 다녔던 소년은 패션 위크 때 가장 바쁜 인물 중 한 명이 됐다. 그는 매 시즌 1만5,000여 장의 초대장에 이름을 쓰고, 여러 브랜드의 로고를 디자인하며, 새로운 스타일의 알파벳 시리즈를 개발한다(러브 레터를 대신 써달라는 몇몇 고객의 요구를 들어줄 때도 있다). 펜과 잉크만으로 패션계를 매혹시킨 그가 ‘Vogue Korea’만으로 묘사한 작품은 더없이 기발하다.



1 10년 전, JBM 갤러리의 장-가브리엘 미테랑의 어시스턴트로 일하던 시절, 예술품 수집가들에게 손으로 직접 쓴 초대장을 보낼 기회가 있었다. 평소 글씨를 예쁘게 쓰는 편이었던 내가 초대장에 이름을 쓰게 됐는데, 무척 재미있었다. 내 안에 캘리그래퍼가 되고 싶은 열정이 숨어 있었던 거다. 캘리그래퍼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직업이라기보다 타고나는 것 같다. 물론 실력 있는 캘리그래퍼가 되기 위해선 발레리노만큼 맹렬하게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야겠지만.
2 선의 열정을 표현한 것, 특기는 없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 어쩌면 나 자신보다 더 중요한 것!
3 글을 아름답게 쓰는 것에는 그 어떤 세속적인 요소도 포함되지 않는다. 그저 영원한 아름다움이 내재돼 있을 뿐. 글씨체에는 그 사람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휴대폰으로 보내는 문자나 이메일과 달리, 캘리그래피는 하얀 종이 위에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새기는 행위다. 가장 인간적인 형태의 예술이기에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다.
4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그렇겠지만, 인간관계가 가장 힘들다.
5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훌륭한 도구가 된다. 물론 작업 과정에서는 부드러운 펜촉을 가장 많이 쓰지만, 맘만 먹으면 뭐든 활용할 수 있다. 어떤 도구를 사용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도구로 어떤 것을 표현하고 싶은지가 중요하다.
6 매 시즌, 루이 비통, 에르메스, 릭 오웬스, 디올, 까르띠에 등 행사 초대장에 패션 피플들의 이름을 적는다. 수백 명의 이름을 일관된 스타일로 적는 동시에 각각의 브랜드 특성에 맞는 필체를 만들어내야 하는 고난도 작업이다. 가령 마르지엘라를 위해선 자유로우면서도 절제된 글씨체를 쓰고, 비비안 웨스트우드를 위해서는 매 시즌 그녀와 많은 토론을 거친다. 그 밖에 호텔 샤토 마몽의 로고, 모엣 샹동을 위한 알파벳 디자인, 랑콤 광고 캠페인 등 다채로운 작업을 진행 중이다. <보그> <르 피가로> <월페이퍼> 등에 일러스트를 그리는가 하면,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앨범 재킷도 디자인했고, 가끔 타투 도안도 만든다.

글씨를 이용해서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니콜라 우셰니르는 ‘Vogue Korea’를 이용해 완성한 작품 두 점을 보내왔다.

7 지금까지 작업했던 모든 프로젝트들을 생생히 기억한다. 캘리그래피는 어떤 분야에도 한정되지 않기에 아주 다양한 작업을 할 수 있다. 매 순간이 새로운 도전이고 내겐 소중하다.
8 아직 브랜드를 밝힐 순 없지만 메이저 샴페인 브랜드를 완전히 재탄생 시키기 위해 작업 중이다. 현재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작업이기에 무척 기대된다.
9 파리 오페라 하우스의 발레리나 마리 아그네스 길로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같은 분야의 아티스트는 아니지만 배울 점이 무척 많다. 그녀의 몸짓은 인간미가 넘치는 데다 열정적이며 품위 있다. 여러 아티스트들을 좋아하지만 특별한 롤모델은 없다. 각각의 아티스트들에게는 자신만의 정체성이 있어야 하고, 그 정체성을 잃는 순간 더는 작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10 이브 생로랑, 아제딘 알라이야, 다니엘 아샴, 제임스 터렐, 피에르 르탱, 피에르 술라주… 모두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 또 새로운 프로젝트를 앞두고 늘 여행을 떠난다. 그때는 거의 모든 것에서 아이디어가 나온다. 그림, 사진, 장소, 음악 등등.
11 내가 직접 디자인한 루이 비통 만년필과 에르메스 코롱 오‘ 드 젠시앙 블랑쉐’!
12 타투 디자인에 여러 번 참여했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작업 중 하나다. 자신만을 위한 특별한 타투를 아무도 못 보는 비밀스러운 부위에 새기는 일이 아주 매력적이다. 이미 써놓은 작품을 활용하기보다 전혀 새로운 필체를 통해 나만의 타투 도안을 개발할 것이다.
13 무엇보다 중요한 건 모든 감각을 깨우는 것! 시각은 물론 촉각, 후각, 청각, 미각까지. 이 중에 어떤 감각이 어떻게 영향을 줄지 예상할 수 없다. 늘 예민하게 깨어 있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아름다운 선이 나올 수 있다. 아주 리드미컬하게!

쟈 마다우이는 스테인드글라스, 혹은 금속을 활용해 건축물을 장식하는 작품을 만들기도 하지만,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직접 붓을 들고 하는 세밀한 작업이다.


NJA MAHDAOUI


튀니지 출신 쟈 마다우이의 작품은 글씨와 회화의 경계에 존재한다. 언뜻 화려한 색을 채워 넣은 기하학 형태의 추상화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각 아랍 문자를 써놓은 것이다. 모르는 사람 눈에는 도무지 글씨처럼 보이지 않을 만큼 생소한 아랍어를 극도의 심미적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의 특기. 아랍어의 예술성이 패션계를 사로잡고 있는 요즘, 그의 작품이 드레스 위의 패턴으로 재해석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그가 힘 있는 붓글씨로 적은 ‘Vogue’ 스펠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Vogue’가 예술적으로 숨겨져 있는 쟈 마다우이의 작품.

1 예술학교를 다니며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예술의 형태가 어떤건지 오래 숙고했다. 그러다 아랍과 이슬람 예술에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서예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단순히 아랍 문자를 붓글씨로 적는 데 그치지 않고 색다른 디자인 요소를 더하고 싶었다. 그 결과가 바로 여러 컬러와 문양을 더하고 기하학 형태로 재해석한 서예. 졸업과 함께 여러 곳에서 전시 요청이 들어왔고 자연스럽게 내 전문 분야가 됐다.
2 공존, 문화, 예술!
3 문자를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건 시각적 아름다움과 언어, 혹은 목소리를 조화롭게 만드는 과정이다. 전혀 다른 요소들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미학적 결과물이 탄생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매번 작업을 할 때마다 이번엔 또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대된다.
4 새 작품을 준비할 땐 머릿속에서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떠오른다. 그 가운데 어떤 게 보석인지 깨닫고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결단의 순간이 아주 힘들다. 일단 출발점을 정하고 나면 이를 표현하는 과정은 오히려 쉽다.
5 기본적으로 서예를 바탕으로 한 만큼, 붓과 잉크, 물감을 가장 많이 쓴다. 붓 터치를 통해서만 표현해낼 수 있는 미묘한 아름다움이 있다. 하지만 스테인드글라스, 혹은 금속으로 작업하는 경우도 있다. 문자를 회화화한다는 근본적인 틀을 유지하는 선에서 다채로운 도구를 쓰는 편이다. 어떤 도구를 이용하든 거 추장스러운 장식으로 복잡한 결과물을 만들기보다 가능한 한 간결하게 표현한다.
6 튀니지의 아멜 에세기르, 인도의 제이제이 발라야 등 패션 디자이너들과의 콜라보레이션을 꾸준히 진행 중이다. 사진가 르네 하버마커, 나오미 캠벨, 아제딘 알라이야와 함께하는 <누메로> 촬영에도 참여했다. 최근에는 마리오스 슈왑의 2013 가을 컬렉션을 위해 다섯 벌의 드레스에 캘리그래피 작품을 그려 넣었다.



7 지난 2010년, 사우디 아라비아의 ‘킹 압둘라 과학기술대학(KAUST)’ 사원을 디자인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과학, 이슬람 사원, 그리고 예술을 접목시키는 작업이었다.
8 밀라노의 출판사 스키라(Skira)와 함께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그동안의 작업들을 엄선해 다룰 예정이다. 내년에는 두바이 엘 마르사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다. 두 건의 큰 프로젝트를 동시에 준비하다 보니 하루하루가 무척 바쁘다.
9 바실리 칸딘스키!
10 역시 바실리 칸딘스키. 그의 작품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 봐도 많은 영감을 준다.
11 주머니가 달린 긴팔 셔츠를 좋아해 여러 버전으로 사놓는다. 단 100% 코튼이어야 하고, 팬츠는 반드시 어두운 색만 입는다. 특별한 날 기분 전환을 위해선 벨벳 소재 팬츠를 입는다.
12 만약 타투를 하겠다고 결심하게 된다면, 왼쪽 가슴의 심장 부근 정도? 그곳에 정성껏 ‘자유’라고 새길 것이다.
13 어떤 예술이든 다 마찬가지겠지만, 서예를 선택한다면 엄격하게 교육받을 필요가 있다. 내면의 욕망을 다스려야만 훌륭한 예술품이 탄생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