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

겨울 해장국

2016.03.17

by VOGUE

    겨울 해장국

    성큼 겨울이 왔고, 좋든 싫든 송년과 신년이 부대끼는 술자리가 이어진다.
    술 한 잔에 한 해를 담아 떠나보냈다면,
    뜨끈한 해장국 한 그릇으로 그 아쉬운 마음을 달래보는 건 어떨까.
    살다 보면 해장국이 먹고 싶어 술 한 잔이 간절해지는 밤도 있을 것이다.

    며칠 전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기나긴 인터뷰 화보 촬영을 마치고, 밤 10시경 지친 몸을 이끌고 동료들과 찾은 곳은 청담동 ‘새벽집’이었다. 전라도 화순과 함평에서 공수해오는 특급 암소로 유명한 한우 전문점(연매출 100억원이 넘는다는!)인데 여기서 값나가는 영양 보충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95년 문을 열었을 때 새벽집은 원래 콩나물국밥과 따로국밥만 팔던 작은 식당이었다. 우리가 선택한 메뉴 역시 7,000원짜리 선지해장국! 숟가락만 들어도 1만원이 넘는다는 청담동에서 이 가격이면 흐뭇한 한 끼 식사 아닐까. 365일 24시간 영업하는 이 가게는 밤늦은 시각에도 빈자리가 드물었다. 갑자기 기온이 떨어진 밤, 콩나물무침과 물김치, 그리고 양파장아찌 같은 평범 무쌍한 반찬이 식탁 위에 놓였을 때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글보글 끓는 선지해장국이 다분히 피로한 몸과 마음까지 녹여주는 듯했다. 새벽집의 선지해장국은 깊은 국물 맛이 일품인데, 신선한 선지를 사용하는 것이 맛의 비결이라고 한다. 이 집은 구제역이 몰아치던 때도 전혀 피해가 없었을 정도로 육질 좋은 쇠고기를 취급하는 걸로 유명하다. 결국 선지를 절대로 먹지 않는다던 여자 동료마저 선지해장국의 맛에 제대로 반해버린 밤이었다.

    ‘무교동북어국집’ 역시 굳이 술기운을 빌리지 않더라도 찾고 싶어지는 해장국집이다. 아침 7시부터 문을 여는 이곳 메뉴는 북엇국 단 하나(7,000원!). 하지만 날이 추워져도 긴 대기 시간을 감내하며 많은 사람이 찾는 맛집이다. 손님이 가장 적다는 월요일은 500명, 많다는 주말에는 1,000명이 넘는다. 무교동북어국집의 맛은 잘 끓인 국산 사골 육수에서 좌우되는데, 선정적인 조미료 맛은 찾으려야 찾을 수 없다. 밥을 말아 다소 싱거워진다면 새우젓으로 맛을 낸다. 두툼한 북어 건더기와 두부, 달걀, 파 정도가 어우러진 깔끔한 북엇국 한 그릇은 시원한 물김치와 곁들여 한 술 떴을 때 더 각별하다. 호로록호로록 북엇국을 남김없이 들이켜다 보면 식당 안 곳곳에서 국물은 물론 두부와 북어 건더기까지 각각 추가 주문하는 손님들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무료로 퍼주는 이 가게의 인심은 수많은 샐러리맨들이 살 에는 추위에도 무교동 로터리에 줄을 서게 만드는 힘일 것이다.

    진한 국물 맛이 끝내준다며 셰프 레이먼 킴이 추천한 해장국은 가락시장에 있는 ‘함경도 찹쌀순대’의 순댓국밥이다. 입맛 까다로운 셰프가 인정할 만큼 정갈하면서도 신선한 순대가 인상적인데, 뚝배기 안에서 윤기 도는 순대와 진한 육수가 그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 순대 말고도 각종 고기가 씹는 맛을 더한다. 24시간 운영하는데도 손님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쓸쓸히 “술이 맛있다”던 <미생>의 오상식 과장(이성민)처럼 술로 시달린 이들의 속을 단단히 풀어줄 푸짐한 영양식이다.

    37년 문을 연 이래 ‘청진동 해장국 스타일’이란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청진옥’은 속을 달래러 갔다가 되레 한 잔 더하게 만드는 해장국집이다. 된장 국물로 구수하게 맛을 낸 해장국도 일품이지만 수육, 빈대떡, 동그랑땡 등 안주류가 푸짐하기 때문이다. 선지와 내포, 우거지, 콩나물 등이 넉넉하게 들어간 해장국의 국물은 묵직해서 잊기 힘들다. 피맛골이 옛 정취를 잃어버린 뒤에도 여전히 종로 빌딩 숲 한쪽에 자리 잡고 있어 새삼 정겨운 기분을 주는 가게이기도 하다.

    오장동 ‘오장숯불갈비’의 갈비탕 역시 75년부터 40년 가까이 애주가들 사이에서 사랑받아온 해장국이다. 여느 갈비탕과 달리 편육과 고기완자가 들어가는데, 국산 갈비의 식감이 남다르다. 은근히 진하면서도 고소한 국물 맛은 계산을 마치고 식당을 나와서도 입맛을 다시게 만든다. 고추기름으로 맛을 내는 양평 해장국 스타일의 자극적인 맛이 싫다면 갈비탕이 격이 다른 해장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둔탁하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온기가 느껴지는 식당 안, 구수한 음식 냄새를 폴폴 흩뿌리며 종업원 아주머니가 내려놓는 뜨끈한 밥 한 공기, 그리고 국물한 그릇. 사실 해장국집이 갖춰야 할 미덕이라면 이것으로 충분하다. 한 해를 정리하며 속을 푸는 데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한 식당 인테리어와 영양소와 칼로리 계산한 식품 영양표 따위는 필요 없을 것이다. 트렌드와 상관없이 분위기가 소탈할수록, 영양 성분, 혹은 칼로리와 무관하게 변치 않는 손맛이 묻어날수록, 우리가 해장국 한 그릇으로 달래게 될 빈속은 더 든든해질 테니 말이다.

    에디터
    글 / 정명효(자유기고가), 피처 에디터 / 정재혁(JUNG, JAE HYUK)
    포토그래퍼
    HWANG IN WOO
    푸드 스타일리스트
    김가영(101 reci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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