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넬로 쿠치넬리와의 대화

공통점이라고는 없을 듯한 패션과 철학 사이에서 완벽하게 균형을 찾은 디자이너가 있다.
캐시미어 패션 철학자로 지칭해도 될 만한 브루넬로 쿠치넬리와의 대화.



서울의 ‘몬테 나폴레오네’ 청담동의 늦가을 오후. 어디선가 유럽 시골 정원의 싱그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특급 캐시미어로 이름난 브루넬로 쿠치넬리의 서울 매장 오픈을 기념, 브랜드 창립자이자 디자이너인 브루넬로 쿠치넬리(Brunello Cucinelli)가 서울에 들렀다. 이를 위해 브랜드 본사가 있는 솔로메오 풍경과 그곳의 소박하고 떠들썩한 축제를 매장 앞에 재현한 것. 이곳에 들어서자 말쑥한 정장 차림의 쿠치넬리가 파티의 주인답게 환하게 미소를 보냈다. 파티 호스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우리는 커다란 통창을 통해 볕이 드는 공간으로 이동했다. 이곳엔 가을, 겨울 컬렉션이 단정하게 진열돼 있었다(‘Less&More’를 주제로 한 컬렉션으로 온화한 색조가 특징). “가을은 사계절 중 특히 아름답습니다”라고 멋쟁이 이탈리아노가 설명했다. “아름다운 색깔을 컬렉션에 잘 반영하고 싶었어요.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색상의 조화거든요.” 놀랍게도 쿠치넬리는 딱 네 가지 컬러만을 혼합해 다채로운 컬러를 완성한다. 바로 네이비, 그레이, 브라운, 블랙! 그러더니 그가 벌떡 일어섰다. 자신의 재킷과 팬츠 실루엣을 보여주며 ‘핏’의 중요성 역시 강조하기 위해 말이다. “가슴 부분이 꼭 맞는 재킷을 입어야 남성적인 몸매가 부각됩니다. 핏이 완벽한 재킷을 입었다면 팬츠는 좀더 유연하게 선택해도 좋아요. 제가 늘 입고 다니는 이 코듀로이 팬츠처럼!”

엔지니어링 학도였던 쿠치넬리는 1978년 색색의 여성용 캐시미어 브랜드를 론칭해 패션계에 입문했다. “15년간 학교에서 공부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배운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오히려 카페에 앉아 사람들이 정치, 여자, 종교, 철학, 휴머니즘에 관해 수다 떠는 것을 들으며 많은 걸 배웠죠.” 그는 스물다섯 살 무렵 무일푼으로 패션 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컬러풀한 캐시미어가 없었기에 반드시 성공할 거란 확신으로 말이다. 왜 캐시미어였을까? “고급 아이템에 집중하고 싶었는데, 캐시미어가 친환경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번 구입한 캐시미어 아이템은 쉽게 버리지 않기 때문이죠. 뭔가 버린다는 행위는 결국 지구를 병들게 할 거라는 관점에서 캐시미어야말로 착한 소재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캐시미어만 특별하다고 주장하진 않았다. “캐시미어 자체가 탁월한 소재이기에 제가 만든 게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단지 이 좋은 소재를 이탈리아 식으로 표현한 게 브루넬로 쿠치넬리일 뿐입니다. 





1985년부터 쿠치넬리는 아내의 고향인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마을 솔로메오의 14세기 성을 구입해 차츰차츰 재건축하기 시작했다(30년간 지속된 재건축은 여전히 진행 중!). “솔로메오는 무려 1,300년 된 도시입니다. 처음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수세기가 지난 후까지 이곳이 유지될 거라 예상이나 했을까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대를 거친 그곳에서 저는 이 도시를 잠시 지키는 사람일 뿐입니다. ‘이 도시의 수호자’라는 아이디어로 솔로메오를 재건축하고 있죠.” 극장, 직업학교, 도서관 등을 갖춘 그곳에는 현재 700여 명의 브루넬로 쿠치넬리 직원들이 거주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뜨개질은 물론 음악, 무용, 예술까지 여러 분야를 교육합니다. 보통 기업에서 관리하는 직업학교와 달리 솔로메오의 학교를 졸업해도 반드시 쿠치넬리에 취직할 수 있는 건 아니죠. 물론 원한다면 솔로메오에서 계속 거주하며 일할 수 있지만, 원치 않는다면 얼마든 다른 지역의 회사에서 일자리를 찾아도 됩니다. 전 세계 어디서 일하든 인류에 도움이 되는 인재를 키울 수 있다면, 그것만큼 의미 있는 일이 또 있을까요?”

‘인류를 위한’은 대화 내내 쿠치넬리가 가장 자주 쓴 단어 조합이다. 덕분에 트렌드 변화에 연연하는 디자이너보다 유유자적하는 철학가와 대화하는 느낌이 든 것도 사실. “모두에게는 타인을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어린 친구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 있지만, 지금 우리는 최고로 멋진 시기에 살고 있어요. 그렇기에 바로 지금이야말로 인간으로서 품위를 되찾을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그는 모든 직원들이 ‘인간적’ 대우를 받을 수 있게 배려하기로 유명하다. 물론 뼛속까지 상업적인 패션계에서 철학적 신념을 지킨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모두가 의미 있게 살기 위해 일합니다. 패션계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저 역시 늘 목표를 세우고 추진하죠. 그러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그 목표를 이루고 싶진 않아요.” 이토록 철학적이고 휴머니즘이 강한 쿠치넬리가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과연 뭘까?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사세요. 하지만 그런 날이 평생 반복될 것처럼 계획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하는 틈틈이 하늘을 바라보세요.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는 것보다 하늘을 볼 때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