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바지와 함께한 여정

애초에 이 산책의 목적은 낙낙한 남자 바지 같은 옷을 하나 얻는 것.

니트 톱은 클럽 모나코(Club Monaco), 브리프는 캘빈 클라인 언더웨어(Calvin Klein Underwear), 와이드 팬츠는 아뇨나(Agnona), 체인 목걸이와 뱅글은 샤넬(Chanel), 실버 반지들은 모두 엠주(Mzuu), 진주 장식 반지는 블랙뮤즈(Black Muse), 스트랩 샌들은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왼쪽) 블라우스는 샤넬, 수트 재킷과 팬츠는 생로랑(Saint Laurent), 반지들은 모두 엠주, 페이턴트 로퍼는 레페토(Repetto).(오른쪽) 바닥에 놓인 뮬은 지방시(Givenchy by Riccardo Tisci).

“이 바지는 나오자마자 인기가 아주 좋아 다 팔리고 전국에 이거 하나 남았어요.” 어느 편집매장에서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 나오는 소년들이 입었을 법한 거친 울 소재 회색 통바지를 입고 거울 앞에 서 있던 나는 호기심이 일었다. “이렇게 허리선이 높은데 인기가 좋았어요?” “그럼요. 요즘은 워낙 와이드 팬츠를 많이 찾는 데다 무엇보다 바지가 정말 예쁘잖아요!” 숍 매니저의 말대로 정말 예쁜 ‘에이프릴메이’의 이 바지는 조금의 타협도 없이 제 허리선에 맞춰 입어야 하는 하이웨이스트 디자인이다.

나의 궁금증이 여전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그녀는 바지 밑단을 30cm(아, 나의 짧은 다리!)나 접어 넣어 시침핀을 꽂으며 말했다. “와이드 팬츠가 인기지만, 사실 뭐 딱 이게 유행이다 싶은 팬츠는 없어요. 다들 본인 취향에 따라 입으시는 것 같아요. 길이는 이 정도면 되겠죠? 운동화 신으실 거죠?” 나는 여기에 더해 밑단이 넓게 턴업되고 앞주름이 하나씩 잡힌 짙은 남색 캐시미어 와이드 팬츠도 하나 골랐다. 그 바지에는 “이게 요즘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스타일이죠”라는 매니저의 태그가 따라붙었다.

발렌시아가 시절부터 정말 끝내주는 바지들을 만들어온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루이 비통 매장에는 아름다운 갈색 바지가 걸려 있었다. 허리선이 약간 높고 허리부터 무릎까지는 딱 맞고 밑단이 살짝 퍼지는 일자와 벨보텀의 중간쯤 디자인. ‘이런 실루엣은 10년 만인 걸?’이란 생각으로 입어 보니 오, 마이, 갓! 결과는 “어, 다리가 정말 예쁘시네요!”라는 매장 직원의 말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거울 속 내 다리는 허벅지 둘레가 절반으로 줄어든 채 젓가락처럼 쭉 뻗었고, 골반과 엉덩이는 적절한 곡선을 그리고 있어 오히려 날씬해 보였다(이게 바로 하이웨이스트 팬츠의 매력!). 나는 그 갈색 바지를 통해 한동안 잊고 있던 감각, 편안해서 멋스러운 것 말고 멋 부려서 멋스러운 것의 감흥을 되찾았다.

살짝 하이웨이스트와 완전 하이웨이스트의 차이는 지방시 매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컬렉션에 나왔던, 주머니 선에 붉은 밴드가 장식된 묵직한 검정 와이드 팬츠를 입고 거울 앞에 섰을 때 매장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나에게(정확히 말하면 바지에) 쏠렸다. 늑골까지 치받는 이 압도적 하이웨이스트 팬츠에는 리카르도 티시의 카리스마가 농축돼 있다고나 할까? 게다가 이렇게 신비롭고 아름다운 바지가 이런저런 할인까지 받으면 이자벨 마랑의 가죽 퀼팅 바지보다 저렴하다니.

한편 마르니의 큐롯 울 팬츠 앞에서는 약간의 실망과 좌절을 겪었다. 발꿈치를 붙이고 서면 거의 치마처럼 보이는 통 넓은 바지는 복숭아뼈 위의 길이로 입어야 하는데, 내 다리 길이가 모자라 이것도 저것도 아닌 바지가 돼버렸다. 그건 내가 네타포르테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수많은 큐롯 팬츠에 보낸 ‘좋아요’ 사인이 그저 짝사랑이었다는 뜻이었다. 길이 말고는 모든 것이 여전히 속없이 ‘좋아요’인 내 마음을 눈치챈 직원이 아예 밑단을 내려 바닥을 쓸듯 입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바닥을 쓸듯이’는 이번 시즌 와이드 팬츠에 붙는 중요한 수식어). 하지만 큐롯은 큐롯인 채, 아무리 좋아해도 안녕!

바지 순례의 절정이 될 ‘하이웨이스트 벨보텀 팬츠’는 역시 셀린에 있었다. 금빛 사막 빛깔의 두툼하고 묵직한 플레어 팬츠는 밑단의 바깥쪽을 세로로 절개하고 단추를 달아 원하는 대로 작정하고 깃발처럼 펄럭이게 할 수 있었다. 허리선이 높으면서도 다른 바지들처럼 꼭 맞게 입는 것이 아닌, 몸에서 살짝 겉돌 정도의 큰 느낌. 벨보텀이라 70년대 느낌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요지 야마모토나 꼼 데 가르쏭 추종자들이 떠올랐다. 어떤 카테고리에도 들지 않고 독자적인 이 바지의 문제라면, 결코 나는 못 입는다는 것. ‘벨보텀 팬츠 길이를 반이나 잘라내면 그건 무슨 바지인가’라는 넌센스 퀴즈 거리도 못 되지 않나!

이미 여자들은 하이웨이스트 팬츠의 안락함과 섹시함, 70년대 나팔바지의 흥겨움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변화는 다양함이다. 노련한 디자이너들은 한 컬렉션에 한 가지 바지만 내놓는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극단적 차이의 길이와 폭, 질량과 소재의 바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출현 중이다. 여기에 각 브랜드의 정체성과 독자적 기술, 숨은 장식까지 더해지면 바지는 살짝 과장해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하다.

모든 좋은 옷에는 마법 기능이 있다. 55 사이즈 여자를 44 사이즈로 보이게 하거나 짧은 다리는 길어 보이게 하거나 칙칙한 얼굴은 복숭앗빛으로 보이게 하거나. 그러니까 내 자신이 내가 아닌 무지개 너머의 내가 되게 하는 마법 말이다. 나는 이제 아름다운 바지를 입고 마법의 세계로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