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겨울 패션 키워드, '코지'

올겨울 패션 키워드 ‘코지’.
아늑하고 포근한 스타일은 한철 유행을 넘어 하나의 스타일이 됐다.
엄마의 손길처럼 아기자기한 아이디어로 가득한 패션 이야기.



높디 높은 킬힐, 천근만근 무거운 빅 백, 족쇄처럼 몸을 옥죄는 보석들. 패셔너블하다는 수식을 거머쥐기 위해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시절을 어떻게 잊을까. 하지만 포근하고 안락한 유행이 우리를 감싸는 올겨울, 어느 때보다 중요한 패션 키워드는 ‘Cozy’다. 늘 변화무쌍한 마크 제이콥스부터 차디찬 미니멀리즘의 캘빈 클라인, 테일러링을 목숨처럼 여기던 더 로우 등이 무쇠 스터드와 투박한 가죽 대신 폭신한 니트를 골랐다. 또 당대 패션 아이콘 리한나조차 몸을 조이는 드레스 대신 셀린 스웨터와 니트 팬츠 차림으로 거리에 나섰다.

편안함이 최우선인 패션 시대에 ‘코지 스타일’을 자신의 디자인 철학으로 밀어붙이는 디자이너들이 등장했다. 6년 전 LA 웨스트 할리우드에 ‘Creatures of Comfort’라는 매장을 연 제이드 라이(Jade Lai, 홍콩 지오다노 창립자의 딸)가 시작이었다. ‘편안함의 산물’이란 이름대로 매장에는 방금 손뜨개질을 끝낸 듯한 니트 카디건과 직접 수직기를 움직여 만든 우븐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그러자마자 LA 멋쟁이들이 하늘하늘한 리넨 원피스를 입기 위해 이곳에 모여들었다. 덕분에 그녀는 뉴욕에도 2호점을 냈고, 컬렉션을 디자인해 뉴욕 패션 위크에 참가하는 디자이너로 성장했다. “때론 프레피, 히피, 집시 느낌을 낼 때도 있어요. 하지만 늘 편안함이 먼저예요.” 온화한 패션을 추구하는 그녀가 자신의 디자인 철학을 들려줬다.

이런 경향은 미국 힙스터들을 사이에 재빨리 퍼져 나갔다. 늘 그렇듯 맨 먼저 이 흐름을 눈치챈 건 새로운 편집 매장들. 제프리나 바니스만큼 중요 패션 스폿으로 떠오른 브루클린의 ‘Mociun’과 ‘The Primary Essentials’, 웨스트 빌리지의 ‘Personnel of New York,’ 그리고 LA의 ‘General Store’ 등이 현지 디자이너의 수공예 제품을 존중하고, 일상적인 디자인을 선호하게 된 것. 변화의 바람은 하이패션의 수도까지 불어닥쳤다. 꼴레뜨와 레클레어 등 하이패션의 전당 대신 ‘Broken Arms’와 ‘Centre Commercial’처럼 크리처스 오브 컴포트와 교집합이 많은 매장들이 오히려 ‘힙’하고 ‘쿨’하게 인식됐다.





CFDA/Vogue 패션 펀드의 올해 준우승자 역시 이런 경향에 합류한 디자이너였다. 6년 전 브루클린을 떠나 뉴욕의 시골 마을로 이사한 라이언 로시(Ryan Roche)는 농장 창고에서 따뜻한 느낌의 니트를 제작했다. 네팔에서 온 캐시미어로 케이프를 만드는가 하면, 미국 시골 장인들이 만든 클래식한 모자 등을 선보인다(한국으로 치면 강원도 산골에서 탄생한 패션이 청담동 멋쟁이들을 사로잡은 셈). “반드시 브로드웨이 거리에서만 멋지고 현대적인 것들을 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2년 전 패션 펀드 대상을 차지했던 디자이너, 엘더 스테이츠먼(Elder Statesman), 서퍼들을 위한 스타일을 고집하는 바하 이스트(Baja East)도 로시와 같은 감성을 공유한다.

글로벌 트렌드의 실시간 반영 속도가 LTE급인 서울에서도 변화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 5년째 동화적이고 포근한 니트를 선보이는 ‘미수 아 바흐르(Misu a Barbe)’의 디자이너 김미수가 대표적인 예다. 파리에서 베르나르 윌헴의 니트 디자이너로 일한 그녀는 자신만의 패션 철학이 분명하다. “세상에는 수없이 다양한 니트 브랜드가 있습니다. 니트라는 경계 안에서 더 따뜻하고, 더 특별한 것을 찾는 고객에게 제 디자인이 답이 될거라 믿어요.” 바위 모양을 새긴 색색의 카디건, 세 가지 소재로 하나의 셔츠를 만드는 방식은 좀더 다양하게 발전 중이다. 11월 초에는 이전 컬렉션에서 남은 소재와 실로 돌을 감싼 오브제를 만들어 전시를 열었고, 12월에는 과천 마이 알레에서 팝업 스토어도 연다. “니트가 지닌 특유의 따스함을 다채롭게 보여주고 싶어요.” 내년에는 한남동 ‘구슬모아 당구장’에서 전시도 기획 중이다.

파리에서 아트 디자인을 공부한 이정은의 브랜드 ‘코흔(Cohn)’도 이런 경향 안에 아우를 만한 라벨이다. 텍스타일 디자인을 기본으로 패션과 라이프스타일을 동시에 선보이는 그녀는 손수 작업한 그림을 니트와 우븐에 적용해 새로운 소재를 만든다. 두 번째 컬렉션이었던 올가을 시즌에는 울 소재에 실크 스크린 작업을 거쳐 부드러운 이미지의 외투와 톱, 스커트 등을 선보였다. “오랫동안 텍스타일 브랜드를 준비해왔어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 디자인을 알리고 싶어 패션 아이템을 선보이게 됐죠.” 그녀의 웹사이트(cohn.kr)에는 독특한 감성을 소유하고 싶은 팬들로 붐빈다. “고유 패턴을 계절에 따라 다른 소재로 선보일 예정입니다.”

서울은 물론 해외 젊은 디자이너들의 시도와 경향은 당분간 지속될 것 같다. 유명 디자이너들의 내년 봄 컬렉션까지 포근한 바람이 이어질 테니 말이다. 셀린의 피비 파일로와 로에베의 조나단 앤더슨은 투박한 니트의 밑단을 뜯어 거친 듯 자연스러운 멋을 표현했고, 더 로우의 올슨 디자이너는 풍성하고 편안한 실루엣을 바탕으로 투박한 ‘코지’ 스타일을 두 시즌째 이어 나갔다. 스텔라 매카트니의 니트도 따뜻함이 느껴졌다. 칼로 자른 듯 날렵한 재단의 수트와 입체재단으로 탄생한 꿈 같은 드레스만이 패션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패션 메이저리거들이 증명하는 중. 덕분에 일상적이고 편안한 패션 안에서 폼 나는 휴식을 즐길 수 있으니, 이보다 더 멋진 유행이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