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와인

와인에도 제철은 있다. 찌는 더위에 당기는 품종과 살 에이는 추위에 생각나는 와인이 같진 않다.
하루 24시간 온통 방한만 생각하는 요즘, 날이 추워져 따뜻한 와인을 골라봤다.

따뜻한 와인이란 건 사실 착각일 수 있다. 술을 마셔 몸에 열이 오르는 건 결국 알코올 도수가 결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맥주보단 소주가 더 따뜻해지고, 소주보단 보드카나 위스키가 방한에 더 도움이 된다. 그러니 대체로 알코올 도수 12~15% 사이인 와인은 사실 무얼 마시든 달아오르는 정도가 비슷하다. 겉보기부터 차가운 샴페인이든 딥하고 묵직한 컬러의 카베르네 소비뇽이든 ‘난방 효과’는 별 차이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래도 추워서 더 생각나는 와인이 있다. 춥기 때문에 마다하고 싶은 와인도 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우리가 추위를 느끼는 건 물리적인 영하의 날씨에서만은 아니다. 차가운 촉감에도 몸은 움츠러들고, 향기와 맛에 따라서도 땀구멍이 열렸다 닫힌다. 화이트 와인 애호가가 아니라면 굳이 꽁꽁 언 손과 발을 녹이며 청량감 가득한 스파클링 와인을 주문하진 않을 거다. 고작 목을 축이려고, 취기가 고파 찾는 게 와인은 아니다. 겨울엔 분명 겨울의 와인이 있다.

피노 누아, 카베르네 소비뇽, 시라즈, 메를로. 주로 겨울에 떠올리는 와인 품종들이다. 레드 와인에 속하는 이 포도주들은 다들 꽤 무게가 있다. 흔히 얘기하는 쓰고 쉰 맛의 원인인 타닌 함유량이 백포도주보다 높아 맛이 가볍지 않으며, 그래서 갓 담근 후 마시는 것보다 수년 숙성시킨 뒤 딸 때 더 훌륭한 맛을 내는 놈들이 많다. 스페인의 와인 산지 리오하(Rioja)에 와이너리를 둔 깜뽀 비에호(Campo Viejo)의 레세르바(Reserva) 2006년산은 그런 의미에서 썩 괜찮은 레드 와인이다. 국내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리오하는 프랑스의 보르도와 비슷한 레벨의 와인 산지고, 깜뽀 비에호는 그중에서도 생산량, 규모 면에서 압도적인 1위다. 레세르바 2006년산은 스페인의 대표적인 포도 품종인 템프라니요(Tempranillo)를 향이 좋은 그라시아노(Graciano), 마수엘로(Mazuelo) 등과 섞어 만드는데, 자두나 체리를 떠올리게 하는 과일 향이 적당한 씁쓸함과 어울린다. 그냥 눕고 싶어지는 맛이다. 템프라니요로 만드는 대부분의 리오하 와인은 다소 향이 미약한 단점을 커버하기 위해 그라시아노를 섞는다. 그래서 떫지만 거칠지 않고, 달콤하지만 깊이 있는 느낌이다. 영국, 독일, 캐나다 등 레드 와인을 못만드는 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와인이라고 하니 검증된 한 병이라 믿어도 좋을 것 같다.

사실 20세기까지만 해도 와인은 북반구의 음료였다.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 등이 모두가 손꼽는 명산지였다. 실제로 아직도 프랑스의 보르도만 진정한 와인이라 꼽는 고집쟁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남쪽 나라에서도 와인을 잘 만든다. 품질도 좋다. 호주의 시라즈, 뉴질랜드의 리슬링은 그랑 크뤼 옆에서도 그리 부끄럽지 않다. 게다가 품종을 표기하지 않는 프랑스 와인에 비해 라벨이 친절한 이 아랫동네 와인들은 선택하기에도 용이하다. 1800년대 호주에서 최초로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 윈담 이스테이트(Wyndham Estate)의 ‘빈 555 쉬라즈(Bin 555 Shiraz)’는 호주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와인이다. 시라즈 품종은 거의 모든 포도 중에서 색이 가장 진한 편인데, 맛도 대충 그러하다. 타닌이 풍부해 견고하단 느낌을 주고, 달콤하고, 시큼하고, 매운 향이 모두 강해 풍부한 인상이 든다. 특히 후추 향은 꽤나 세 첫 모금엔 다소 놀라게 된다. 독한 만큼 겨울에 어울리는 와인이다. 조금 더 진하고 깊은 맛을 찾는다면 역시 호주의 와이너리 세인트 휴고(St. Hugo)의 ‘쿠나와라 까베르네 소비뇽(Coonawara Cabernet Sauvignon)’이 괜찮다. 호주에선 흔치 않게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을 생산하는 쿠나와라 지역의 와이너리 제품인데 1980년 첫 병을 생산한 이후 200차례 가깝게 상을 수상한 만큼 품질에선 뒤지지 않는다. 삼나무, 계피, 헤이즐넛 등의 쓴맛이 그윽하게 어울려 있어 멋 좀 내고 싶은 우아한 테이블에 잘 어울리며, 카베르네 소비뇽 특유의 파워도 일품이다. 10년 정도 뒀다 디캔팅한 뒤 마실 때 맛과 향이 더욱 훌륭해지는 놈이다.

2012년 기상천외한 뉴스를 하나 들었다. BBC의 보도였는데 러시아에서 추위에 벌벌 떨던 코끼리를 보드카가 구했다는 사연이었다. 러시아 서커스단 소속의 코끼리들은 공연을 위해 시베리아를 이동 중이었고, 갑작스러운 트레일러 화재로 인해 꽤 오랜 시간 밖에서 대기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보통 아프리카 열대 나라에서나 뛰노는 놈들이었으니 꽤나 힘들어했을 거다. 실제로 몇몇 코끼리는 금세 귀에 동상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이때 조련사들이 취한 조치가 물에 탄 보드카를 먹인 거였다. 보드카 알코올의 힘을 빌려 코끼리들을 살릴 요량이었다. 실제로 그 방법은 효과가 있었고, 러시아의 코끼리 서커스 단원들은 무사히 혹한의 추위를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과학적인 이야기인지는 미지수이지만 어쨌든 술의 힘이 증명된 사례다. 보드카에 비하면 한참 약한 알코올이지만 와인 역시 겨울에 유용할 때가 많다. 남은 레드 와인을 따뜻하게 데워 마시는 뱅쇼(Vin Chaud), 글뤼바인(Glühwein), 멀드 와인(Mulled Wine) 등은 감기에 좋고, 한두 잔의 레드 와인은 잠이 오지 않는 밤, 수면제로도 훌륭하다. 술로서의 장점은 모두 포기하는 꼴이 되지만 양파를 적포도주에 담가 두었다 마시는 레시피 역시 사람에 따라서는 늦은 밤 좋은 도우미라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숙성 잘된 좋은 연산의 레드 와인은 추워서 오그라든 마음을 풍성하게 해준다. 손발이 오그라든다 해도 레드 와인에는 좀 감성적으로 호들갑을 떨고 싶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쓰고, 쉬고, 달고, 떫은 맛을 보는 사이 시간도, 내 자리도 깊고 진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겨울 추위가 독하다. 어쩌면 와인이 그럴듯한 피난처가 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