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의 불온한 사랑

“난 최고의 여자니까.”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의 호사스러운 무대 위에서 옥주현이 노래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카이의 눈이 젖어 있다.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녀를 사랑한 또 다른 남자 한스 악셀 폰 페르센 백작의 불온한 사랑이 시작된다.

옥주현의 소매 부분을 모피로 장식한 크롭트 재킷은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 페티코트 스타일의 스커트와 플랫폼 하이힐은 진태옥(Jintèok), 곰 모티브 실크 팬츠는 푸시버튼(Pushbutton), 망사 스카프는 맥앤로건(Mag&Logan), 손에 칭칭 감은 진주 목걸이는 샤넬(Chanel).

오전 10시, 압구정 로데오거리 한복판의 지하 스튜디오. 말쑥한 차림을 한 카이가 소리 없이 다가와 꾸벅 인사를 했다. 소년의 미소를 가진 훤칠한 키의 청년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팝페라 가수, 혹은 크로스오버 뮤지션이라 불리는 청년 카이. 그는 지난달 두 번째 정규 앨범 를 발매했고, 매일 오후 클래식 음악을 전하는 KBS 1FM <세상의 모든 음악, 카이입니다>의 6년 차 DJ이기도 하다. 지난 11월 1일부터는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의 한스 악셀 폰 페르센 백작으로 무대에 서고 있다. 사치스럽도록 화려한 무대와 그에 못지않은 궁정 의상들, 그리고 비장한 역사를 훑고 지나는 드라마틱한 내러티브로 이미 뮤지컬 애호가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공연이다. 독일인 극작가 미하엘 쿤체가 엔도 슈사쿠의 소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영감을 얻어 대극장 뮤지컬로 탄생시킨 18세기 프랑스 왕비의 굴곡진 드라마는 서울로 무대를 옮기면서 과감한 리모델링을 단행했다. 극작가 미하엘 쿤체는 주인공 마리 앙투아네트의 비중을 늘려 각색했고, 작곡가 실베스터 르베이는 2006년 일본 초연과 2009년 독일 공연에도 없었던 뮤지컬 넘버를 아홉 곡이나 보완해 한국 관객에게 선보였다.

“좋은 결과를 위해 스태프 사이에서 언쟁이 벌어지기도 했어요. 배우들도 상당히 많은 고민이 있었는데, 마침내 무대에 오르고 보니 그래서인지 더 뿌듯하더라고요.” 얼굴 가득 인상 좋은 웃음을 짓는 저 맑은 청년이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불온한 사랑을 나누는 그 페르센 백작이란 말인가? 카이는 첫 공연을 마치고 관객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어요. 몇몇 배우도 마찬가지였고요. <마리 앙투아네트>의 스토리가 감동적이기도 했지만, 공연을 준비하고 무대에 올리는 과정에서 느낀 복잡한 감정들이 터져 나왔던 것 같아요. 힘들고도 즐거웠던 순간들이오. 한 선배께서는 ‘첫공’이 아니라 ‘막공’ 같다는 얘기도 하셨어요.” 카이는 다시 공연 열기에 휩싸이는 듯 보였다.

1시간 넘게 헤어 메이크업을 손본 그는 새로운 남자가 되어 나타났다. 서울대학교 대학원생 정기열(그는 오랫동안 음대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에서 다재다능한 엔터테이너 카이(성악가 조수미가 지어준 이름!)로 변신한 것이다. 18세기 프랑스 궁정의 뉘앙스가 느껴질 만큼 과장되게 부풀어 오른 머리와 창백한 피부톤을 강조한 메이크업이 어색했던지 거울을 들여다보던 그가 또 웃었다.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시간이네요.” 스모키한 아이라인 속에서도 그의 순진한 눈웃음은 여전했지만, 사진가의 뷰파인더 안에서 만나는 카이는 조금 달랐다. 그는 몰입이 빠른 피사체였다. 부드러운 얼굴선과 상냥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21세기에 되살아난 청년 페르센 백작이 자신의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하며 카메라 렌즈를 응시했다. “페르센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또 다른 여인 마그리드 아르노를 의미있게 밝혀주는 역할이죠. 실제로 저도 남들 앞에서 도드라지게 멋져 보이기보다 저로 인해 누군가 빛이 날 때 더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관객 입장에선 불륜 관계인 데다 조금 답답하고 감정 변화가 급박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저로선 순수한 사랑을 지키려는 페르센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본격적인 인터뷰를 위해 자리를 옮겼을 때, 카이는 의자를 당겨 바짝 다가와 앉았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이었다,



카이의 볼드한 스트라이프 프린트 롱 코트와 셔츠, 쇼츠는 모두 김서룡(Kimseoryong), 베이지색 레이스업 로퍼는 던힐(Dunhill).

카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스튜디오에 도착한 옥주현은 곧장 머리부터 만지기 시작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통해 풍성한 중세 가발에 익숙해진 탓일까? 높고 무거운 가발을 머리에 이고도 찡그린 표정 하나 없다. “제가 카이에게 기대볼게요.” 무대에서 충분히 펼칠 수 없었던 애정 신을 그려내듯 그녀는 바닥에 앉아 망연히 카이의 무릎에 이마를 기댔다(옥주현이 카이보다 한 살 위, 그들은 반말과 존댓말을 자연스럽게 섞어 썼다). 답답한 프랑스 궁정 생활에 지친 마리 앙투아네트가 정서적 사랑을 나누는 페르센 백작을 만나 유일하게 여자로서 안식을 찾는 한 장면 같았다. 급하게 셔터 소리가 울리고, 등 뒤에선 낮은 감탄사가 터졌다.

“2년 전 제작진과 함께 프랑스에 다녀온 적이 있어요. 여행 겸 견학이었는데, 베르사유 궁전을 둘러보며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고, 뮤지컬에 등장하는 그녀를 상상했죠. <레베카>보다 먼저 계약한 작품이었어요.” 탁월한 티켓 파워를 자랑하는 여배우 옥주현이 한겨울 ‘뮤지컬 시즌’에 선택한 작품이 무엇일지 궁금한 것은 당연했다. 내년 2월 1일까지 장기 레이스를 펼치는 그녀에게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연스럽게 다가왔다고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이끄는 또 다른 여자 주인공 마그리드 아르노(역사적 사건을 다룬 뮤지컬에 등장하는 유일한 가상 인물)의 넘버들도 매력적이었지만, 이미 옥주현은 시대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왕비에 동화되어 있었다. 국고를 바닥낼 만큼 사치스러웠던 속물, 시민군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말했다는 철부지, 불륜과 동성애에 빠져들었던 팜므파탈 등 역사적 관점에 따라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를 기억하는 시선은 각기 달랐지만 옥주현의 눈에 비친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저 가엾은 여자’였다. “철없는 어린 시절을 보낸 순진한 여인이었어요. 그런 그녀의 삶이 녹록지 않게 펼쳐지니 가여웠어요. 오스트리아 왕가 출신인 그녀가 열아홉 살에 정략결혼해 왕비가 됐을 때부터 프랑스는 수교적인 차원에서 그녀를 볼 뿐,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거든요. 돌을 던질 누군가가 필요했던 시민들에게 함부로 내던져진 불쌍한 여자죠. 당시 역사에 의해 왜곡되고 피해 입은 사람이 그녀만은 아니었겠지만…” 배우는 말끝을 흐렸다. 두툼한 소설책을 줄 쳐가며 읽었다던 그녀가 단순히 문장만 훑어본 것 같진 않았다(카이가 건네준 <베르사유의 장미> 만화책 아홉 권도 정독했다고!). 실제로 ‘빵 대신 케이크’를 운운한 에피소드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한 말이 아니었으며, 사건마다 적잖은 오해가 더해진 결과였다는 사실이 그녀가 단두대에서 처형된 뒤 밝혀지기도 했다. “실존 인물이어서 부담스럽지만, 이렇게나 오랫동안 역사가 기억하는 여인의 삶을 연기할 수 있다는 건 분명 행운 같아요.”

그때 갑자기 불이 꺼졌다. 오가던 스태프가 인터뷰 진행 중이던 스튜디오 한 쪽의 전등 스위치를 모조리 건드린 모양이었다. 당황스러워 두리번대는데 옥주현이 말을 던졌다. “분위기 좋은데, 그냥 불 끄고 얘기할까요?” 그제야 어둠 속에 엷은 햇살이 스며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내 불이 켜졌지만, 이번엔 다시 불을 꺼달라고 부탁했다. 전직 아이돌 요정 출신의 쉽지만은 않았던 홀로서기와 여행(혹은 충전!)에 대한 간절함, 물을 많이 마시는 목 관리법과 꾸준히 지키고 있는 필라테스, 그리고 <무한도전>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촬영기 등 마리 앙투아네트와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가 그때부터 시작됐다. 핑클 시절의 인기는 잊었다던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얼마간 맴돌았다. 아무려면 어떤가. 지금 그녀에겐 더 뜨거운 객석의 환호가 떠나질 않는데!



카이의 검정 실크 소재 로브와 화려한 러플 장식 화이트 셔츠, 엠보싱 처리된 팬츠는 모두 김서룡 (Kimseoryong), 호스빗 로퍼는 구찌(Gucci). 옥주현의 소매 부분이 메시 소재로 된 블라우스는 진태옥(Jintèok), 안에 입은 러플 블라우스는 오브제(Obzee), 와이드 팬츠는 김서룡, 에스닉한 목걸이는 모두 샤넬(Chanel). 

마리 앙투아네트 역에는 옥주현과 함께 김소현이 더블캐스팅됐다. 카이는 두 여인을 모두 사랑한다고 강조했다. 페르센 백작처럼 확신에 찬 어조였다. “소현 누나는 실제로도 굉장히 쾌활하고 귀여우세요. 그녀의 마리에게선 철없는 소녀에서 아이 엄마로 변해가는 과정이 선명하게 느껴지죠. 옥주현의 마리는 어린 공주로서의 삶에서 왕비의 존엄을 갖춰가는 과정이 더 적나라하게 다가오고요. 같은 역할도 이렇게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그렇다면 페르센 백작 역할에 윤형렬, 전동석과 함께 트리플 캐스팅된 카이만의 매력은 무엇일까. 옥주현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라고 귀띔해줬다. 실제로 배우마다 역할에 대한 해석도 달라서 페르센 백작마다 대사와 동선이 달라지기도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로부터 떠나면서 페르센이 함께 노래 부르는 장면이 있어요. 듀엣이지만 혼자 부르는 대목이 부각되는데, 그때 다른 페르센과 달리 저는 관객 앞으로 나서지 않고 뒤돌아 마리 앙투아네트를 바라보며 노래합니다. 핀 조명도 제가 아닌 마리에게 비추길 원했죠. 그게 제가 해석한 페르센의 진실한 마음이니까요. 물론 스태프와 주현 씨도 동의해줬고요.” 무대 위에서 다른 배우들에게 설득력 있는 동료이고 싶다던 카이는 이미 그 목표치에 제법 다다른 것이 아닐까.

라디오 방송 때문에 아쉽게도 먼저 화보 촬영 현장을 떠나야 했던 카이에게 앞으로 맡고 싶은 배역에 대해 물었다. 인터뷰 중간중간 <지킬앤하이드>를 언급하던 그가 떠올라서였다. “무대에서 연거푸 귀족, 변호사 같은 귀하게 자란 역할을 맡아오긴 했지만 아직까지 변화에 대한 강박은 없어요. 나만의 캐릭터를 갖는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잖아요. 지금 주어지는 역할을 충실히 잘해내다 보면 언젠가는 멋진 악역과 짐승 같은 상남자 배역도 다가오겠죠.” 2년 전 제18회 뮤지컬대상에서 신인상을 거머쥔 신선한 뮤지컬 배우 카이다운 진솔한 목소리였다. 그해 옥주현은 같은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뿐 아니라 지난해엔 <레베카>의 덴버스 부인 역할로 조연상까지 손에 넣기도 했다. 조연임에도 그녀는 전체 극을 압도했다. 같은 질문에 옥주현은 카이와는 조금 다른 답변을 내놓았다. “비중과 상관없이 캐릭터의 다양함을 계속 추구하고 싶어요. 저 역시 변화에 대한 강박은 없지만, 안 해본 작품과 역할에 계속 도전하고 싶거든요. 무대 위에서 기왕이면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을 만나고 싶은 거죠.”

뮤지컬 데뷔 9년 내내 정상 자리를 지켜온 옥주현에게 그 소회를 묻자 의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전 제가 톱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떻게 떠밀려 온 거죠. 처음부터 잘했던 것도 아니고, 지금도 강하지 않아요. 계속 흔들리면서 준비했고, 역할을 하나씩 해가면서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조명이든 의상이든 동료 스태프든 주변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이 정도 몫을 할 수 있게 된 거죠.” 자신의 역할만이 아니라 극 전체와 뮤지컬 제작 환경까지 고민을 나누던 그녀였기에 배우 옥주현의 성장은 좀더 확연히 다가왔다. 두 배우는 막이 오르는 순간, 무대와 관객과 그 시간만이 만들어내는 짜릿한 공감이 뮤지컬의 이기적인 매혹이라고 말했다. 옥주현은 오늘 밤에도 마리 앙투아네트가 되어 애잔한 넘버 ‘영원히 기억될 오늘’을 부를 것이다. 그렇게 둘은 영원히 기억될 오늘을 쌓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