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샤스와 알레산드로 델라쿠아의 밀월

섬세한 레이스와 오간자, 관능적인 슬립 드레스와 풍성한 플레어 스커트…
파리의 낭만파 패션 가문 로샤스가 알레산드로 델라쿠아와 함께 달콤한 밀월을 시작했다.



질 샌더, 헬무트 랭, 롤랑 뮤레, 그리고 알레산드로 델라쿠아. 이들의 공통점? 물론 모두 훌륭한 재능을 갖췄다는 것. 그리고 하나 더. 안타깝게도 모두 자신의 이름을 걸고 론칭한 브랜드에서 불가피하게 떠난 공통점도 있다. 그 가운데 2009년 6월, 델라쿠아는 회사와 의견 차이로 자신이 14년 동안 키운 시그니처 브랜드에서 떠나기로 결정했다. 나폴리에서 태어나 예술학교 졸업 후 스무 살 때 무작정 밀라노로 상경해 제니, 아이스버그, 발리, 라펠라 등의 디자인팀을 거쳐 1996년 브랜드를 론칭한 그는 특유의 세련되고 여성스러운 실루엣과 섬세한 소재로 여배우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마이클 잭슨은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최신 앨범 <This is It> 발매 기념 공연에서 델라쿠아의 골드 세퀸 장식 팬츠를 입을 계획이었다!).

그가 브랜드를 떠날 때 또다시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할 그의 미래에 대해 긍정적으로 확신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하지만 느닷없이 떠난 것처럼 6개월 만에 깜짝쇼처럼 돌아왔다. 자신의 생일(12월 21일)에서 이름을 따온 브랜드 ‘N°21’으로 말이다. 기존 시그니처 브랜드보다 훨씬 젊고 실용적인 룩들로 구성됐으며, 고전적이고 여성스러운 소재로 사랑스러운 감수성을 표현하는 그의 실력은 여전했다. 그리고 2014 F/W부터는 파리 패션 가문을 맡게 됐다. 마르코 자니니의 뒤를 이어 로샤스를 이끌게 된 것. 희미한 색감의 풍성한 코트들로 채운 데뷔 무대는 자니니와 닮은 듯 달랐다. 올해 첫 시즌을 위해 델라쿠아는 자신만의 개성을 좀더 강하게 드러냈다.

이렇듯 호사스러운 듯 은근히 퇴폐적인 프랑스풍의 로샤스와 스트리트 감성으로 충만한 관능의 이탈리아 아가씨들을 위한 N°21. 이 두 개의 브랜드를 완벽하게 조율하고 있는 알레산드로 델라쿠아를 연말 휴가 직전 밀라노에서 만났다.



가볍고 투명한 소재들이 눈에 띈 2015 봄 컬렉션. 섬세한 꽃 자수 장식을 더한 블라우스와 튜브 드레스, 마르셀 로샤스의 ‘새 드레스’에서 영감받은 벌새무늬 드레스가 무척 아름답다.

VOGUE KOREA(이하 VK) 패션계에는 ‘소포모어 징크스(Sophomore Jinx)’라는 말이 있는데, 로샤스에서의 두 번째 컬렉션이 부담되진 않았나요?

ALESSANDRO DELL’ACQUA(이하 AD) 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눈에 보이거나 만질 수 없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가벼움, 고상함 같은 것 말이죠. 봄 컬렉션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건 오프닝 룩이에요. 제가 표현하려는 바로 그 여성의 모습입니다. 투명 블라우스와 하늘하늘한 풀 스커트까지. 더없이 사랑스럽죠!

 

VK 그러고 보니 투명 소재들이 유난히 많았어요.

AD 순수함과 수줍음, 그리고 막 깨어나는 관능미 사이에 멈춘 소녀를 상상했어요. 그 순간을 포착해 옷으로 표현하고 싶었죠. 완전히 투명하거나 반투명한 옷감을 많이 쓴 이유입니다.

 

VK 오버사이즈 실루엣이나 무거운 소재까지, 마르코 자니니 시절과 연속성이 느껴졌던 지난가을 컬렉션과 크게 달라진 듯 보여요.

AD 데뷔 컬렉션은 모든 여성이 지닌 어두운 면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좀더 영화적으로 접근했죠. 이번에는 가벼움에 중점을 두고 스타일링했기에 크게 달라진 것처럼 보일 거예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남들과 다른 특별함을 지닌 고상한 여인들이 주인공입니다. 최고급 소재를 사용하는 것은 늘 변함없습니다.

VK <보그 코리아> 인터뷰 때 자니니는 ‘로샤스 레이디’를 “패션을 사랑하는 로맨틱한 여성, 고급스러운 옷을 보면 그 가치를 알아채는 여성”이라고 표현했어요. 동의하나요?

AD 음, 맞는 말이군요. 제가 상상하는 ‘로샤스 레이디’는 자신을 사랑하고 예술과 여행을 사랑하며, 세련된 스포츠웨어도 즐길 줄 알아요. 무엇보다 섬세한 이브닝 드레스를 더 멋지게 입는 여성!

 

VK 로샤스에서 러브콜이 온 순간, 기분이 어땠나요?

AD 2013년 어느 여름이었죠. 정말 전혀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연락을 받았죠. 제가 후보 중 한 명이라고 했는데, ‘너무 기대하지 말자! 난 이제 어린애가 아니잖아’라고 스스로 계속 다짐했어요. 고백하자면, 아주 오래전부터 프랑스 패션 하우스의 디자이너가 꿈이었던 건 사실이에요. 로샤스의 여성스러운 감성을 유난히 좋아한 건 두말할 것도 없었죠. 그러니 내가 낙점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찌나 기쁘던지! 사실 로샤스와는 아주 특별한 인연이 있어요. 25년 전, 저의 첫 스승이 디자이너 엔리카 마세이였어요. 그녀의 남편 프랑코 페네가 바로 지금 로샤스가 속해 있는 ‘Gibo’ 그룹 CEO입니다. 운명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디자이너로서 제 이력에 큰 획을 그은 사건입니다.



곳곳을 장식한 검은색 ‘R’ 로고는 레이스 스커트를 겹겹이 레이어드한 낭만적인 룩에 모던함을 더해준다.

VK 로샤스 디자이너로서 맨 먼저 무슨 일을 했나요?

AD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하우스인 만큼 아카이브부터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925년 마르셀 로샤스가 하우스를 창립했을 때 그의 철학은 젊음, 당당함, 우아함이었죠. 그의 컬렉션은 늘 스포티하고 편안한 룩과 좀더 꾸뛰르적인 이브닝 룩으로 양분됐었습니다. 20년대 후반의 파자마 룩, 34년의 ‘새 드레스’와 라텍스 수영복, 37년의 ‘집시 드레스’, 46년부터 선보인 코르셋들 등등. 그의 걸작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군요.

 

VK 그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는 건 뭔가요?

AD 무슈 로샤스가 추구한 우아한 실루엣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의 로샤스 데뷔작이 어떤 면에서 꽤 스포티했다면, 결국 그 실루엣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봄 컬렉션을 준비할 땐 34년 작 새 드레스’에서 많이 영감받았습니다. 아카이브에서 꺼낸 벌새무늬를 오간자에 프린트하거나 수를 놓는 방식이었죠.

VK 하늘하늘한 옷감에 프린트돼 모델들이 걸을 때마다 벌새가 나는 느낌이었어요.

AD 바로 그 느낌을 원했어요! 킴 노박, 신디 셔먼, 루피나 니용고, 스테이시 마틴 같은 여성들이 제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VK ‘로샤스 레이디’가 되기 위한 필수품은 그런 옷인가요?

AD 우아한 장갑, 안경 혹은 선글라스, 그리고 플레어 스커트!

VK 그렇다면 ‘N°21 걸’은 어떤가요?

AD N°21은 좀더 동시대적입니다. N°21이 낮을 위한 옷이라면, 로샤스는 밤을 위한 옷입니다. N°21에는 스트리트 감성이 담겨 있고, 로샤스는 좀더 영화적이고 꿈 같은 느낌이죠. N°21을 디자인할 땐 로샤스를 완전히 잊고, 로샤스 컬렉션을 디자인할 때는 N°21을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우는 게 원칙입니다.





VK 그런데도 당신이 만드는 두 컬렉션에는 공통점이 있어요. 늘 낭만적인 비결은 뭔가요?

AD 전체적인 룩의 무게를 덜어내기 위해 옷감에 수를 놓고 장식을 더하거나, 소재를 어떻게 레이어드할지 무척 세심하게 고민합니다. 그 결과 흔히 로맨틱하다고 정의되는 룩이 완성되는 것 같아요. 고상하고 화려한 첫인상, 그리고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폈을 때 드러나는 놀라운 디테일이 낭만적인 느낌의 비결이 될 수 있겠군요.

 

VK 그렇다면 패션 디자이너는 언제부터 꿈꿨나요?

AD 열네 살 때쯤, 영화를 무척 좋아해 자연스럽게 영화 의상에 푹 빠져 지냈어요. 전설의 코스튬 디자이너 아드리안(Adrian Adolph Greenberg)을 우상으로 여긴 채 말이죠. 그러다 점점 패션 전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예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밀라노로 떠나 본격적으로 패션계에 뛰어들기로 했죠.

 

VK 1996년 브랜드를 론칭하기까지 많은 패션 하우스에서 경험을 쌓았더군요.

AD 제니, 라펠라, 보르보네제, 레코팽, 아이스버그, 말로, 브리오니 등등. 모두 오랜 역사를 지닌 패션 가문이었고 매번 새로운 도전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한 곳에서 꾸준히 일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여러 디자이너들과 함께 일하며 배우는 것도 필요했어요. 한 곳에서 ‘퍼스트 어시스턴트’ 위치에 오르면 다른 브랜드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오기 때문에 옮기는 것도 자연스러웠어요..

VK 민감한 질문일 수 있지만, 괜찮다면 5년 전 ‘알레산드로 델라쿠아’를 떠나던 상황에 대해 들려줄 수 있나요?

AD 인생을 살다 보면 모든 문이 제 눈 앞에서 닫히고 마는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저에겐 바로 그때였어요. 마흔여섯 살의 나이에 다시 0부터 시작해야 했죠. 패션계는 쉽게 잊혀지는 곳입니다. 6개월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고 지냈어요. 그러다 문득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새 출발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시 스무 살이 된 것처럼 에너지가 샘솟았죠. 이름을 잃는다는 건 아주 비극적인 경험이지만,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VK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당신만의 비법이 있나요?

AD 이탈리아의 신현실주의 영화들을 보거나 이른 새벽 수영하러 갑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죠!

VK 지금 당신의 모습은 더없이 활기 넘쳐 보입니다. 제2의 전성기가 시작된 거겠죠?

AD 이보다 좋을 순 없어요! 2015년에는 좀더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더 기대됩니다. 어떤 건지 미리 발설해버리면 행운이 떠날 것 같으니 비밀을 지킬 거예요. 저는 그런 미신을 약간 믿는 편이거든요. 하하!