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겨울엔 터틀넥 스웨터

거울 앞에 서서 ‘코트 속에 뭐 입지?’라고 고민하고 있다면 터틀넥 스웨터가 가장 혁신적인 선택이 될 것이다. 패션에 무지한 여자들의 옷으로 여겨지던 터틀넥 스웨터가 재기 넘치는 아가씨들에 의해 비범하게 평범한 옷으로 거듭나고 있다.

아침 9시 스타벅스. 내가 앉은 자리에서 5m쯤 떨어진 테이블 앞에 잘 숙성된 포도주 같은 자주색 울 코트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잘 빠진 70년대풍 와인색 코트 뒷모습에 매료된 나는 그녀가 몸을 돌려 앞을 보여주는 순간 살짝 김샜다. 코트 안의 크림색 라운드 네크라인 실크 블라우스와 흰 구슬이 꽈리처럼 엮인 큼직한 목걸이 때문이었다(두 달 전 상하이에서 나는 그것이 샤넬이든 에르메스든 모든 옷에 여러 ‘볼드한 네크리스’를 건 여자와 2박 3일을 보내는 동안 역설적으로 최근 패션이 목선과 그 언저리를 얼마나 단순화시키는지 깨달았다). 블라우스 아래로 무릎 길이 H라인 스커트, 손에는 찬바람을 막을 머플러가 들려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저 아가씨가 오늘 아침에 블라우스와 스카프와 목걸이를 갖추는 복잡한 과정 대신 얇은 검정 터틀넥 스웨터 하나를 선택했다면 어땠을지 생각했다. 코트에 터틀넥은 너무 식상하지 않느냐고? 그 아래로 통이 넓은 테일러드 팬츠와 스탠 스미스 같은 운동화를 신었다고 하면 대략 감이 오는지? <뉴욕 타임스>는 올가을 가장 효율성 높은 옷차림으로 터틀넥 스웨터와 헐렁한 바지의 조합을 꼽은 적 있다.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루이 비통 캣워크에 터틀넥을 입은 모델들을 줄줄이 내보냈을 때 우리는 잠시 그 평범함에 어리둥절했지만, 그건 올겨울 코트 안에 입을 옷으로 우리가 어떤 현실적 선택을 하게 될지에 대한 프롤로그였다.

유행의 시작이자 현재인 길 위에는 터틀넥 스웨터를 이용한 쿨한 스타일링들이 반짝인다. 패션 도시의 멋쟁이들은 터틀넥 스웨터에 고급 프린트의 실크 팬츠나 스커트로 한껏 차려입고(이브닝웨어로도 손색없을 정도!), 수주 같은 모델들은 허리를 드러내는 짧은 터틀넥 스웨터와 청바지로 터틀넥이 이렇게 젊고 산뜻한 옷이었나 놀라게 한다. 예민한 감수성의 아가씨들은 크고 두툼한 터틀넥 스웨터 속으로 숨어버렸고, 경험 많은 멋쟁이들은 터틀넥 스웨터와 니트 나팔바지를 세트로 입는 70년대 스타일을 완벽하게 소화한다. 캣워크에서는 터틀넥 스웨터가 드레스 업(드리스 반 노튼)도 되었다가 다운(샤넬. 아, 정말 비싼 드레스 다운)도 되었다가, 동시대적이었다가(발렌시아가, 루이비통), 예술적이었다가(셀린, 프라다), 고요했다가(더 로우), 재기발랄했다가(피터 필로토) 아주 난리법석도 아니다. 그러니까 한번도 뜨거웠던 적은 없지만 인연이 끊긴 적도 없는 동네 이성 친구 같은 터틀넥 스웨터가 이토록 엄청난 신호를 보내는 중이다.

그저 그렇던 애가 어쩌다 인기라는 걸 얻게 되었을까? 멋 부리기 싫어진 멋쟁이들의 변덕, 기름진 소재 대신 사랑받게 된 비건 입맛의 니트, 단순한 실루엣이 강조되던 60년대, 플로피 햇이 가져온 70년대 향수(비바걸들이 벨보텀 팬츠에 몸에 딱 맞는 터틀넥 스웨터를 입고 챙이 넓은 모자를 썼다), 목걸이에서 모자와 귀고리로 옮겨 간 장신구의 행보 등이 모두 뒤섞인 결과일 수 있다. 아니면 그저 왜 터틀넥이냐는 질문에 알투자라가 말했듯 ‘뭔가가 한동안 사라져버리면 그걸 다시 작업하고 싶어지고, 다시 매력적으로 만들고 싶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터틀넥 스웨터는 억울한 누명과 괜찮은 상징을 동전의 양면처럼 품고 있는데, 누명은 패션에 대해 무지한 여자들의 옷이고, 상징은 지식인의 옷이라는 것이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주인공이 촌스럽게 입고 있던 것도 두툼한 터틀넥 스웨터였다. 또 1957년 영화 <퍼니 페이스>에서 패션 잡지는 허구라고 외치는 아마추어 철학자가 디올의 뉴룩으로 빼입은 패션 잡지 숙녀들 틈에서 입은 것도 검정 터틀넥 스웨터였다(물론 그녀가 파리의 카페에서 터틀넥 스웨터와 시가렛 팬츠, 플랫 슈즈를 신고 춤추는 장면은 가장 아름다운 터틀넥 신으로 꼽을 만하지만). 몇 년 전 CFDA 시상식에 터틀넥 스웨터를 입고 등장했던(최근에는 한국 유명 인사들도 터틀넥 스웨터를 입고 레드 카펫을 밟지만, 당시만 해도 그녀의 옷차림은 신선했다) 디자이너 레이첼 로이는 자신을 ‘터틀넥을 믿는자’라고 소개하며 “스킨 대신 브레인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60년대 후반 피에르 가르뎅과 이브 생 로랑이 셔츠와 타이 대신 터틀넥 스웨터를 입는 남자 수트 차림을 선보인 후 격식을 싫어한 신사들이 이렇게 입기 시작했고, 터틀넥은 ‘새로운 시대의 지식인’이 입는 옷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화이트 터틀넥 스웨터는 미셸 푸코의 시그니처였고, 우디 앨런의 뮤즈 다이앤 키튼도 터틀넥 스웨터를 즐겨 입었다. 수잔 손탁이 터틀넥 스웨터를 입고 허공을 응시하고 누워 있는 모습을 담은 애니 레보비츠의 사진은 말할 수 없이 담백하고도 아름다운 터틀넥의 순간이다.

터틀넥 스웨터의 촌스러운 평범함 대신 비범한 정신세계 쪽으로 아무리 마음이 기울었다 해도 터틀넥의 능력이 의심스러울 수 있다. ‘이걸로 정말 멋질 수 있을까?’라는 의문 말이다. 유쾌한 패피들이 전하는 몇 가지 메시지는 확실히 도움이 된다. 단순한 디자인의 터틀넥 스웨터에 고급스럽고 여성스러운 소재나 아이템을 매치할 것, 와이드 팬츠나 벨보텀 팬츠와 입어 볼 것, 스웨터를 하의 속에 넣어 입을 것(허리 사이즈 때문에 다 넣을 수 없다면 앞부분 만이라도), 오버사이즈로 입을 거면 확실히 크고 길게(특히 소매 길이!), 그게 아니라면 자신에게 꼭 맞는 사이즈로 입을 것(흔히 큰 스웨터가 체형의 단점을 보완할 거라 생각하지만 말 그대로 좀더 커 보이게 만들 뿐), 머리는 되도록 연습 중인 발레리나처럼 올려 묶을 것, 목을 반으로 접지 말고 턱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주름지게 내버려둘 것, 목이 짧아 터틀넥이 꽃받침처럼 보일지 걱정이라면 좀 짧은 모크 터틀넥(mock turtleneck)을 고를 것 등등. 그래도 좀더 존재감 강한 터틀넥을 원한다면 터틀넥 자체가 화려한 프린트로 무장돼 있거나 최근 멋쟁이들에게 인기 있는 모피 장식 스웨터가 만족감을 줄 것이다. 몇몇 디자이너들이 정성을 다해 만든 남다른 디테일의 터틀넥 스웨터도 손쉬운 스타일링에 도움이 된다. 가장 매력적인 건 뒤트임 터틀넥! 셀린 터틀넥 스웨터는 뒷목 부분에 지퍼를 달아 살짝 내릴 수 있는데, 그 덕에 앞에서 봤을 때 형태가 근사하게 잡히고 무엇보다도 게이샤 기모노의 스웨터 버전처럼 꽤 섹시하다.

하지만 아무리 터틀넥의 이론과 실제를 마스터했다 한들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면 죄다 헛수고다. 터틀넥은 몸의 라인에 관한 옷이라는 것!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가슴을 펴고(우리나라 여성들 대부분이 가슴을 반듯하게 펴는 것에 사춘기 소녀 같은 수줍음을 갖고 있다), 어깨가 등과 평행하도록 시원하게 젖혀주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터틀넥 스웨터의 아름다움이 살아난다. 터틀넥 스웨터에 관한 이미지들을 모으던 중 나는 대세와 상관없이 그냥 확 마음이 가는 레퍼런스를 발견했다. 영화 <러브 스토리>의 알리 맥그로우.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는 이미지 아니냐고 시큰둥할 수도 있다. 하지만 70년대풍의 긴 앞가르마 머리에 터틀넥 스웨터를 입고, 칼라가 높은 코트의 허리를 잘록하게 묶는 순간만 생각하면, 어서 빨리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