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라카지>의 기묘한 에너지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삶 속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간
뮤지컬 <라카지>의 정성화와 고영빈, 김다현, 그리고 이지훈이 만들어내는 기묘한 에너지.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들은 그저 배우라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홀려 있다.

(왼쪽부터)김다현의 벨벳 소재 팬츠 수트와 니트 톱은 구찌(Gucci), 자카드 랩 스커트는 장광효 카루소(Chang Kwang Hyo Caruso), 송치 앵클 부츠는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진주 목걸이는 샤넬(Chanel). 정성화의 러플 블라우스는 진태옥(Jintéok), 블랙 팬츠는 이상봉(Lie Sang Bong), 카멜리아와 달 브로치는 샤넬, 블랙 로퍼는 구찌. 이지훈의 실이 풀린 듯한 타조털 재킷과 랩 스커트는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 화이트 셔츠는 바톤 권오수(Baton Kwon Oh Soo), 블랙 팬츠는 캘빈 클라인(Calvin Klein), 앵클 부츠는 프라다(Prada). 

돌이켜보건대 2년 전, 뮤지컬 <라카지>의 흥행은 좀 특별한 것이었다. 눈과 귀는 물론 영혼까지 현혹하는 화려한 춤과 노래, 엄청난 스케일의 물량 공세로 정신을 쏙 빼놓는 일군의 쇼 뮤지컬 가운데서 용감하게도 ‘뜨거운 가족애’를 다룬다는 이 라이선스 초연작이 빛을 발할 수 있을까? 전 세계 히트 뮤지컬을 일찌감치 섭렵한 한국 관객들은 이제 웬만한 쇼에는 눈썹도 까딱하지 않건만. 게다가 다름 아닌 중년 게이 커플의 가정사라니! 83년 브로드웨이에서 올려진 이후, 유일하게 토니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이 작품이 이제야 국내에 상륙한 것도 그다지 환영받지 못할 그 스토리 탓이었을 터다. 그러나 드라마의 힘은 국경과 문화는 물론이고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마저 가뿐하게 넘어설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관객들은 아들을 결혼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게이 커플의 이야기에 눈물 콧물을 다 쏟다가 마침내 기립 박수로 화답했고, 한국 뮤지컬대상에서는 베스트외국뮤지컬상과 남우조연상 등 4개 부문을 휩쓸었다. 올겨울, <라카지>가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뮤지컬 마니아들이 달뜬 환호를 보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꼭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니!

클럽 ‘라카지오폴’의 전설적인 여가수 ‘자자(앨빈)’ 역할을 맡은 세 명의 배우가 모두 모인 스튜디오에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보디라인을 드러내는 새틴 드레스를 입고 요염하게 걸으며, 걸출한 입담으로 관객을 흔들어놓던 그녀(!)들은 지금 머리에 흰 가루를 잔뜩 뒤집어쓴 채 창백한 얼굴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불가해한 존재, 아니 어쩌면 남자와 여자의 중간 어디쯤엔가 존재하는 듯 신비로운 모습을 한 그들에게서 묘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남자의 몸에 여자의 감정을 입혀야 하는 이들은 지금 어떤 상상을 하고 있을까?



이지훈의 큼직한 페이크 모피 코트는 푸시버튼(Pushbutton), 슬리브리스 니트 톱과 스카프는 프라다(Prada), 말 장식 브로치는 듀엘(Dewl), 체크 울 팬츠와 뱀피 패턴 로퍼는 김서룡(Kimseoryong), 투명한 다각형 체인 백은 샤넬(Chanel).

아슬아슬한 침묵을 깬 것은 가장 어린 앨빈, 이지훈의 너스레였다. “아우, 요즘은 새벽 6시부터 사전 녹화를 하더라고요. 목도 안 풀렸는데 노래를 부르려니 얼마나 힘들던지요. 나이가 들어 그런지 이젠 정말 힘이 들어요.” 10년여 동안 우정을 이어온 강타, 신혜성과 함께 결성한 프로젝트 그룹 ‘S’로 11년 만에 신곡을 발표한 그는 뮤지컬 연습과 가수 활동을 병행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올해로 데뷔 18년 차를 맞은 그에게는 감당하기 힘들 것 같은 스트레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절묘한 균형 감각이 있다. 사춘기를 겪기도 전에 이미 아이돌 가수로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던 그는 웃자란 만큼 일찍 성숙했고, 그만큼 무대에 대한 진짜 사랑도 일찌감치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서툴렀어요. 최고인 줄 알고 자만하던 시절도 있었고요. 내가 가진 얼마 안 되는 능력을 다 소비하면서 좋은 시절을 다 보냈지요. 그러다 언젠가부터 찬찬히 배우고 노력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연기하는 가수’가 아직 흔치 않던 시절 TV 드라마에 도전한 데 이어, 호기롭게 뮤지컬 신에 뛰어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물론 도마 위의 생선이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데뷔작이었던 <알타보이즈> 때는 남들보다 한 박자씩 느린 춤 때문에 친구들에게도 타박을 받았지요. 발라드 가수로 살아가면서 언제 춤을 춰봤겠어요. 하지만 무대 위의 행복, 뮤지컬의 감동을 알아버렸기에 포기할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든 이곳에 남고 싶었어요.” 혹평에 시달린 데뷔작 이후 <햄릿>, <젊음의 행진>, <잭 더 리퍼>, <에비타>, <엘리자벳>, <위키드> 등의 작품을 차근차근 거치는 동안 이지훈은 뮤지컬계의 새로운 스타로 단단하게 안착했다.

 

그리고 드디어 잘해내고 싶어서 잠도 못 이루는 작품 <라카지>를 만났다. 하긴, 초연 때 이미 엄청난 호평을 받은 두 명의 앨빈, 정성화와 김다현과 함께 트리플 캐스팅되었으니 그 부담감만으로도 잠이 올 리 만무하다! “첫 연습 이후 담배를 끊었어요. 앨빈은 에너지가 엄청나게 많이 필요한 역이에요. 장면마다 확확 달라지는 감정 변화를 얼마나 드라마틱하게 표현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지요. 하루하루가 피 말리는 도전이에요.” 부모가 되기는커녕 남편도 되기 전인 이 꽃미남이 인생의 굴곡을 겪은 ‘게이 엄마’를 연기하는 모습을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드라마틱한 퍼를 걸치고 카메라 앞에 선 그는 모두의 걱정을 날려주겠다는 듯 촬영 분위기를 압도했다. 민망할 정도로 작은 백을 들려주자 어깨에 걸쳐보기도 하고, 손으로 가볍게 움켜쥐기도 하던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뒤로 젖히더니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온몸에 힘을 빼고 말했다. “손가락에 좀더 감정을 넣어야 할까요?” 이런, 이지훈이 연기하는 자자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김다현의 밀리터리 재킷과 검정 팬츠는 장광효 카루소(Chang Kwang Hyo Caruso), 레이스 페티코트는 진태옥(Jintéok), 남색 실크 스카프와 버클 부츠는 프라다(Prada), 달 브로치는 샤넬(Chanel). 고영빈의 도트 프린트 셔츠는 바톤 권오수(Baton Kwon Oh Soo), 강렬한 호피 프린트 팬츠 수트는 로드앤테일러(Lord&Tailor), 벨벳 로퍼는 암위(Am.We).

김다현의 복슬복슬한 몽골리안 양털 코트는 샤넬(Chanel).

한쪽에서는 앙상한 모습으로 돌아온 김다현이 숨을 고르고 있다. 여름내 <프리실라>를 통해 삶을 관조하는 중년의 트랜스젠더 연기를 소화해낸 그는 그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창작 뮤지컬 <보이첵> 무대에 소환되었고, 그 음습하고 처절한 역할에 몰입하는 동안 온몸의 물기가 모두 빠져나간 듯 말라버렸다. 몇 달 전, 그로테스크한 메이크업을 하고 <보그>의 카메라 앞에서 모두를 매혹시킨 그 기묘한 에너지를 다시 재현할 수 있을까? 모두의 기대만큼이나 잔뜩 부풀어 오른 블랙 스커트를 입고 우아하게 걸어 들어온 그는 무엇을 원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시선을 옮기며 몸을 움직이자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2년 전, <라카지>의 관객들이 그랬던 것처럼!

김다현의 앨빈은 그야말로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다웠다. <헤드윅>과 <M.버터플라이>, <프리실라> 등을 통해 여장 캐릭터 전문 배우라는 찬사를 받아왔지만 앨빈을 연기하는 그는 질투가 날 정도로 예뻤다. 반짝이는 드레스 아래로 완벽한 커브를 만드는 몸매를 드러내며 여성 관객들을 기함하게 만들더니, 화장하는 여자에게 빙의된 듯 새침한 표정으로 ‘마스카라’를 부를 때는 묘한 동질감도 안겨주었다. 보통의 여자들이 그러하듯 적당한 욕을 양념 삼아 농을 칠 때는 당장이라도 마주 앉아 수다를 떨어야 될 것 같은 아우라마저 풍겼다. “예쁜 앨빈이라는 칭찬도 감사하지만 이번에는 좀더 깊은 연기를 하고 싶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를 좀더 깊이 이해하게 되거든요. 첫 대사 ‛식사하세요, 조지’에 담긴 디테일한 감정을 이젠 알 것 같아요. 앨빈은 남편에게 좀더 사랑받고 싶은 부인이고, 자식을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하는 엄마이자 자신의 생을 뜨겁게 사랑하는 여자예요. 너무나 사랑스러운 여자지요. 어느 것 하나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그녀의 삶을 아플 만큼 정확하게 표현해내고 싶어요. 그러려면 흉내가 아니라 진짜 여자가 되어야죠.” 정말, 그는 조금씩 더 여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며칠 뒤 TV에 등장해 “간편하고 아프지도 않은 종아리 제모 방법을 알고 싶으시거든 연락하세요”라고 말하는 그를 볼 때는 살짝 의심쩍기도 했다. 얼마 전 얻은 둘째 때문에 더없이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아들 바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성화의 화이트 셔츠와 검정 팬츠는 이상봉(Lie Sang Bong), 큼직한 러플 케이프와 카멜리아 브로치는 샤넬(Chanel). 김다현의 화이트 셔츠는 바톤 권오수(Baton Kwon Oh Soo), 핀스트라이프 팬츠는 푸시버튼(Pushbutton), 깃털 스누드는 브루넬로 쿠치넬리(Brunello Cucinelli).

정성화의 지퍼 디테일 검정 톱은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울 팬츠는 이상봉(Lie Sang Bong), 도트 패턴 튤 소재 블루종은 진태옥(Jintéok), 여우털 재킷은 보브(Vov), 앵클 부츠는 구찌(Gucci).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남자들이 카메라를 희롱하는 동안, 마지막 앨빈 정성화는 한쪽에서 곤혹을 치르고 있었다. 지난 11년 동안 뮤지컬 무대에서 보여준 거칠 것 없는 도전과 파격 행보에도 불구하고 오늘 아침, 그는 곧 머리에 뒤집어쓰게 될 흰 가루 앞에서 꽤 오래 망설였다. “아, 이래서 삶은 배움의 연속이에요. 촬영할 때마다 배우고 또 배웁니다. 진짜 배우가 되려면 제 안의 틀을 깨야 하는데 실은 그러지 못하는 편이에요. 처음 해보는 헤어가 영 어색해서 좀 걱정됐거든요. 해보니까 재미있네요. 또 하나의 산을 넘은 것 같아요.” 멋쩍게 웃는 그에게서 지난 시간의 흔적이 보였다면 과장일까. 화려한 외모와 준비된 팬덤 대신 타고난 재능과 피나는 노력으로 스스로 성장해 마침내 주연을 따내기까지 매 순간, 이토록 깊게 고민하고 놀랍도록 몰입했을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정성화의 활약은 그야말로 뮤지컬계의 역사였다. 콧대 높은 뮤지컬 팬들에게 그는 더 이상 ‘연기도 좀 하고 노래도 곧잘 하는 개그맨’이 아니다. 이제는 정성화의 브랜드가 되어버린 <영웅>을 비롯해 <스팸어랏>, <레미제라블>, <맨 오브 라만차> 등을 거치는 동안 그는 평단과 대중을 두루 사로잡은 뮤지컬계의 별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어쩌면 지긋지긋했을지도 모를 ‘희극배우 출신’이라는 꼬리표에서 자유로워진 것일까? 2년 전,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라카지>를 선택했고 그야말로 맞춤인 듯 완벽하게 앨빈 역을 소화해냈다. “혹시 아시나요? 개그맨은 사람들을 울리고 싶어 합니다. 나의 웃음으로 마침내 눈물을 줄 수 있는 날을 꿈꾸지요. 라카지가 바로 그런 작품이에요. 아주 오래 전부터 앨빈 같은 역할을 갈망해왔어요.” 정말, 정성화의 앨빈은 좀 다른 의미로 아름다웠다. 그야말로 배꼽 빠지게 웃기다가 마침내 눈물이 터지게 만들어버리는 그의 페이소스 짙은 연기는 정성화 이외의 앨빈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반짝이는 드레스 밑으로 살짝 나온 아랫배를 감춘 그가 검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흐느끼듯 부르는 ‘나는 나일 뿐’을 들으면, 앨빈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아름다운 영혼을 그저 한번 세게 끌어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왼쪽 모델의 양털이 트리밍된 롱 코트는 프라다(Prada), 반짝거리는 블랙 수트와 옵티컬 프린트 셔츠는 바톤 권오수(Baton Kwon Oh Soo), 벨벳 로퍼는 암위(Am.We), 핑크 스카프는 까르띠에(Cartier), 실버 반지는 생로랑(Saint Laurent). 오른쪽 모델의 러플 셔츠와 모직 팬츠는 바톤 권오수, 플리츠 스커트는 장광효 카루소(Chang Kwang Hyo Caruso), 어깨에 걸친 형광색 모피 재킷은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 카멜리아 브로치는 샤넬(Chanel), 로퍼는 암위. 

드디어 시간이 됐다! 숨소리에서마저 진정성이 느껴지는 노련한 앨빈과 숨 막히도록 고혹적인 앨빈, 그리고 거침없는 감정 표현으로 신선한 자극을 주는 어린 앨빈까지 세 남자, 아니 세 명의 여자가 나란히 섰다. 겨우내 각기 다른 전략으로 피 말리는 경쟁을 해야 하는 세 명의 배우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스파크가 공간을 가득 채웠지만 모든 것은 여전히 평온한 듯 보인다.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와 몸뚱이만으로 커다란 무대를 감당하는 법을 아는 그들은 긴장을 드러내지 않는 법도 알고 있다. 이들이 벌이는 우아한 소란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는 사람은 그들의 남편 조지 역을 맡은 고영빈이다. 지난 봄 <바람의 나라>의 무휼이 되어 멋진 근육을 뽐냈다가 여름엔 <프리실라>에서 망사 스타킹을 신고 아름다운 보디라인을 선보인 그는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멋이 뚝뚝 흘러 내리는 멋쟁이 게이, 조지 역을 소화하기 위해 완벽하게 균형 잡힌 몸을 만들어 나타났다. 초연 때 김다현과 함께 짝을 이룬 그는 ‘비주얼 커플’로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스물 일곱에 뮤지컬 무대로 왔으니 꽤 오랜 시간이 흘렀네요. 저는 연기나 노래를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 현장에서 몸으로 배우고 호되게 욕먹으면서 역할을 따냈습니다. 현장에서 자란 셈이지요. 그래서였는지 늘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허했고 뭔가 채우고 싶었어요.” 마침내 주연을 따내며 빛을 발하던 순간에 일본으로 떠나 단역부터 다시 시작한 것도, 다시 돌아왔다가 홀연히 뉴욕으로 떠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꽤나 열성적인 것으로 유명한 그의 오랜 팬들은 좀더 자주 그의 무대를 볼 수 있기를 바라왔지만 이 자유로운 배우는 누구보다 치열한 방식으로 스스로의 삶을 뜨겁게 사랑해왔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고 돌아올 수도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이 좋아요. 나 이외에는 책임져야 할 사람도, 나에게 부담을 주는 사람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조지는 가족을 위해 자신의 아픔을 다 내려놓고 살아가는 인물이에요. 감당하기 힘든 충격과 슬픔조차도 농담과 위트로 넘겨버리고, 힘든 일일수록 농담으로 넘겨버리는 속 깊은 사람이지요.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내고 싶어요. 어쩌면 내 외로움과 고독이 도움이 되겠지요. 좀 슬프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럴 수 있어서 행복하네요.” 아, 뼛속까지 배우인 이 남자야말로 ‘뮤지컬 배우의 정석’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하루 종일 클럽 ‘라카지오폴’을 밝히던 조명이 꺼지고, 세 명의 앨빈과 한 명의 조지가 떠나간 자리에는 다시 침묵만 남았다. 매일 밤, 무대를 끝나고 난 뒤 한꺼번에 밀려들 헛헛함과 공허를 그들은 어떻게 견디는 것일까? 있는 힘을 다해 걸어 들어갔던 타인의 삶 속에서 되돌아 나오는 방법이란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배우라는 가혹한 운명을 기꺼이 짊어진 이 아름다운 영혼들을 위해, 오늘만큼은 뜨거운 박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