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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 여신, 안젤리나 졸리

2016.03.17

by VOGUE

    휴머니즘 여신, 안젤리나 졸리

    한때 할리우드의 액션 여전사였던 안젤리나 졸리는 이제 평화와 휴머니즘을 얘기한다.
    그녀는 지난 10년간 애써 험한 곳을 찾아다니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고,
    고통 받는 세상 모든 곳의 어머니가 되었다.
    사랑과 헌신, 그리고 희생과 용기. 지금 이렇게 강하고 아름다운 여배우는 없다.

    NEW DIRECTION 배우이자 감독, 그리고 유엔 난민기구의 특사인 그녀는 현장에선 캐주얼한 옷을, 무대에선 디자이너 드레스를 입는다. 화이트 셔츠는 막스마라(Max Mara), 팬츠는 할스톤 헤리티지(Halston Heritage).

    NEW DIRECTION 배우이자 감독, 그리고 유엔 난민기구의 특사인 그녀는 현장에선 캐주얼한 옷을, 무대에선 디자이너 드레스를 입는다. 화이트 셔츠는 막스마라(Max Mara), 팬츠는 할스톤 헤리티지(Halston Heritage).

    #2013년 12월, 호주 시드니

    어느 초여름 날 코카투(Cockatoo) 섬. 모자를 쓴 마른 체구의 한 여성이 먼지가 자욱한 영화 세트장에 서 있다. 한 손으론 이마 언저리에 차양을 만든 채 청회색의 하늘을 골똘히 응시한다. 그녀는 비구름이 얼른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낙하산이 자꾸 다른 장소에 착륙하는군요. 낙하산 착륙을 기다리는 동안 다른 장면을 찍죠.” 슬림한 블랙 진과 진흙이 묻은 부츠 차림의 이 여성은 안젤리나 졸리다. 그녀는 우락부락한 생김새에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들 무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카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끔찍하게 마른 체격의 남자 배우 수십 명이 앉아 있었다. “깡마른 남자들을 여럿 고용했어요.” 졸리가 농담조로 말했다. 이 엑스트라들은 2차 세계대전 중 도쿄 근교의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던 미국인 포로 역할이다. 그들은 식량 투하를 기다리며 전시 신문을 읽는다. 이 남자들은 몹시 굶주렸고, 분노에 찬 얼굴이다.

    안젤리나 졸리는 로라 힐렌브랜드(Laura Hillenbrand)가 쓴 루이스 잠페리니(Louis Zamperini)의 전기를 원작으로 한 영화 <언브로큰>을 촬영 중이었다. 로라 힐렌브랜드의 책은 올림픽 육상 선수인 이탈리아계 미국인 소년이 공군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해 영웅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매우 드라마틱하다. 잠페리니는 43년 비행기 사고로 태평양에 추락해 47일간 바다를 떠다녔다. 일본인들이 그를 건져내기 전까지 미국 정부는 잠페리니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종전 2년 전까지 포로수용소에서 그가 온갖 고문을 당했음은 너무 자명하다. 연출자가 되어 <언브로큰>을 만들면서 졸리는 지난해 7월 9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잠페리니와 믿을 수 없을 만큼 가까워졌다. “루이스의 일반인다운 점을 정말 좋아해요. 그는 키가 너무 크지도 않고, 엄청 잘생긴 것도 아니고,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치지도 않는 보통 사람이에요.” 한참 얘기하던 졸리는 잠시 멈추었다 계속했다. “이 영화는 나의 삶을 살기로 결정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예요. 요컨대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위대함을 가지고 있다는 주제죠.”

    안젤리나 졸리는 잔인했던 나날에 대한 묘사 장면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영화가 그려야 할 혹독한 현실 때문인지 세트장의 분위기는 다소 가라앉아 있었다. 깡마른 남자 배우들은 겁에 잔뜩 질린 표정을 지었다. 트레일러 안의 주연배우들 역시 캐릭터에 깊게 잠겨 있었다. 루이스 잠페리니의 악랄한 적이었던 무쓰히로 와타나베 병장은 일본의 록 밴드 스타 미야비(Miyavi)가 맡았는데, 그는 군인의 사고방식에 철저히 이입하라는 졸리의 주문을 되새김질한다고 했다. 그래서 잠페리니를 구타하는 장면을 촬영한 후엔 토할 정도의 역겨움에 시달렸다. “다른 배우들을 증오하는 것은 제게 끔찍한 고문이었어요. 저는 그들에 대한 혐오감을 가져야만 했죠. 그들을 때릴 때, 저는 제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만 했어요. 동시에 단순한 악역으로 비치길 원하진 않았죠. 이 역할에 휴머니티를 담고 싶었습니다. 무쓰히로는 사디즘적인 미치광이지만 동시에 매우 연약하고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사람이기도 했어요.” 미야비가 도쿄에서 안젤리나 졸리를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이 이 역할을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고 했다. “제 나라에선 여전히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주저할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졸리는 제게 모든 분쟁 국가들 사이에 다리를 놓고 싶다고 했죠. 그 말이 무척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그였지만 격렬한 고문 신을 찍고 나서는 역시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고.

    NEW DIRECTION화이트 드레스는 버버리 프로섬(Burberry Prorsum), 귀고리는 아니타코(Anita Ko).

    NEW DIRECTION 화이트 드레스는 버버리 프로섬(Burberry Prorsum), 귀고리는 아니타코(Anita Ko).

    <언브로큰>은 제작비 6,500만 달러가 투입된 대작이다. 코엔 형제 감독이 시나리오 작업을 맡았고, 유니버설이 총대를 멨다. 졸리가 연출한 전작 <피와 꿀의 땅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영화다. <언브로큰>의 세트장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2차 세계대전을 그린 <아버지의 깃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규모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올해 오스카를 넘볼 만한 영화라는 얘기다. 안젤리나 졸리는 북아프리카의 영국 육군 형무소를 배경으로 한 숀 코네리 주연의 전쟁 드라마 <더 힐>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영화는 시드니 루멧이 65년 연출한 작품이다. 연출자로선 아직 초짜인 그녀에겐 좀 버거운 드라마가 아닌가 싶기도 한데, 졸리에게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작품은 사실 그렇게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그녀는 유엔 난민기구 특사를 맡고 있고 분쟁, 전투, 그리고 전쟁이 가져온 트라우마와 자주 마주한다. 구조 대원, 의사, 그리고 기자들이나 오가는 위태로운 모래나 먼지투성이의 길을 아무렇지 않게 오간다. 도나텔라 베르사체의 가운을 입고 레드 카펫을 걷는 것과는 또 다른 졸리의 일상이다.

    지난 14년간 유엔 난민기구의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안젤리나 졸리는 50여 개국의 외교 관련 일을 치렀다. 그리고 이건 이제 그녀 인생의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한다. 졸리는 손에 노트를 쥔 채 난민 캠프의 딱딱한 바닥에 몇 시간이고 앉아 있곤 한다. 지도와 문서를 공부해 시리아 난민들의 피난처를 정확하게 찾아내기 위함이다. 또한 그녀는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고 있는 남수단의 어린이들, 에볼라가 창궐하는 서아프리카의 사람들과 만나 서슴없이 이야기한다. 이 지역들은 이제 안젤리나 졸리의 활동 본거지나 다름없다. “당신과 저는 전쟁의 공포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죠.” 세트장의 텐트에 앉아 졸리가 말했다. 스티로폼 컵에 담긴 야채수프와 신선한 야채즙을 홀짝홀짝 마시며(그녀는 해가 지기 전 서둘러 촬영에 들어가고 싶어 했기 때문에 여유로운 점심 식사를 즐길 시간이 없었다), “어린 친구들이 이 영화를 봤으면 해요. 내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요. 이를테면 인생에 대한 메시지 같은 것 말이죠”라고 말했다. 그녀는 두껍게 바른 선크림 외에 다른 메이크업은 하지 않은 채였고, 호주 햇볕에 노출돼 머리칼은 약간 금발로 탈색되어 있었다.

    졸리의 아들 중 한 명인 매덕스가 세트 주변을 돌아다니며 배우들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매덕스는 졸리의 차기작이자 그녀의 남편 브래드 피트도 출연하는 <바이 더 씨(By the Sea)>에서 프로덕션 어시스턴트로 일할 예정이다. 그동안 매덕스를 제외한 졸리의 다섯 아이들(지난해 12월 열한 살이 된 팍스, 아홉 살인 자하라, 여덟 살인 실로, 그리고 여섯 살인 비비앤과 녹스 쌍둥이)은 세트장에서 약간 떨어진 시드니의 렌트 하우스에 머문다. 그리고 졸리는 대부분 이곳에서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한다. 졸리는 개인 어시스턴트와 교사들, 그리고 정말 믿을 만한 사람들로 구성된 팀에 육아를 맡긴다. 아이들은 홈스쿨링을 하고, 서로가 서로를 돌본다. 하지만 졸리가 아이들에 대한 모든 걸 팀에 위임하는 타입은 아니다. 그녀는 종종 호텔 스위트룸이나 빌라에서 아이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영화를 보고, 일이 없을 땐 아이들을 데리고 시드니 타롱가 동물원의 1박 2일 캠프에도 간다. 지난해 8월엔 남프랑스에 있는 졸리의 자택에서 졸리-피트 부부의 깜짝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가 열렸다. “가족 모두가 팔 걷고 나섰어요. 우리 모두가 결혼식을 준비하게 된 거죠.” 그녀가 말했다. “케이크가 없어서 팍스가 케이크를 만들었고, 아이들이 결혼반지를 나르는 데 쓸 작은 베개를 만들었어요. 브래드의 어머니(제인 피트)는 꽃을 꺾어와 부케를 만들어주셨고요.” 아이들은 결혼 서약서를 쓰는 일도 도왔다. “아이들은 우리가 절대 싸우지 않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아요. 다만 서로에게 미안한 일이 있으면 ‘미안해요’라고 말하기로 약속해달라고 했죠. 아이들이 ‘약속할 거예요?’라고 물었고, 나와 피트는 ‘약속할게요’라고 답했어요.”

    졸리와 피트 커플은 사실 이미 결혼한 부부처럼 보였다. 둘은 언제나 친밀했고 서로를 존중했으며 서로에게 애정이 넘쳐났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결혼은 남다른 삶의 분기점이다. “남편과 아내가 된다는 건 멋진 일처럼 느껴져요.” 1년 전쯤, 브래드 피트가 여전히 안젤리나 졸리의 약혼남이었을 때 그는 2차 세계대전을 다룬 또 다른 영화 <퓨리> 촬영차 영국에 머물렀다. 그리고 피트와 졸리는 손편지를 주고받으며 안부를 물었다. 이유는 그 방식이 실제로 전쟁 기간 동안 일반적인 커플들이 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디테일과 진정성이 졸리에겐 매우 중요하다. <피와 꿀의 땅에서>를 찍으며 그녀는 영화에 등장하는 라디오 방송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저널리스트들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졸리는 클린턴 정부 시절 발칸반도의 외교사절이자 이후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특별 대표로 힐러리 국무부 장관에게 보고를 했던 베테랑 외교관 리처드 홀브룩(Richard Holbrooke)을 통해 유고슬라비아 역사에 대해 공부했고, 그녀가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미국외교협회(CFR) 동료 위원들에게 브리핑을 받았으며, 참여하고 있는 인도주의 구호단체를 통해 전반적인 지식을 스스로 습득했다. 미국 감독조합에 등록되어 있는 연출가 중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CLOSE TO HER HEART 졸리는 <언브로큰>의 원작이 된 로라 힐렌브랜드의 자서전 글귀를 가슴에 새겨 넣었다.

    CLOSE TO HER HEART 졸리는 <언브로큰>의 원작이 된 로라 힐렌브랜드의 자서전 글귀를 가슴에 새겨 넣었다.

    안젤리나 졸리가 처음 루이스 잠페리니의 이야기에 끌린 건 강한 캐릭터와 생존 본능, 끔찍한 조건에서도 잃지 않았던 강한 믿음 때문이었다. 우연히도 졸리와 잠페리니는 이웃사촌이다. 그녀가 살고 있는 할리우드 힐스(Hollywood Hills)에서 잠페리니의 집이 보인다. 졸리는 잠페리니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 힘든 로비 활동을 했고, 마침내 유니버설이 제작을 하겠다고 결정하자 브래드 피트에게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 잠페리니가 볼 수 있게 성조기를 휘두르라” 부탁했다. 졸리는 잠페리니의 가족들과 함께 루이스 잠페리니가 눈을 감는 모습도 지켜봤다. 그녀는 잠페리니에게 영화의 몇 장면만이라도 미리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며, 그 순간들을 즐기면서도 괴로워했다. “제가 루이스보다 훨씬 더 감정적이었어요. 제가 그를 돌보겠다고 갔는데 오히려 그가 나를 돌봤습니다.” 병실에서 재연되는 고난, 회복, 그리고 마침내 승리로 이어지는 장면들. 루이스 잠페리니가 한 소년의 모습으로 담겼다. 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할 정도로 재능이 있었던 소년은 비행기 충돌 사고로 갑작스레 인생이 뒤바뀌고, 이후 수용소에서 고통스러운 시련을 겪는다. “육체적으로 정말 강인했던 누군가가 그 육체를 세월에 항복해야 한다는 것, 그런 자신의 인생을 바라본다는 건 엄청나게 감동적인 경험이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졸리의 눈가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고, 목소리는 잠겨 들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녀는 여기서 2007년 56세 나이에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이자 여배우 마르셀린 버트란드(Marcheline Bertrand)를 떠올렸을 것이다.

    안젤리나 졸리는 한때 잠페리니가 더 이상 가망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마치 어떤 결연함이 깊은 저수지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떠오르는 것처럼 잠페리니는 회복했다. “의사는 그가 스스로 호흡하는 법을 훈련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그건 그가 제게 늘 말하던 거였어요. 훈련해라,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싸워라, 그러면 그들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졸리는 감정적으로 격해졌다. “시적이게도 그렇게 사십 주야를 버텼어요. 그리고 세상을 떠났죠.” 잠페리니의 죽음은 졸리로 하여금 <언브로큰>의 메시지를 더 확고하게 전해주었다. “그는 사람들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알기보다 모든 사람들이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길 원했어요. 그의 삶은 완벽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에서 시작하죠. 그래서 그의 삶을 보면 개인의 정신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졌는지 새삼 일깨우게 됩니다.”

    3년 전 안젤리나 졸리는 내게 직접 연락을 해왔다. 나는 <베니티 페어>에 기고했던 글들을 바탕으로 보스니아 전쟁에 대한 책 <가시적인 광기(Madness Visible)>를 출판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 책을 봤다고 했다. “우린 같은 지점에 서 있는 것 같군요”란 요지의 메시지도 왔다. 당시 졸리는 90년대 보스니아 내전의 공포를 다룬 영화 <피와 꿀의 땅에서>를 막 끝낸 참이었다. 그녀는 브래드 피트와 함께 가장 폭력적이었다는 강간 수용소 보스니아의 포카(Foca)에도 방문했는데 당시 현지 시민들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대체 라라 크로프트(졸리가 출연한 영화 <툼 레이더>의 역할)를 연기하던 여자가 이런 자극적인 영화를 어떻게 만든다는 거야?” 뭐 이런 반응이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녀는 전쟁을 묘사한 가장 강력한 영화 중 하나를 만들어냈다. 졸리는 <피와 꿀의 땅에서>를 영어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어로 만들었다. 나를 비롯해 주위의 사람들은 다들 놀랐다. 전쟁이 시작되던 무렵 그녀는 고작 열일곱 살이었는데 이걸 어떻게 이렇게 제대로 만들어낸 걸까. 이유는 아마 그녀의 넓디넓은 공감 능력 덕일 것이다. 졸리는 난민촌에 발이 묶였거나 전쟁으로 아이를 잃은 여성들에게 감정이입을 했다. 공무원이나 사절단의 판에 박힌 전형적인 시선이 아닌, 감정을 담아 그곳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때때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졸리는 그런 자신에 대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나는 안젤리나 졸리 그녀에게 종종 인생의 다음 장에 대해 묻는다. 물론 그녀의 연출 차기작은 고인류학자 리처드 리키(Richard Leakey)와 케냐의 코끼리를 보호하기 위한 그의 캠페인에 대한 영화 <아프리카(Africa)>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졸리의 이런 창조적인 열정 너머 지평선에 훨씬 더 밝은 종류의 열정이 있을 거라 감지한다. 그녀는 정치계에 입문하게 될까? 아니면 여배우 셜리 템플 블랙(Shirley Temple Black)처럼 외교 쪽? 졸리는 이런 질문을 웃음으로 넘긴다. 그녀는 아직은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하는 일을 더 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전 세계적인 인류 복지 증진을 위한 그녀의 프로젝트 범위는 점점 더 넓어지고 있고, 그녀의 궤도 또한 점점 더 분명해지는 느낌이다. “인도주의 구호단체에서 일하게 되면 정치에 대해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죠. 왜냐하면 만약 대규모의 변혁을 꾀해야 한다면 어떤 형태든 책임을 맡아야 하거든요. 하지만 솔직히 저는 아직 제가 어떤 역할을 맡아야 더 쓸모 있는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저 더 잘 먹고 잘 사는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을 뿐이에요.”

    HARD LESSONS 분쟁 지역을 오가는 임무 속에서 졸리는 새롭게 하고 싶은 일 하나를 더 떠올렸다. “아이들에게 건네줄 수 있는 무언가를하고 싶어요. 일종의 삶에 대한 메시지.” 화이트 로브는 라 펠라(La Perla).

    HARD LESSONS 분쟁 지역을 오가는 임무 속에서 졸리는 새롭게 하고 싶은 일 하나를 더 떠올렸다. “아이들에게 건네줄 수 있는 무언가를하고 싶어요. 일종의 삶에 대한 메시지.” 화이트 로브는 라 펠라(La Perla).

    #2014년 2월, 레바논 베카(Bekaa) 계곡

    지난해 2월 졸리는 <언브로큰>의 편집 작업을 잠시 멈추고 베이루트라픽(Beirut-Rafic)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당연히 공항에는 수많은 플래시가 터졌고, 악수를 청하는 이들이 몰려들었다. 졸리는 평소 필드에서 입는 유니폼처럼 슬림 팬츠와 루스한 블라우스를 입었고, 발레리나 슈즈를 신었다. 오랜 시간 편집실에 갇혀 있었던 탓일까. 그녀는 7,500마일을 날아왔음에도 생기 넘쳐 보였다. 졸리는 나를 꼭 끌어안으며 “좋은 컨실러 덕분이죠”라고 농담을 건넸다. 우리는 베카 계곡(The Bekaa Valley)으로 향했다. 시리아 전쟁을 피해 요르단, 터키, 그리고 레바논으로 도망친 난민의 숫자는 300만 명이 넘는다. 졸리는 바로 다음 날 추방당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정책 입안자들을 만나 난민들을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을 의논했다. 다음 날엔 레바논 수상과의 미팅을 위해 이동하며 유엔 난민기구 현장 사무소에 들러 현지 직원들과 아침을 먹었다. 이동 중 그녀의 수행 직원 중 한 명의 어머니가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했는데, 졸리는 상당한 규모의 현지 정치인들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밝게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당신의 어머니를 위해서예요.”

    #2014년 3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Herzegovina)의 스레브레니차 (Srebrenica)

    그로부터 한 달 뒤 안젤리나 졸리와 나는 영국 여왕의 전용기를 타고 런던을 출발했다. 그 전용기는 함께 탑승했던 당시 영국 외무장관 윌리엄 헤이그(William Hague)에게 여왕이 인도주의적 차원으로 대여해준 것이었다. 졸리 옆 좌석에 앉은 그는 어마어마한 양의 서류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사라예보(Sarajevo)에서 하루 경유한 후 우리는 군용 헬기에 몸을 싣고 보스니아 전쟁 당시 8,000여 명의 이슬람 남자들과 소년들이 학살됐던 스레브레니차로 향했다. 보수당의 유명 정치인인 헤이그는 보스니아 태생인 그의 자문 아민카 헬릭(Arminka Helic)의 추천으로 졸리의 연출작 <피와 꿀의 땅에서>를 보았다. 헤이그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전형적인 요크셔 출신 남자인데, 이 영화를 본 후 마음이 동요하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는 이후 졸리와 함께 ‘분쟁 중 성폭력 방지’ 운동을 함께 시작했다. 둘은 2013년 르완다와 콩고를 함께 방문했고, 이후 졸리는 예방 차원에서 유방 절제술을 받았다. 처음에 그녀는 이 수술에 대해 무거운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나 몇 달 뒤 <뉴욕타임스>에 칼럼을 기고했다. 그녀와 유사한 상황에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다른 여성들을 위함이었다. 그 칼럼엔 어디서도 자기 연민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그래서 아름다웠다. 졸리는 다른 여성들의 결정을 격려하고 있었다. 그녀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여성성을 잃었다는 기분을 조금도 느끼지 않습니다”라고 썼다. “어떤 방식으로도 나의 여성성을 감소시키지 않는, 매우 강인한 선택을 했다는 사실에서 오히려 힘을 얻습니다.” 이런 발언이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여성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안젤리나 졸리의 입에서 나왔다는 건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이 말은 그녀의 대중적 이미지에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순간도 만들었다. 만약 대중의 기억 속에 졸리가 계속 할리우드 악동 같은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면, 이 사건으로 인해 그 이미지는 공식적인 종지부를 찍었다.

    보스니아는 졸리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다. 스레브레니차는 대학살 이후 지금까지도 슬픔이 가득한 장소다. 그곳에는 죽은 자들의 기억, 살아남은 자들의 삶이 계속되는 고통에 신음하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많은 남자들이 살해됐던 포토차리(Potocari) 배터리 공장터에 추모관이 건립됐다. 졸리는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 채 헤이그를 비롯, 몇몇 사람들과 함께 추모 전시를 둘러보았다. 이따금씩 아민카 헬릭이 얼굴이 창백해진 졸리를 부축하고 진정시켰다. 보스니아에서 공포를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졸리도 가슴속 깊숙이 찔리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그 전쟁의 사상자 수는 늘어만가고, 강간, 트라우마, 폭력과 같은 사건은 지금, 그리고 미래 세대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2013년 졸리는 미국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 시상식에서 진 허숄트 박애상(Jean Hersholt Humanitarian
    Award)을 수상하며 이에 대한 진심을 표명했다. “저는 왜 제 삶은 이러하고, 그녀들의 삶은 이와 같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수없이 많은 분쟁과 재난을 목격한 일들은 때때로 그녀를 무겁게 짓누른다. 그리고 영화를 통해 그 풍경을 담아내며 느끼는 짐의 무게는 때로 버겁다. 안젤리나 졸리는 그런 이유로 샤워하던 도중 망연자실해 울어버린 적도 있다.

    WELL-COORDINATED 졸리의 팔에는 그녀 아이들이 태어난 곳의 경도와 위도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거기에 그녀는 한 줄을 더 추가했다. 쇼니(Shawnee), 오클라호마. 브래드 피트가 태어난 곳. 화이트 가운은 구찌(Gucci).

    WELL-COORDINATED 졸리의 팔에는 그녀 아이들이 태어난 곳의 경도와 위도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거기에 그녀는 한 줄을 더 추가했다. 쇼니(Shawnee), 오클라호마. 브래드 피트가 태어난 곳. 화이트 가운은 구찌(Gucci).

    #2014년 6월, 런던

    안젤리나 졸리는 런던에서 윌리엄 헤이그와 함께 ‘분쟁 지역 성폭력 근절을 위한 정상회의(Global Summit to End Sexual Violence in Conflict)’를 공동 주최했다. 이번에 그녀는 가족 모두를 데리고 웨스트엔드 호텔 스위트룸에 머물렀다. 4일의 일정 중 그녀는 라이베리아, 콩고, 스리랑카에서 온 대표들과 미팅을 했고, 정상회의 마지막 날엔 영국에서 가장 영예로운 일 중 하나로 꼽히는 명예 작위 훈장 데임(Dame)을 받았다. 좋은 일에도 심술궂게 반응하곤 하는 영국 언론마저도 이번엔 그저 훈훈한 멘트로 뉴스를 전했다. 이날 저녁 졸리는 심플한 일본식 레스토랑에서 가족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녀는 차분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보드카 모히토를 마셨다. 졸리는 새로운 작위를 받아 다소 흥분한 것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다른 문제가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바로 다음 주에 유엔 업무를 위해 태국으로 날아갈 예정이다. 세계 난민의 날 관련 업무다. 현재 태국의 정세는 대규모 군중 시위와 가두 폭력 시위로 매우 혼란스럽다. 하지만 졸리는 당황하지 않는다. 그녀는 조만간 자신이 가야 할 곳은 이라크이며, 그에 비하면 태국의 상황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초밥과 야키토리를 먹은 뒤 졸리는 호텔로 돌아갔다. 하이힐을 벗고, 네덜란드 대 스페인의 월드컵 경기를 시청하며 토르티야 칩을 먹었다. 중간중간 브래드 피트가 일어나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친구 한 명이 짐을 다 쌌는지 확인하기 위해 잠시 방에 들어왔다. 딸 자하라는 이리저리 떠돌다 방에 들어와 졸리에게 기댔다. “무슨 일이야, 우리 귀염둥이?” 졸리가 물었다. 얼굴을 맞댄 채 자하라가 엄마에게 비밀을 털어놓았고, 졸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후에 졸리가 속삭이며 말했다. “매덕스와 매덕스의 여자 친구가 키스했다네요.” 이 순간 졸리는 할리우드 스타도, 인도주의 구호단체의 디렉터도 아니었다. 그냥 엄마로서의 졸리, 그 자체였다.

    2005년, 당시 29세이던 졸리와 가진 인터뷰는 놀라웠다. 10년 전 안젤리나 졸리는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차분하고 지적이고 신중한 여성이 아니었다. 당시 그녀는 섹스와 지나간 연인들, 전 남편인 빌리 밥 손튼과 보낸 소란스러운 나날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오늘의 안젤리나 졸리는 어떻게 하면 정부가 폭력에 희생된 사람들의 문제를 대면하고 인정할지에 대해, 그리고 그러한 폭력을 처벌하지 않는 문제를 공론화할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비록 모히토를 홀짝이고 있었지만, 그녀는 상원의원, 또는 외교관과 다를 바 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2014년 9월, 몰타(Malta)

    졸리는 차기작 <바이 더 씨> 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촬영 중간에 전화를 걸었다. 언제나처럼 그녀는 멀티태스킹에 능하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연출뿐 아니라 프랑스 여배우 멜라니 로랑(Melanie Laurent)과 함께 주연도 맡았다. 이날은 그녀가 촬영에 들어가는 첫날이었고, 아이들도 함께했다. 그리고 그 주 주말, 유엔 대표단은 몰타로 날아와 이민자들이 바다에서 죽음을 맞는 일을 줄이기 위한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었다. 졸리는 차기 유엔 사무총장으로 거론되고 있는 유엔 난민기구 고등판무관 안토니오 구테레스(Antonio Guterres)를 만날 계획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루이스 잠페리니, <언브로큰>의 최종 편집본, 시리아 난민 상황, 제임스 폴리(James Foley), 스티븐 소트로프(Steven Sotloff) 같은 기자들이 참혹하게 살해된 사건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앞서 던진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안젤리나 졸리는 가까운 미래에 정치, 국제 외교, 혹은 공직자의 삶을 꿈꿀까? “저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어요.” 그녀는 언제나처럼 낭랑한 목소리로, 모든 것을 수용하는 대담하고 매력적인 태도로 말한다. 그녀는 평화와 휴머니티를 향한다.

      에디터
      자닌 디 지오반니(Janine Di Giovanni)
      포토그래퍼
      Mario Testino
      스탭
      스타일리스트 / 제시카 디엘(Jessica Diehl) 헤어 / 아담 캠벨(Adam Campbell) 메이크업 / 토니 가라바글리아(Toni Garavag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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